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그러고도 군자인가
자신을 먼저 돌아보라
남에게 오만하게 굴면서 남이 공손해 주기를 바라고, 남에게 야박하게 하면서 남이 후하게 해 주기를 바란다면 세상에 이런 이치는 없으니, 이것을 강요하면 화가 반드시 이른다. 자기가 잘못을 저질러 놓고서 남이 말하지 못하게 하고, 자기가 일을 망쳐놓고서 남이 질책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걸주의 포악함으로도 하지 못하는데 필부가 할 수 있겠는가.
그러고도 군자인가
인자(仁者)는 자신이 서고자 하면 남을 세워 주고 자신이 영달하고자 하면 남을 영달하게 한다. 요즘 군자는 이와 달라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는 반대로 한다. 자기가 서고자 하면 남이 서는 것을 저지하고 자기가 영달하고자 하면 남의 영달을 막아서 남을 해칠 뿐만 아니라 천도까지 어긴다. 그리하여 사람과 하늘이 모두 그를 미워하니 어찌 패망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무릇 천도는 모든 것을 이루어 준다. 그러므로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천지의 대덕은 낳아 주는 것이다.” 하였다. 용, 뱀, 호랑이, 표범이 모두 하늘 아래 함께 살게 하였으니 하물며 사람이겠는가. 이것을 구분하여 나누는 것은 사람이다. 그러나 이는 좋은 것을 드러내고 나쁜 것을 내치며 어진 이를 숭상하고 사악한 이를 막는 것에 불과하니, 자신의 욕심을 키우고 남의 재능을 가로막는 것이 어찌 군자의 일이겠는가.
잊어야 할 것과 잊어서는 안 되는 것
남에게 은혜를 베풀고 이를 잊는 것은 천도(天道)로써 공평무사하게 자처하는 것이요, 남에게 은혜를 입고 이를 잊지 않는 것은 인도(人道)로써 스스로를 신칙하는 것이다. 대저 일을 이루는 것이 어찌 사람의 힘이겠는가. 그런데 그것을 자신의 은혜로 삼으려 한다면 하늘의 공을 탐하는 것이다. 은혜에 보답하는 것은 사람의 도리이니 이를 잊는다면 의롭지 못한 것이다.
논할 수 없다
주색을 즐기는 자와는 명리(名利)를 논할 수 없고, 명리를 위해 몸을 바치는 자와는 공업(功業)을 논할 수 없고, 공업을 세우려는 자와는 문장을 논할 수 없고, 문장으로 유명해지려는 자와는 도덕을 논할 수 없다.
주는 대로 받는다
남을 곤경에 빠뜨려 호기를 부린다면 남 역시 나를 곤경에 빠뜨려 호기를 부릴 것이다. 남의 것을 빼앗아 이익을 취하면 남 역시 나의 것을 빼앗아 이익을 취할 것이다. 남을 죽여 공을 세우면 남 역시 나를 죽여 공을 세울 것이다.
오만은 고상한 것이 아니다
송나라 조형(晁逈)의 《객어(客語)》에 이르기를,
“오만함을 고상하다 여기고 아첨함을 예의에 맞다고 여기며, 각박함을 총명이라 여기고 우유부단함을 관대하다고 여기는 것은 모두 잘못이다.”
하였는데, 이 어구가 후세의 폐단을 아주 잘 지적하였다.
천성도 가리는 이욕(利欲)
어린아이가 울 적에 ‘호랑이 온다’고 겁을 주면 울음을 그치고, 병아리가 부화하자마자 사람이 ‘솔개가 떴다’고 겁을 주면 엎드리니, 어린아이가 어떻게 호랑이를 알겠으며 병아리가 어떻게 솔개를 알겠는가. 다만 죽음을 두려워하고 삶을 좋아하는 성품을 하늘에서 받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재화(災禍)와 패망(敗亡)이 사람을 해침이 어찌 다만 호랑이와 솔개가 해치는 것만 하겠는가. 병아리는 두려움을 알지만 사람은 두려움을 알지 못하고, 어릴 때는 두려움을 알지만 자라서는 두려움을 알지 못하니, 두려움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요, 이욕(利欲)이 그것을 가렸기 때문이다.
