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벗의 도리
보내주신 편지에, “귀천을 막론하고 벗의 힘을 빌어 자신을 성취시켜야 한다(勿論貴賤 須友以成者).”고 하신 말씀은 참으로 틀림없는 말이지요. 신(信)이 오행(五行)에서는 토(土)에 속하고, 토는 또 사계절에 기왕(寄王)*하며, 신(信) 역시 인의예지(仁義禮智) 속을 통행하면서 그 모두에게 성실(誠實)을 기하는 것이지요.
붕우(朋友, 마음이 통하여 서로 가깝게 사귀는 사람)는 신(信)에 속하는데 나머지 사륜(四倫)이 붕우의 강마(講磨, 학문이나 기술을 갈고 닦음)로 인하여 밝아질 수 있는 것이고 보면, 그 의의가 얼마나 소중합니까? (옮긴이 주: 원문은 則其義固不重耶 즉 변치 않는 의리(義理)의 중요성을 강조). 그런데 세상 도의(道義,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나 의리)가 몰락하여 서로 아는 자라고 해야 기껏 얼굴로 사귀거나 세리(勢利, 세력과 이익 혹은 권리)로 사귀는 정도이고, 마음과 정으로 사귀기도 바라기 어려운 세상이 됐는데 더구나 도의로 사귀는 일이겠습니까?
지금 세상에는 또 하나의 폐단이 있는데, 친구간에 서로 사귀면서 아양을 떨거나 서로 추켜 세울 생각만 하고 상대를 경계하고 바로잡아 주는 일은 없으며, 또 혹시 그런 일이 있다가는 금방 자기를 헐뜯는다고 하여 그 끈끈했던 사이가 다시는 합쳐질 수 없이 벌어져 버리고 마니 그 얼마나 한심한 일입니까?
집사(執事)께서 우도(友道, 벗의 도리)를 중히 여기시고 먼저 말씀을 하시니 이 얼마나 감사하고 다행한 일입니까? 어지신 스승을 잃고 의지할 곳 없는 우리들이 나이는 다 늘그막인데 우리 서로 가르치고 서로 타이르고 하여 아직 꺼지지 않고 있는 실오라기 같은 마음이나마 그대로 지켜갈 수 있다면 참으로 큰 다행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하략)
-안정복(安鼎福, 1712~1791), '남군옥 계 에게 답함(答南君玉 堦 書), 순암집(順菴集)/순암선생문집 제2권 /서(書)
*[역자 주]기왕(寄王) : 일정한 자리가 없이 계절에 따라 붙여서 왕(王)하는 것. 즉 목(木)은 봄, 화(火)는 여름, 금(金)은 가을, 수(水)는 겨울에 각각 72일씩 왕을 하는데 토는 일정한 자리가 없이 계절마다 각기 18일씩 기왕을 함.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양홍렬 (역) ┃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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