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미친 듯이 보이나 그 뜻이 바른 것
세상 사람들이 다 거사(居士)를 미쳤다고 하나, 거사는 미친 것이 아니요, 아마 거사를 미쳤다고 말하는 자가 더 심하게 미친 자일 것이다. 그 자들이 거사의 미친 짓 하는 것을 보았는가? 또는 들었는가?
거사가 미친 것을 보고 들었으면 어떠하던가? 알몸에 맨발로 물이나 불에 뛰어들던가? 이가 으스러지고 입술에서 피가 나도록 모래와 돌을 깨물어 씹던가? 하늘을 쳐다보고 욕을 하던가? 땅을 발로 굴려 제끼며 꾸짖던가. 산발머리를 하고 울부짖던가? 잠방이를 벗고 뛰어 다니던가? 겨울에 추위를 모르며, 여름에 더위를 모르던가. 바람을 잡으려 하고, 달을 붙들려 하던가? 이런 일이 있으면, 미쳤다 하겠지만, 그렇지도 않은데 어찌 미쳤다 하느냐?
아, 세상 사람은 한가하게 지낼 때에는 용모와 언어, 의복 차림이 사람 같다가, 하루아침에 벼슬자리에 앉으면 손(手)은 하나인데 손놀림이 전과 같지 않고 마음은 하나인데 옳지 못한 두 가지 마음으로 바른 길을 좇지 않고, 이목(耳目)과 총명이 뒤바뀌며, 동쪽ㆍ서쪽이 바뀌어지며 서로 속여 현란하여서 중도로 돌아갈 줄 모르고, 필경 궤도를 상실하여 엎어지고 뒤집어진 뒤에야 그만 두니, 이는 겉으로만 엄연하고 속은 실상 미친 자인 것이라. 이 미친 것은 저 물과 불에 뛰어들고, 모래와 돌을 깨물어 씹는 자보다 더 심하지 않은가?
아, 세상에는 이렇게 미친 사람이 많은데, 자기를 돌아보지 않고 어느 겨를에 거사를 보고 미쳤다고 웃느냐. 거사는 미친 것이 아니라, 그 형적은 미친 듯하나 그 뜻은 바른 것이다.
-이규보(李奎報 1168~1241), '미친 자에 대한 변[狂辨]', 동문선(東文選) 제105권/변(辨)
▲원글출처:ⓒ 한국고전번역원 ┃ 양재연 (역) ┃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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