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진정 두려워해야 하는 것
어떤 독관 처사(獨觀處士)란 분이 집에만 들어앉아 사는데 늘 무슨 두려움이 있는 듯이 자기 모습을 돌아보고 두려워하며, 그림자를 돌아보고 두려워하고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 모조리 두려워한다. 충묵 선생(沖黙先生)이 그에게 찾아가 그런 이유를 물었다.
처사(處士)는 대답하기를, “이 넓은 천지에서 무슨 동물인들 두려움이 없겠느냐? 뿔 달린 놈, 이 [齒] 가진 놈, 날짐승, 길짐승, 굼틀거리기도 하고 법석대기도 하는 온갖 동물들이 한없이 많은데 모두 제 생명을 아껴 자기 유(類)가 아닌 것을 보면 다들 두려워한다.
새는 하늘에서 매를, 물고기는 물에서 물개를, 토끼는 사냥개를, 이리는 물소를, 사슴은 담비를, 뱀은 돼지를 두려워하고 가장 사나운 호랑이와 표범도 사자를 만나면 피해 도망친다. 왜 이런 따위가 그토록 많은지 이루 다 적을 수 없다. 미물은 본래 그렇다 하더라도 사람 역시 두려움이 있기 마련이다.
제일 높은 자가 임금이건만 그도 오히려 하늘을 두려워하며 공경한 모습과 엄숙한 마음을 갖고 밤낮으로 조심한다. 그러나 또 임금과 신하의 사이란 마치 마루와 섬돌 같지만 섬돌에서 땅까지 가려면 높낮이가 아주 동떨어지게 멀다. 낮은 이는 높은 자를, 뒤떨어진 자는 앞선 이를 두려워하기 마련인데 한 자 한 치쯤 되는 정도일지라도 꼭 서로 따지게 되므로 두렵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다.
왜 세상 길이 이토록 험난한지 온갖 실마리가 거꾸로 뒤집혀서 머리에 쓸 갓이 신발 밑에 들어가 있고 깨진 항아리가 좋은 솥 앞에 놓이고, 절뚝거리는 당나귀가 재빠른 백의(白蟻 주 목왕(周穆王)의 팔준마(八駿馬)의 하나)와 함께 수레를 끌고, 못생긴 주미(犨糜 진(陳) 나라 추남(醜男))는 보잘것도 없건만 자도(子都 정(鄭) 나라 미남(美男))와 더불어 자리를 같이한다.
아랫사람은 방자하여 윗사람을 업신여기고, 아첨하는 무리는 가까이 붙어 어진이를 멀리하며, 찬피(鑽皮, 지나치게 가까이 함) 한다는 비방이 날로 성해지고, 석영(射影, 사람을 상하게 하고 해침) 한다는 해독이 널리 번진다. 하물며 나같이 하잘것없는 자질로서 뭇사람이 사는 세상에 태어났음에랴?
저들은 교묘하고 나는 졸렬하며, 나는 겨우 한 가지를 해내는데 저들은 천 가지를 해내므로 가는 곳마다 어려움이 생겨 모두 외도(畏途, 두렵고 험난한 일)가 이루어진다. 아무리 막 달리면서 두려워하지 않으려 해도 열 걸음에 아홉 번은 넘어지게 되니 무서운 생각이 절로 드는데, 두렵지 않을 것인가? 나는 혼자 우뚝 높이 서서 세속의 무리를 벗어나 저 넓은 곳에 가서 나대로 놀고 싶다. 자네는 이것을 어떻게 여기는가?” 하니,
충묵 선생은 거만한 모습으로 의자에 기대앉아 웃으면서 이르기를, “나의 생각은 이와 다르다. 하늘의 위엄도 나는 두렵지 않고 제왕(帝王)의 귀함도 나는 두렵지 않으며 포악한 자객(刺客)이 큰소리 치는 것도 나는 두렵지 않고 사나운 호랑이가 으르렁거림도 나는 두렵지 않다.” 하였는데, 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처사는 깜짝 놀라 일어나며,
“자네는 너무도 자신을 헤아릴 줄 모르는군. 왜 말을 그리 쉽게 하는가. 저 밝고 큰 상제(上帝)는 사람의 선악(善惡)을 굽어 살피신다. 혹 진노(震怒)하면 우뢰와 번개가 갑자기 일어나고 거센 바람을 휘몰아치므로 모래가 날리고 돌이 달아나며, 바다는 장님이 되고 산은 귀가 먹으며, 벼락을 때리기도 하고 또 번쩍이기도 한다. 칼날 같은 번개가 뻗칠 때는 하늘이 쫙 찢어지는 듯하고 땅이 쩍쩍 갈라지는 것 같다.
