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예가 아닌 것에 귀를 막는다
귀가 맡은 것은 듣는 일로, 들을 때는 밝게 들을 것을 생각해야 한다. 이로써 오사(五事, 모습, 말, 봄, 들음, 생각함)*에 통달하고 만 가지 변화에 응하는 것이다. 그러나 밝게 듣는 것이 지나치면 때때로 덕을 해치고 마음에 병이 되니, 지나치게 번거로우면 어지럽고, 들리는 것이 패악하면 번뇌가 쌓인다. 들을 때는 치우치지도 않고 잡박하지 않아서 오직 선(善)을 택해야 하니, 이것을 일러 “덕을 밝히고 어긋난 것을 막는다.”라고 하는 것이다.
때문에 국군(국왕 國王)은 주광(黈纊)*의 장식이 있고 가옹(家翁, 집주인)은 치롱(癡聾, 어리석고 귀먹은 사람)의 풍송(諷誦)*이 있으며 군승(郡丞)같은 미관(微官, 보잘것 없는 직책의 벼슬자리)에 이르러도 하상(何傷)의 설*이 있으니, 귀가 먹음은 진실로 수신제가와 치국평천하의 도리엔 관계가 없을 것이다.
《좌씨전》에 이르기를 “귀가 오성(五聲)의 조화를 듣지 못하는 것이 농(聾, 귀먹을 농)이다.”라고 하였으니, 농(聾)은 천하의 폐질이다. 그러나 중니(仲尼, 공자)가 안연(顔淵)의 물음에 대답하여 이르기를 “예(禮)가 아니면 듣지 말라”고 하였으니, 예가 아닌 것에 귀를 막음은 천하가 인(仁)으로 돌아가게 하는 공이 있는 것이다.
가만히 들어도 뇌정(雷霆, 천둥벼락)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은 귀머거리 병이 아니라 사물에 가려졌기 때문이요, 그 들리지 않는 곳에서도 공구(恐懼, 몹시 두려워 함)하라는 것은 밝게 들으라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보존하라는 뜻이다. 때문에 말하기를 “듣지 않아도 또한 법도에 맞다.”고 하였으니, 듣지 않는 공(功)이 오히려 듣는 것보다 뛰어난 점이 있다.
백성들의 삶이 오래되었는데, 선한 말은 날로 잠복하고 거짓된 말이 날로 늘어나 시끄럽게 귀를 치지만 들을만한 것은 적으니, 귀가 시달려서 시끄러움과 어지러움을 이길 수가 없다. 이에 원차산(元次山)*은 감추는 도리를 써서 스스로 오수(聱叟, 말을 듣지 않는 늙은이)라 불렀고, 해운(海雲 최치원(崔致遠))은 세상을 과감하게 잊고 농산(聾山)에다 뜻을 기탁하였으니 대개 부득이해서이다.(이하생략)
※[역자 주]
1. 오사(五事) : 모습〔貌〕, 말〔言〕, 봄〔視〕, 들음〔聽〕, 생각함〔思〕을 말한다. 《書經 洪範》
2. 주광(黈纊) : 면류관(冕旒冠)의 양쪽 귓가의 좌우에 늘어뜨린 누런 솜 방울. 이것은 정사를 볼 때 참언을 듣지 아니하고, 긴급하지 않은 말을 함부로 듣지 않으려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3. 치롱(癡聾)의 풍송(諷誦) : 당나라 대종(唐代宗)이 일찍이 곽자의(郭子儀)에게 이르기를, “어리석지 않고 귀먹지 않으면 가옹(家翁) 노릇을 할 수 없다.” 하였다.
4. 하상(何傷)의 설 : 하상은 용하상(用何傷)의 준말인 듯하다. 군승은 지위는 현령 다음이나 실권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귀를 막고 못 듣는 채 한들 무엇이 해롭겠는가 하는 뜻인 듯하다.
5. 원차산(元次山) : 원결(元結, 723~773)로 중국 당나라의 시인이다. 자는 차산(次山), 호는 만수(漫叟)이다. 안녹산의 난에 공적이 있었으며 지방관으로서 전란으로 파괴된 지방을 부흥, 선정을 칭송받았다. 시는 사회와 정치에 대한 항의를 담았다.
-한장석(韓章錫, 1832~1894), '오촌설(聱村說)',『미산집(眉山集) 제10권 / 잡저(雜著)』-
▲원글 출처: 한국고전번역원ⓒ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 백승철 (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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