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시(詩)는 진실된 것이 우러나야

시(詩)는 하늘이 부여한 은밀한 장치(天機 천기)다. 시는 소리를 통해서 울리고 독특한 기운(色澤 색택)를 통해서 빛을 발한다. 맑고 탁한 것, 고상한 것과 속된 것이 시를 통해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우러나온다. 만약 시가 소리와 색택뿐이라면 사리에 어둡고 식견이 좁은 사람도 도연명의 운율을 가장할 수 있을 것이요 악착스러운 필부도 이태백의 구절을 모방할 수 있을 것이다. 


운률을 가장하고 구절을 모방한다할지라도 있는 그대로 본래의 참 모습을 표현하는데에 지극한 공을 들이면 좋은 시가 된다. 하지만 그저 본뜬 것에 그치면 분수를 넘어선 잡스런 것이 되고 만다. 이는 무슨 까닭인가? 그속에 있는 그대로의 진실하고 올바른 것이 담겨있지 않기때문이다. 진실하고 올바른 것이란 무엇인가? 천기(天機, 하늘이 부여한 본래의 것을 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眞者何 非天機之謂乎)


세상 사람들은 시(詩)를 가지고 시를 보고, 사람을 가지고 시를 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는 이는 그 사람을 잘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시까지 잘못 보고 마니, 시를 어찌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 


석주(石洲 권필)의 시(詩)에 대하여 논평하는 이들은 “100년 이래 없던 것이다.” 한다. 이는 진실로 시만 가지고 논평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시를 보고 석주의 사람됨을 알았다.(이하생략)


**옮긴이 주(사족): 부분을 떼어 옮겨 온 번역 글이 짧지만 생각을 다소 요하는 내용이 있다. 그런데 원래 번역문에 한자말도 그렇고 개인적으로 선듯 매끄럽게 잘 와닿지 않는 부분이 일부 있어서 이해를 돕는 차원에서 전체적인 문맥이 통하도록 나름 쉬운 글로 다시 고쳐 옮겼다. 시나 글이 고상하던 속되던 그 표현된 것이 훌륭하고 좋으면 그것을 쓴 사람도 참되고 훌륭한 인격을 가졌을 것이라는 단정적인 추측은 마땅히 고려해봐야 하는 문제다. 물론 이러한 사실은 개인적인 경험이다. 재능있는 문인, 학인(學人) 또는 상업적인 직업글쟁이, 예술인들 중에 유독 B형 인격장애(반사회성, 자기애성, 연기성, 경계선)의 성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이들이 많이 보인다는 것 또한 섣불리 일반화시키기 어려운 지극히 개인적으로 관찰된 경험이다. 일종의 개인적인 트라우마에 가까운 편견일 수도 있지만,  졸보의 고지식한 좁은 소견으로, 정치인은 논외로 하더라도, 이 부류에 무늬만 인간인 이중적인 사람들이 실제로 꽤 많이 있다. 장맛은 시간을 두고 묵히고 끓여서 직접 냄새로 확인하고 맛을 봐야 비로소 안다는 것은 , 생각하며 세상을 조금 살아본 이라면 알게다. 여튼 재능과 인격은 별개라는 것은 보편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경험임에는 분명하다. 또 표현된 것이라도 의도되고 가공된 것과 있는 그대로 진실된 것이 우러나온 것은 다른 차원이다. '도덕적인간 비도덕적사회'를 논한 니버의 통찰은 결코 빈말이 아니다. 해서 생각해 보건대, 계곡선생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시만 보고 그 사람을 안게 아니라 시와 사람 양쪽 모두를 보고 경험해 본 연후에 석주선생(권필)의 진정한 인격, 즉 사람됨을 알았다는 것으로 헤아려 본다. 즉 석주선생의 시가 진실되고 훌륭한 것은 그 사람됨이 참되기때문에 그러한 바탕에서 시를 통하여 있는 그대로 진실된 것이 우러나왔다고 이해해 본다. 참고로 전체 글은 아래 제목에 링크를 걸어 둔다.


- 장유(張維, 1587~1638),'석주집 서(石洲集序)',『석주집(石洲集)』-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하 (역) ┃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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