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묘리를 깨닫는 것은 필묵으로 표현하는 것 밖에 있는 것
자첨(子瞻, 소식(蘇軾))이 대나무 그리는 것을 논하면서 “먼저 가슴속에 대나무가 이루어진 다음에 붓을 들어 곧장 완성해야 하니 조금만 방심하면 그 대나무는 사라지고 만다.”라고 하였다. 그것은 도(道)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다. 신묘하게 마음에 부합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빨리 글을 써야 하니, 이것이 《회흔영(會欣穎)》을 지은 까닭이다.
문장은 깨달음을 위주로 하여 말이 제대로 전달되면 이치가 드러나니, 어떨 때는 오래 음미하여 깨닫게 되고 어떨 때는 갑자기 깨닫게 되는데 오직 묘리를 깨닫는 것은 필묵으로 표현하는 것 밖에 있는 것이다. 저 《이아(爾雅)》에 나오는 곤충과 물고기에 주(註)를 달고 굴원의《이소(離騷)》에 나오는 향초(香草)나 주워 모으는 자라면 어찌 더불어 이것을 말할 수 있겠는가?
내가 병이 들어 기억력이 나빠졌을 때 김석릉(金石菱, 김창희)* 상서(尙書)를 방문하니, 상서가 말하기를 “독서는 잊어버리는 것을 근심할 게 아니고 잊지 못하는 것을 근심해야 합니다. 우물물과 같으니 더러운 것을 흘려보내고 묵은 것을 씻어내야 신선한 물이 흘러오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석릉자(石菱子)는 서적을 목숨처럼 여기며 동자 시절부터 만권 서적을 독파하여 축적된 것이 풍부해져 영감과 지혜가 시원하게 툭 트였다. 피상적이고 조잡한 것을 모두 가져다 삭제해 버리고, 문을 닫고 마음을 침잠하여 책상에서 고인(古人)과 읍양(揖讓, 예를 갖춘 겸손한 태도)하며 수작(酬酢, 술잔을 주고받음, 즉 글을 음미함)하다가 매번 뜻에 부합되는 것이 있으면 흔연히 붓으로 기록하였다. 앙엽(盎葉, 간추려 따로 메모한 쪽지를 뜻함)*이 대체로 자주 가득 찼지만 도태시켜버리고, 2권을 얻어 나에게 한마디를 요구하였다.
내가 한두 편을 펼쳐보고 웃으며 말했다. “그대의 깨달음은 아직 멀었으니, 깨달음이 지극한 사람은 말이 없는 법입니다. 후일에 그대를 따라 시냇가 동산 위에 가서 두건을 벗고 오동나무를 어루만지고*, 도연명(陶淵明)의 망운임수(望雲臨水)* 시(詩)를 외우며 허심탄회하게 참된 생각을 드러내고, 적막한 곳에서 지극히 미묘한 소리를 찾으며 토끼며 물고기와 덫이며 통발까지 모두 잊어버립시다. 그때가 되면 누가 《회흔영》이 있는 줄 알겠습니까? 하물며 나의 말이야 군더더기가 아니겠습니까? 비록 그렇긴 하나 우선 그대와 더불어 크게 웃고서 이렇게 씁니다.”
※[역자 주]
1. 김석릉(金石菱) : 김창희(金昌熙, 1844~1890)로, 본관은 경주, 자는 수경(壽敬), 호는 석룡ㆍ둔재(鈍齋),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1864년(고종1) 감조관(監造官)으로서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 고종 때 여러 관직을 거치며, 1882년 임오군란 때 청나라에서 온 마건충ㆍ정여창의 영접관으로 일하고, 1884년 공조 판서에 이어 양관 대제학ㆍ한성부 판윤을 지냈다. 문집으로 《석릉집》이 있다.
2. 앙엽(盎葉) : 옛사람들은 농사를 짓다가 떠오르는 생각이 있으면 감나무 잎에다 적어 밭 가운데에 묻어 둔 항아리에 넣었다고 한다. 이를 본떠서, 독서하다가 깨달은 고금의 고거(考據)와 변증(辨證)에 관한 내용을 쪽지에 기록하여 모아 두는 것을 말한다. 이덕무(李德懋)에게 《앙엽기(盎葉記)》란 저술이 있고, 연암의 《열하일기》에도 ‘앙엽기’란 편(篇)이 있다. 《雅亭遺稿 卷8 附錄 朴趾源撰 行狀》 《熱河日記 盎葉記 序》
3.오동나무를 어루만지고 : 도연명(陶淵明)이 음률(音律)을 잘 몰랐지만 줄이 없는 거문고 하나를 지니고 있다가 술기운이 오르면 거문고를 연주하듯이 어루만져 자신의 뜻을 부치곤 했다고 한다. 오동나무는 그 무현금(無絃琴)을 가리킨다. 《陶靖節傳》
4.망운임수(望雲臨水) : 자유로워 보이는 새나 물고기를 보면 부자유한 자신의 처지가 처량하게 느껴진다는 내용의 시이다. 도연명의 시구에 “구름을 쳐다보면 높이 나는 새 보기 부끄럽고, 물을 굽어보면 노니는 물고기 보기 계면쩍다.〔望雲慚高鳥, 臨水愧游魚.〕”라는 구절의 첫마디를 인용한 것이다. 《陶淵明集 卷3 始作鎭軍參軍經曲阿作》
-한장석(韓章錫, 1832~1894), '《회흔영》 발문(跋會欣穎)',『미산집(眉山集) 제9권 / 제발(題跋)』-
▲원글 출처: 한국고전번역원ⓒ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 이지양 (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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