[고전산문] 행사의 시비분별, 반성과 성찰을 통해 마땅히 옳은 것을 따른다 / 이언적

삼가 생각건대 저는 자질이 본래 우둔하고 학문적인 식견도 넓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좁은 견해를 고수하여 여러 차례 어르신에게 편지를 올리면서도 매우 지리멸렬한 줄을 깨닫지 못했으니, 큰 죄를 지은 것입니다. 지금 보내 주신 편지를 받았는데, 매우 자상한 어조로 반복하여 가르쳐 주셨으며, 또 ‘적멸’이라는 두 글자를 없애고 하학인사(下學人事)의 공정(工程)을 포함시켰습니다. 이는 제가 어르신께 크게 인정을 받은 것이고 지극한 은혜를 입은 것이니, 다시 무슨 말씀을 더 드리겠습니까.

그러나 가르쳐 주신 뜻을 꼼꼼히 검토해 보니, 이단의 잘못된 주장을 모두 버리고 성문(聖門)의 학문으로 들어온 듯하여도 말씀 중에는 사소한 병통이 없지 않으며, ‘물아(物我)에 간격이 없다’라는 주장 같은 경우에는 여전히 허무적멸의 가르침에 빠져 있는 것이기에, 저는 의아한 마음을 떨칠 수 없습니다. 한유(韓愈)는 “순황(荀況)과 양웅(揚雄)은 택하였으나 정밀하지 못하였다.*”라고 말하였는데, 어르신도 이런 평가를 면하지 못할 듯합니다.

제가 우선 옷과 그물에 비유하여 밝혀 보겠습니다. “옷은 반드시 옷깃〔領〕이 있어야 옷자락〔裔〕들이 제자리에 놓이고, 그물은 반드시 벼리〔綱〕가 있어야 눈〔目〕들이 펴진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이 참으로 좋습니다. 그렇지만 옷에 옷깃만 남겨 두고 옷자락은 잘라내고 그물에 벼리만 남겨 두고 눈들을 끊어 버린다면 어떻게 옷과 그물이 되겠으며, 남겨 둔 벼리와 옷깃인들 또 어디에 쓰겠습니까. 천하의 이치는 체(體)와 용(用)이 서로 의존하고 동(動)과 정(靜)이 서로 길러 주는 것인데, 어찌 안에만 전적으로 힘을 쓰고 바깥을 체찰(體察, 전체를 총괄하여 보살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옮긴이 주: 성리학에서, 체(體)는 사물의 본체, 즉 근본적인 것을 가리키고, 용(用)이란 사물의 작용 또는 현상, 즉 근본되는 것으로부터 드러나거나 파생하는 것 모두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성문(聖門)의 가르침은 경(敬)에 중심을 두어 근본을 확립하고, 이치를 궁구하여 앎을 지극히 하며, 자신의 몸에 돌이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경은 또 이 세 가지 사이를 관통하니, 시작을 이루고 끝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에 중심을 둔다는 것은 마음을 전일하게 하여 밖을 제어하고 밖을 가지런히 하여 마음을 기르는 것입니다. 안은 이랬다저랬다 하거나 오락가락함이 없이 고요히 움직이지 않음으로써 온갖 변화에 대응하는 주체가 되고, 밖은 엄연(儼然, 현상()이 뚜렷하여 누구도 감히 부인할 수 없음)하고 숙연(肅然, 삼가하고 두려워하는 모양새)하게 깊고 빈틈없이 성찰함으로써 그 마음속에 있는 바를 보전하고 굳건하게 합니다. 이렇게 오래도록 하여 정(靜)할 때는 비고 동(動)할 때는 곧으며 안은 전일하고 밖은 화평하게 된다면, 힘쓰지 않고 생각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도에 맞는 지극한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두 가지 공부는 어느 한쪽도 폐지해서는 안 되는 것이 명백한데, 어찌 우선 그 체(體)를 놔두고 먼저 용(用)을 배운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정자(程子)는 “마음에서 말미암아 밖으로 대응하니, 밖을 제어함은 그 마음을 기르는 것이다. 안연(顔淵)이 이 말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성인에 나아간 것이니, 후대에 성인을 배우는 사람들은 가슴에 새겨 두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로 보면 본체 공부를 진실로 먼저 하지 않을 수 없지만, 성찰 공부는 도를 체득하기 위해서 더욱 절실히 요구되는 것입니다. 삼가 주신 편지를 보건대 “경을 중심으로 하여 마음을 보전한다.〔主敬存心〕”라고 하셨으니 안을 곧게 하는 공부는 있으나, 의를 실천하여 밖을 방정하게 하는 성찰 공부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 어찌 옷의 옷깃만 얻고 옷자락들을 잘라 내며, 그물의 벼리만 얻고 눈들을 끊어 버린 격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의 형체는 본디 먼저 골수(骨髓)가 있은 뒤라야 피부가 그에 힘입어 튼실하게 붙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골수만을 얻고 피부는 일절 다 제거해 버린다면 어떻게 사람의 몸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 골수마저도 말라서 쓸 곳이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더구나 이미 피부를 제거한 데다 골수마저 온전하지 못한 경우라면 어떻겠습니까. 제가 앞서 “항상 존양 공부를 하여 대본을 세움으로써 온갖 변화에 대응하는 주체가 되게 한다.”라고 한 것은 본디 어르신이 말씀하신 ‘경을 중심으로 하여 마음을 보존해서 먼저 그 본체를 확립한다’라는 것이니, 애당초 그 주장을 헐뜯어 폐기하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잘 살펴보시지 않고 대번에 꾸짖는 말씀을 내리시니, 두려워 흐르는 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편지에 또 “먼저 그 본체가 서고 난 뒤에 아래로 인사(人事)를 배운다.”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도 온당하지 않은 듯합니다. 아래로 인사를 배울 때에 당연히 항상 경을 중심으로 하여 마음을 보존해야 하는 것이지, 어찌 인사를 배제하고 그 마음만을 지켜서 반드시 그 본체가 선 다음에야 비로소 아래로 인사를 배우겠습니까. 이른바 “본체가 먼저 서면 온갖 변화에 맞추어 운용함이 순전하게 한 이(理)의 바름에서 나와 어떤 상황에서라도 마땅함을 얻게 된다.”라는 것은 본디 성현이 남긴 경전(經傳)의 뜻에 위배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순전하게 한 이(理)의 바름에서 나와 어떤 상황에서라도 마땅함을 얻게 된다.”라는 것은 바로 자연스럽게 도에 맞는 성인의 지극한 경지이니, 본체가 이미 선 뒤에 얼마간의 공부가 있다 하더라도 대번에 여기에 이르기는 쉽지 않을 듯합니다. 삼가 다시 정밀히 살펴 주시기를 바랍니다.

