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슬견설(虱犬說): 한쪽으로만 치우친 감정에 대하여
어떤 손이 나에게 말하기를, “어제 저녁에 어떤 불량자가 큰 몽둥이로 돌아다니는 개를 쳐 죽이는 것을 보았는데, 그 광경이 너무 비참하여 아픈 마음을 금할 수 없었네. 그래서 이제부터는 맹세코 개나 돼지고기를 먹지 않을 것이네.” 하기에,
내가 대응하기를, “어제 어떤 사람이 불이 이글이글한 화로를 끼고 이[虱]를 잡아 태워 죽이는 것을 보고 나는 아픈 마음을 금할 수 없었네. 그래서 맹세코 다시는 이를 잡지 않을 것이네.” 하였더니, 손은 실망한 태도로 말하기를, “이는 미물이 아닌가? 내가 큰 물건이 죽는 것을 보고 비참한 생각이 들기에 말한 것인데, 그대가 이런 것으로 대응하니 이는 나를 놀리는 것이 아닌가?” 하기에,
나는 말하기를, “무릇 혈기가 있는 것은 사람으로부터 소ㆍ말ㆍ돼지ㆍ양ㆍ곤충ㆍ개미에 이르기까지 삶을 원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마음은 동일한 것이네. 어찌 큰 것만 죽음을 싫어하고 작은 것은 그렇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개와 이의 죽음은 동일한 것이네. 그래서 그것을 들어 적절한 대응으로 삼은 것이지, 어찌 놀리는 말이겠는가 ?
그대가 나의 말을 믿지 못하거든 그대의 열 손가락을 깨물어 보게나. 엄지손가락만 아프고 그 나머지는 아프지 않겠는가? 한 몸에 있는 것은 대소 지절(支節)을 막론하고 모두 혈육이 있기 때문에 그 아픔이 동일한 것일세. 더구나 각기 기식(氣息, 숨을 쉬는 기운, 즉 생명의 기운)을 품수(稟受,선천적으로 재능이나 성품을 타고남)한 것인데, 어찌 저것은 죽음을 싫어하고 이것은 죽음을 좋아할 리 있겠는가?
그대는 물러가서 눈을 감고 고요히 생각해 보게나. 그리하여 달팽이 뿔을 쇠뿔과 같이 보고, 메추리를 큰 붕새처럼 동일하게 보게나(視蝸角如牛角 齊斥鷃爲大鵬). 그런 뒤에야 내가 그대와 더불어 도(道)를 말하겠네.” 하였다.
-이규보(李奎報, 1168~1241), '슬견설(虱犬說)', 『동국이상국전집 제21권/설(說)』-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김동주 (역) ┃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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