몰아치는 육정(六丁)이 위엄을 더한다면 아무리 주 성왕(周成王)일지라도 넋을 잃게 될 것이며 모두 숟가락을 떨어뜨리며 어쩔 줄을 모를 텐데 누가 능히 기둥에 기대서서 꿋꿋이 버틸 건가? 이는 바로 하늘의 위엄이 아주 무섭다는 것이다. 자네가 두렵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하니, 선생은 이르기를,
“정도(正道)를 지키고 남을 속이지 않으면 하늘도 나에게 위엄을 부리지 않을 것인데 내가 왜 이것을 두렵게 여기겠는가?” 하였다. 처사는 이르기를,
“금상(金床)이 번쩍이고 악좌(幄座, 천막안에 왕이 앉는 자리)가 삼엄한데, 야경군(夜警軍)은 요도(徼道 순경(巡警) 도는 사잇길)에서 순을 돌고 우림위(羽林衛 임금을 호위하는 군사)는 쌍봉궐(雙鳳闕)에 벌여서서 삼성(參星)의 깃발 정성(井星)의 도끼를 메고 서 있다가 출입에 경필(警蹕, 경계하여 통행을 엄중히 제한함)한다. 왼쪽의 헌대(憲臺)는 철관(鐵冠)을 쓰고 오른편 집법관(執法官)은 단필(丹筆 죄상을 붉은 색깔로 기록 한 데서 나온 말)을 잡았는데 엄숙한 모습으로 꼬치꼬치 물을 때면 온갖 벼슬아치 차례로 달려온다.
이렇게 되면 서릿발 같은 호령이 느닷없이 내려지고 천둥 같은 꾸지람이 잇달아 이르므로 한 가지의 일이라도 삼가지 않을 경우에는 온 집안이 멸망하는 화가 닥친다. 이는 천자(天子)의 위엄이 아주 무섭다는 것인데, 자네는 또 이것도 두렵게 여기지 않는가?” 하니, 선생은 이르기를,
“대개 임금은 높고 신하는 낮아 그 형세가 마치 갓과 신처럼 떨어져 있다. 밑에 있으면서 위를 섬길 때는 법도에 꼭 맞게 행동을 하여 만나면 꿇어앉고 절할 때는 고개를 숙여야 한다. 무슨 명령을 들으면 몸을 더욱 구부려 맡은 일을 잘 지켜 나가야 한다. 이와 같이 하면 임금이 어찌 위엄이 되겠으며 신하가 어찌 두려움이 있겠는가?” 하였다.
처사는 이르기를, “만약 분육(賁育 옛날 역사(力士)인 맹분(孟賁)과 하육(夏育)) 같은 무리가 성을 내고 이리처럼 덤비며 한 번 외치는 고함 소리에 바람이 부딪치고 구름이 휘날리는 듯하다. 대낮에 사람을 찔러 죽이고 온 저자에 피가 흘러도 남은 위엄이 그치지 않아서 날아 솟을 듯이 제멋대로 날뛰면서 찢어질 듯이 부릅뜬 눈은 별처럼 반짝이고 바짝 세운 머리칼은 가시처럼 뻣뻣하다. 발로 호랑이를 짓밟고 가죽을 벗기기도 하며 맨손으로 곰을 잡아 다리를 찢기도 하는데 항장(項莊)의 칼춤도 하찮게 여기고 인생(藺生)이 기둥을 흘김도 가소롭게 여긴다. 이는 자객(刺客)의 사나운 짓인데 자네는 또 이것도 두렵게 여기지 않는가?” 하니, 선생은 이르기를,
“얼굴에 침을 뱉으면 저절로 마르기를 기다리고, 다리를 벌리고서 그 밑으로 나가라면 엉금엉금 기어나갔다는 것처럼 마음을 텅 비워 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내가 남을 거스르지 않으면 저들이 왜 나에게 성낼 리가 있겠는가? 이도 족히 두려울 것이 없다.” 하였다.