가난은 무더위와 같은 것
이광현(李光顯)이 말하였다. “가난에서 도피하는 것은 무더위를 피하는 것과 같으니 어딜 간들 덥지 않겠는가. 공연히 왔다 갔다 하느라 더 피곤할 뿐이다.”
참기만 하면 병이 된다
지나치게 말을 조심하고 참기만 하는 자는 반드시 마음의 병을 부른다. 정승 김약로(金若魯)가 좋은 예이니, 김약로는 그의 형 김취로(金取魯)가 망언을 많이 하는 것을 근심하여 말을 참기만 하다가 끝내 마음의 병이 생겼다.
대체로 사람이 한평생 쓰는 것은 배운 힘이 아니면 마음의 힘이다. 마음의 힘이 넉넉하면 참으로 좋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면 반드시 배운 힘에 도움을 받아야 한다. 배움이 마음을 수양하기에 부족한데 마음을 지나치게 쓰면 반드시 병이 되니, 말도 한결같이 참기만 해서는 안 된다. 마음속에 있는 것은 반드시 밖으로 드러나게 되니 어찌 참는다고 되겠는가. 요컨대 남의 단점을 지나치게 말하지도 말고 남의 장점을 과장되게 말하지도 말되, 칭찬은 많이 하고 질책은 적게 할 뿐이다. 완사종(阮嗣宗)은 남의 장단점을 말하지 않았으니 어찌 중도(中道)이겠는가.
제 딴죽에 제가 넘어진다
나를 치는 도끼는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남을 쳤던 도끼이며, 나를 제압하는 몽둥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남을 제압했던 몽둥이이다. 내가 남에게 가해할 때에 계략이 교묘하고 술책이 치밀해도 어느 순간에 도리어 상대방이 유리하게 되어 마치 내가 나를 포박하는 꼴이 되니 지혜도 용기도 아무 소용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남이 나를 치지 않기를 바란다면 먼저 내 도끼를 버리고, 남이 나를 제압하지 않기를 바란다면 먼저 내 몽둥이를 버려야 한다. 남을 해치려는 마음이 사라지는 순간 온갖 해로움이 모두 사라지게 되고, 남에게 화를 입히려는 마음이 일어나는 순간 온갖 재앙이 모두 불같이 일어나게 된다.
못 배운 소치
귀하다고 교만해지고 젊다고 방자해지며, 늙었다고 나약해지고 가난하다고 초라해지는 자는 모두 배우지 못한 사람이다.
용렬한 사람은 쓸데가 없다
용렬한 사람을 제어하는 것은 악한 사람을 제어하는 것보다 어렵다. 악한 사람은 필시 자부심이 강한 자일 것이니 잘 제어한다면 무슨 일이든 잘 해 낼 터이지만 용렬한 사람을 어디에 쓰겠는가. 그의 뜻을 따라 주면 환심은 사겠지만 일을 망칠 것이고 뜻을 따라 주지 않으면 불만을 품고 자신을 부리는 사람이 패망하기를 바랄 것이니, 용렬한 사람을 대하기가 참으로 어렵지 않겠는가.
용렬한 사람이 되기보다 죽음을 택하다
사람들은 용렬한 사람이 되는 것을 죽는 것보다 수치로 여긴다.
무신년(1728, 영조 4) 난리 때 청안 현감(淸安縣監) 이정열(李廷說)이 적에게 인부(印符)를 잃고 서울로 붙잡혀 왔다. 이정열은 임금의 혈족이고 색목(色目 당색)도 역도(逆徒)들과 달랐으므로 영조는 그를 살려주려고 하여 물었다.
“인부를 네가 주었느냐, 적이 빼앗아 갔느냐?”
