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관찰하고 평가하는 일에 대하여

(상략)사람을 관찰하고 평하는 일은☞ 중도(中道)에 맞게 하기가 매우 어려우니, 사람들이 좋게 평하더라도 반드시 직접 관찰하고 사람들이 나쁘게 평하더라도 반드시 직접 관찰하기가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사심(私心)에 따라 호평과 악평을 일삼는 세상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간혹 스스로는 공평한 지론을 편다고 자부하는 사람들도 남이 보기에는 적절치 않은 경우가 많으니, 대체(大體)만 거론하고 사소한 점을 간과하는 경우는 그래도 괜찮지만, 자잘한 흠을 비난하면서 전체적으로 훌륭한 점을 무시하는 것은 너무나 잘못된 일일세.


이 때문에 옛 성현들은 사람을 평할 적에 대체를 보는 데서 그치지 않았으니, 비록 전체적으로 칭찬할 만한 점이 없다 하더라도 사소한 장점이 하나라도 있으면 드러내어 칭찬해 주었네.


예컨대, 위 영공(衛靈公)은 무도(無道)한 임금이었지만 왕손가(王孫賈)ㆍ중숙어(仲叔圉)ㆍ축타(祝鮀)를 각기 재주에 맞게 등용하였으니, 공자(孔子)는 이를 보고 “이렇게 하는데 어떻게 임금 자리를 잃겠는가?”라고 하셨네. 그리고 노(魯)나라의 어떤 사람*이 아침에 대상(大祥)을 치르고는 저녁에 노래를 부르자 자로(子路)가 비웃었는데, 공자는 그러한 자로의 행동을 보고 남에게 요구하는 게 끝이 없다고 주의를 주셨네. 


또 유공지사(庾公之斯)*가 개인적인 은혜를 온전히 하기 위해 공적인 도리를 저버렸지만, 맹자(孟子)는 올곧은 사람과 교유해야 함을 말하기 위해 이 일을 인용하셨네. 또한 등백도(鄧伯道)*가 자기 자식을 나무에 묶어 놓아 죽게 만든 일은 사람으로서 차마 할 수 없는 잔인한 짓이었네. 그런데도 주자(朱子)는 조카를 살리기 위해 자기 자식을 버리는 일은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이라 하여 《소학(小學)》에 기록하셨네. 


옛 성현이 어찌 진심으로 이들의 일이 후세의 모범이 되기에 족하다고 생각했겠는가? 선한 점이 한 가지라도 있으면 버리지 않고 전한 것뿐일세.


그런데 지금 그대는 전체적으로 흠이 있으면 다른 언행은 다소 선한 점이 있더라도 칭찬할 가치가 없다면서, 심지어는 무쇠 화로에 붙은 얼마 안 되는 금붙이, 헌 솜옷에 붙은 한 치의 비단에 빗대기까지 하였네. 허나 얼마 안 되는 금붙이와 한 치의 비단이 전체적인 큰 쓰임새에 영향을 주지는 못할지라도, 금과 비단의 귀중함까지 부인할 수는 없네.


성현의 마음은 지극히 공정하고 사심이 없어서 세상에 교훈을 전하고 후세에 경계를 남길 수 있는 말이라면 모두 수용하셨네. 예컨대 양호(陽虎)*의 말도 인용하고 불경(佛經)의 말도 가르침에 사용하였으니, 후세의 관습처럼 사람의 인품이 좋지 않다고 해서 그 사람의 좋은 말까지 버리지는 않으셨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역자 주]

1.노(魯)나라의 어떤 사람: 이 일화는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 보인다. 자로가 (어떤 사람이)3년상을 마치고 상복을 벗자마자 즐겁게 노래하는 행위를 보고 야박하다고 비웃자, 공자는 3년상을 치른 것만으로도 훌륭하므로 더 이상 완벽하기를 요구하여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2. 유공지사(庾公之斯): 이 일화는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보인다. 유공지사는 위(衛)나라의 유능한 궁수(弓手)로, 위나라에 침입한 정(鄭)나라 자탁유자(子濯孺子)를 치라는 임금의 명을 받고도 자탁유자가 자기에게 궁술(弓術)을 가르쳐 준 스승의 스승이기 때문에 살촉 없는 화살로만 쏘아 살려주었다.

3. 등백도(鄧伯道) : 《소학(小學)》 〈선행(善行)〉에 보인다. 등백도(鄧伯道)는 진(晉)나라의 등유(鄧收)이다. 영가(永嘉 진 회제(晉懷帝)의 연호. 307~312) 말년 진나라가 석륵(石勒)에게 점령당할 때 우복야(右僕射)로 있던 등유가 처자식과 조카를 데리고 도망가다가 다급해지자 죽은 동생의 대를 끊을 수 없다며 자기 자식은 나무에 묶어 따라오지 못하게 하고 조카와 아내만 데리고 도망갔다.

4. 양호(陽虎) :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맹자가 양호의 “부유하려면 불인(不仁)해지고 인(仁)하려면 부유하지 못하게 된다.〔爲富不仁矣 爲仁不富矣〕”라는 말을 인용한 것을 이른다. 주희(朱熹)는 집주(集註)에서 이 말을 한 양호의 의도는 ‘인을 행하려면 치부(致富)에 방해된다.’라는 것이었으나, 맹자는 ‘치부하려면 인에 해가 된다.’라는 뜻으로 인용했다고 하였다. 양호는 양화(陽貨)라고도 하는데, 노(魯)나라 계씨(季氏)의 가신으로 계환자(季桓子, ?~기원전 492)를 가두고 국정을 전횡한 인물이다. 계환자는 노 정공(魯定公) 때 읍성(邑城)을 근거지로 한 반란이 계속되자, 기원전 498년에 당시 대사구(大司寇)로 있던 공자(孔子)의 지지하에 삼도(三都 비(費)ㆍ후(郈)ㆍ성(成))의 성을 허물기 위해 노력했던 인물이다. 이 때문에 공자는 양화를 미워하여 만나주지도 않았으며, 공자의 후학들도 그를 전형적인 소인배로 규정하였다. 《論語 陽貨》 《史記 卷47 孔子世家》


-윤기(尹愭 1741~1826), '김장경에게 답한 편지(答金長卿書)',『무명자집(無名子集)/무명자집 문고 제1책』-


▲원글출처: 한국고전번역원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강민정 (역) ┃ 2013


"유태인이 사람을 평가하는 세 가지 기준: 1.키소(돈을 넣는 주머니) 2.코소(술을 마시는 주머니) 3.카소: 화를 내는 주머니)"-마빈토케이어('탈무드의 지혜)

TAGS.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