처사는 이르기를, “젖 먹이던 범이 굴 밖에 나와 고깃덩이를 혀로 핥으면서 어금니를 갈고 발톱을 짝 벌리며 입에서 내는 울음소리는 한없이 사납다. 한마디 ‘으흥’ 소리에 바람이 절로 일어나고 껌벅이는 눈초리에 번개가 번쩍인다. 날개가 없어도 나는 듯이 만리 길을 순식간에 달려가니 아무리 범 잘 잡는 풍부(馮婦, 제나라 사람, '신분이 상승하여 예전에 그만 둔 일을 얼결에 습관처럼 다시 하는 것'을 비웃는 고사성어 '중작풍부重作馮婦'는 이 사람에게서 비롯되었다 )일지라도 정신을 잃고 기가 꺾일 것이다. 이는 사나운 호랑이가 으르렁거린다는 것인데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하니,
선생은 이르기를, “자부심도 있고 대비도 충분하니 이것도 족히 놀랄 것이 없다.” 하였다.
처사는 이르기를, “그러면 자네가 두려워하는 것은 과연 무엇이며, 있다는 것인가 없다는 것인가?”하니,
선생은 이르기를, “난들 어찌 두려움이 없을 수 있겠는가? 내가 두렵게 여기는 것은 남에게 있지 않고 바로 내게 있다네. 턱 위 코 아래에 안에는 이가 있고 겉에는 입술이 있는데 닫혔다 열렸다 하는 것이 마치 문과 흡사하다. 먹는 음식도 여기를 통하여 들어가고, 지껄이는 말도 여기로부터 나오게 되니 없어서는 안 될 것이지만 또한 두렵게 여기지 않을 수 없는 자리이다. 옛날 금함구(金緘口,함부로 말하지 않음)란 명(銘)을 거울삼을 만하고 또 원속이(垣屬耳, 남의 말을 엿듣거나 기웃대지 않음)란 시(詩)도 눈여겨 봐야 할 것이다.
한마디 말, 한순간 침묵이 영예와 수치의 원인이 된다. 이기(食其)가 이 때문에 삶겨서 죽었고, 오피(俉被 한 고조(漢高祖) 때의 변사)도 이 때문에 사형을 당했으며, 미형(彌衡)도 이 때문에 몸을 망쳤고, 관부(灌夫)도 이 때문에 기시(棄示, 공개처형하여 시신을 공개적으로 전시하는 극형)의 형벌을 당하였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은 남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자기의 입을 두렵게 여겼다. 진실로 이 입만 삼가면 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뭐 어려움이 있겠는가?
지금 처사는 혀를 놀려 하는 말이 칼날처럼 날카롭고 가루처럼 쏟아져 세상길이 험난하다느니 평탄하다느니, 남의 말이 옳으니 그르니 잘도 비평하니 참으로 말을 잘한다고 할 수 있고 또한 재주도 특이하다 하겠다. 그러나 대개 입이란 몸을 망치므로 말을 잘못하면 화가 따른다.
자네가 이러고도 한 세상에 화를 면하려고 함은 마치 도망쳐 숨은 자를 북을 치면서 찾는 것과 똑같은 셈이다. 아무리 빨리 달려가 찾고자 한들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그런데 지금 처사는 겉으로는 두렵다 말하나 실은 두려움이 없으며 화를 싫어하면서도 화를 스스로 불러들이고 있으니 나는 적이 가소롭게 여긴다.”하니,
처사는 이 말을 듣고 앉은 자리를 조금 물러나 한참 머뭇거리다가 정신을 가다듬고 낯빛을 고치고 말하기를, “내가 불초하긴 해도 지금 선생의 가르침을 들으니 환히 깨닫는 마음이 마치 멀었던 눈을 뜨고 밝은 햇빛을 본 것과 같다.” 하였다.