또 “만물이 한 이(理)에서 생겨난다.”라는 것은, 인자(仁者)는 천리의 공변됨에 순수하여 털끝만 한 인욕(人欲)의 사사로움도 없기 때문에 천지 만물과 일체(一體)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체가 되는 중에도 친함과 소원함, 멀고 가까움, 옳고 그름, 좋고 싫음의 구분은 저절로 어지럽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공자는 “인(仁)이라는 것은 사람다움이다.”라고 하고, 맹자는 “시비(是非)를 판단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고, 《가어(家語)》에는 또 “어진 사람이라야 사람을 좋아할 수 있고 사람을 미워할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말하자면 인자가 비록 만물을 일체로 삼지만, 옳고 그름, 좋고 싫음의 공변됨은 또한 그 속에서 행해져서 없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순(舜) 임금은 대성인(大聖人)으로서 본래 남과 나의 간격을 두어 자신의 주견을 고집하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서 취하여 선을 하고 자기 사견을 버리고 남을 따랐으니, 순 임금도 취사의 구별이 없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어찌 마음에 남과 나의 간격을 두지 않을 경우에는 망연(茫然)히 물(物)과 하나가 되어 다시 피차(彼此)와 취사(取捨), 호오(好惡)와 시비(是非)를 말할 것이 없어야 온 세상 만물을 동일시하는 인(仁)이 되는 것이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어르신께서는 평정된 마음으로 이치를 살피셔서, 제가 시비를 분별하여 취사함이 있는 것을 죄로 삼지 마시고, 다시 위대한 순 임금이 자기 주견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좋은 점을 따랐던 것처럼 하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갑작스럽고 급박한 가운데서 번잡하고 허탕(虛蕩)한 말을 마구 늘어놓아 분통스럽고 불평한 심기를 드러낼 뿐이라면, 어디에 인격 높은 어르신다운 뜻이 있겠습니까. 아울러 장차 우리 유도(儒道)가 밝아질 날도 없을 것이니, 어찌 깊이 탄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논리는 제 소견을 고집하고 말은 절제할 줄을 몰랐으므로 엎드려 죄를 기다립니다. 삼가 고집스럽고 참람한 저의 죄를 용서하시고 한 번 살펴서 채택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적(迪)은 두려워하며 재배합니다.

-이언적(李彦迪, 1491~1553), '망기당에게 답한 네 번째 편지〔答忘機堂第四書〕', 회재집(晦齋集) 제5권/ 잡저(雜著)

※[역자 주]
1“순황(荀況)과 양웅(揚雄)은 택하였으나 정밀하지 못하였다.
: 한유의 〈원도(原道)〉에 실린 내용으로, 두 사람의 학설이 유학의 정통성을 얻기는 하였지만 순수성과 정밀성은 다소 부족하다는 뜻이다.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조순희 (역) | 2013

※[옮긴이 주]
1. 망기당(忘機堂): 다른 글에 달린 역자의 주석에 따르면, "망기당은 조한보(曺漢輔)로,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정재(靜齋) 조상치(曺尙治)의 손자이다. 생몰년은 미상이나, 뒤에 실린 이언적의 편지 투식을 보더라도 이언적보다 최소한 2, 3십 년은 연상일 것으로 추정된다."  희재집에는 이와 직접 관련이 있는 학문토론을 한 글 1편, 그리고 문답을 나눈 편지글이 4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글들은 희재 이언적 선생이 27세에 쓴 것들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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