그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주었다고 하면 권병(權柄)이 그래도 나에게 있지만 빼앗겼다고 하면 스스로 용렬한 사람이 될 뿐이니, 차라리 죽을지언정 어찌 용렬한 사람이 되겠는가.’ 하고는 대답하기를,
“제가 주었습니다.”
하였다. 마침내 그는 처형되었다.
잠시도 떠나서는 안 되는 것
도(道)는 잠시라도 떠나서는 안 되는 것이니 어찌 도뿐이겠는가. 이를 확대하여 말해 본다. “선비들이여, 뜻은 잠시라도 태만히 해서는 안 되고, 학문은 잠깐이라도 중단해서는 안 된다. 국가여, 환란은 잠시라도 잊어서는 안 되고, 법도는 잠깐이라도 해이하게 해서는 안 된다.”
진짜 되기의 어려움
거짓 군자 되기는 쉽지만 진짜 소인되기는 어렵고, 거짓 도학자 되기는 쉽지만 참다운 사대부 되기는 어렵다.
대장부의 마음
대장부의 마음은 오행(五行)의 덕, 즉 불 같은 뜨거움, 쇠 같은 단단함, 나무 같은 빼어남, 땅 같은 편안함, 물 같은 평정함을 두루 갖추어야 하니, 그래야만 완전한 덕이요 통달한 재주라고 할 수 있다.
▲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윤미숙 김용기 (공역) 2006], [성대중(1732~1812), 청성잡기> 성언(醒言)] 부분발췌-
▶옮긴이 註: 청성잡기는 생활속에서 직접 체험하고 견문한 일화들과 그때그때 떠오른 단상들을 기록한 일종의 비망기다. 저자인 성대중은 신분이 서얼출신으로 조선의 문인 이덕무, 박제가등과 동시대에 어깨를 나란히 하며 문필을 날렸던 문인이다. 내용구성은 역사의 일단이나 인물의 장단 득실을 헤아려 보는 ‘췌언(揣言)’, 저자가 생활속에서 직접 체험하고 견문하여 얻은 여러 경우의 사실들을 헤아려 성찰해 보는 ‘질언(質言)’, 이를 토대로 예화와 인용을 통해 새로운 깨우침과 성철을 얻게 하는 ‘성언(醒言)’ 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징적인 것은 대부분의 단상이 타인에 대한 가르침이나 훈육보다는 자기성찰을 위한 것, 즉, 화두가 세상이 아닌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데에 있다.
"난관 앞에서도 의기소침하지 않고, 시련의 날에 더욱 굳건하며, 환난 앞에서 흔들림 없는 그런 정신은 어디에 있는가? 18세기 영정 시대에 활동했던 청성靑城 성대중(成大中, 1732-1809)의 가르침을 담았다. 성대중은 이덕무 · 박제가 등과 한 시대에 활동했던 문인이었으나, 서얼이라는 신분의 한계에 가로막혀 자신의 역량을 활짝 꽃피우지 못하고 잊혀진 인물이다. 이 책은 그의 저서 『청성잡기靑城雜記』 가운데 처세와 관련된 내용을 10개 주제, 120 항목으로 선별한 후 저자의 생각을 덧붙인 것이다. 고된 가운데서도 꿋꿋하려 애쓴 옛 선비의 자조의 흔적들은, 지금의 시절을 사는 우리에게 속 깊은 위로가 되어주며, 난관 앞에서도 의기소침하지 않고, 시련의 날에 더욱 굳건하며, 환난 앞에서 흔들림 없는 곧은 정신을 만나게 해준다. 성대중은 화복과 성쇠가 수시로 드나드는 삶에서 마음을 다하여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마음을 다한 후에는 빈 마음에 의연함을 깃들이라고 충고한다. 또한 내가 원치 않는 것을 미루어 남에게 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을 가늠하여 남과 나누도록 하는 더불어 사는 삶을 강조한다."('성대중처세어록' 출판사 서평) ◀참고도서: 성대중처세어록, 정민지음, 푸르메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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