[역자 주]
1. 찬피(鑽皮) : 지나치게 사랑한다는 비유. 《당서(唐書)》위징전(魏徵傳)에 “지금 형벌과 상이 공정치 못하여 좋아하는 자에게는 가죽을 뚫고 속털이라도 내어 줄 듯이 아껴주고, 미워하는 자에게는 때를 씻고 흉터를 찾아내듯이 너무 가혹하게 한다.” 하였다.
2. 석영(射影) : 물여우의 별칭으로 남모르게 사람을 해친다는 비유이다. 《시경(詩經)》소아(小雅) 하인사(何人斯)편에 “저 사람은 도깨비도 되었다가 또 물여우도 되었구나.” 하는 주에 “이 물여우는 입에 모래를 머금고 사람의 그림자에 뿜으면 그 사람에게 바로 피부병이 생긴다.” 하였다.
3. 외도(畏途) : 세상 인심이 험난한 길처럼 두렵다는 비유. 《관자(管子)》계편(戒篇)에 “군자라야 무거운 짐을 지고 외도를 넘어 끝까지 가는 일을 해낼 수 있다.” 하였다.
3. 육정(六丁) : 둔갑술(遁甲術)을 부릴 때 부른다는 신장(神將)의 이름.
4. 쌍봉궐(雙鳳闕) : 지붕 위에 황금으로 봉황의 장식을 한 두 궁궐. 《한서(漢書)》동방삭전(東方朔傳)에 “폐하께서 성 안이 좁다 하여 왼편에는 봉궐, 오른편에는 신명전(神明殿)을 짓도록 하고 천문만호(千門萬戶)라 했다.” 하였다.
5.출입에 경필(警蹕) : 천자(天子)가 나갈 때에는 경(警)이라 외치고, 들어올 때에는 필(蹕)이라 외쳐서 진을 트고 행인(行人)을 금하는 것을 말한다.
6. 인생(藺生)이 기둥을 흘김 : 전국(戰國) 때 조(趙) 나라 인상여(藺相如)가 왕명(王命)으로 화씨벽(和氏璧)을 가지고 진(秦)의 15성(城)과 바꾸려 진(秦) 나라에 가서 구슬을 소왕(昭王)에게 바쳤더니 왕이 받고 성을 줄 뜻이 없으므로, 속임수를 써 상여가 구슬을 도로 받아들고 이내 몇 걸음 물러나 돌기둥을 흘겨보며, “억지로 이 구슬을 빼앗으려면 이 구슬이 신(臣)의 머리와 함께 기둥에 부딪쳐 부서지리이다.” 하였다. 《史記 藺相如傳》
7. 금함구(金緘口) :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는 비유. 《공자가어(孔子家語)》관주(觀周)에 “후직(后稷)의 사당 앞에 금으로 만든 인형이 있는데 입을 세 군데나 꿰매었고 그 등에 새겨진 명(銘)이 있는데 ‘옛날 말을 삼간 사람이다.’ 했다.” 하였다.
8.원속이(垣屬耳) : 남의 말을 엿듣는다는 비유.《시경(詩經)》 소아(小雅) 소반(小弁)에 “군자(君子)는 말을 경솔히 하지 말라. 저 담에도 귀가 있다.” 하였다.
-이규보(李奎報, 1168~1241), '외부(畏賦)', 동국이상국전집(東國李相國前集) 제1권/ 고부(古賦) 6수(首)-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김철희 (역) ┃ 1980
'고전산문 > 백운거사 이규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전산문] 게으름 병 (0) | 2018.01.04 |
---|---|
[고전산문]슬견설(虱犬說): 한쪽으로만 치우친 감정에 대하여 (0) | 2018.01.04 |
[고전산문]미친 듯이 보이나 그 뜻이 바른 것 (0) | 2018.01.04 |
[고전산문] 이상한 관상장이의 안목 (0) | 2018.01.04 |
[고전산문]방선부(放蟬賦): 거미줄에 걸린 매미를 풀어 준 까닭 (0) | 2018.01.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