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장독덮개로 쓰일지라도

(원문 60자 빠짐) ‘우자(右者)는 삼가 아룁니다’라는 의미의 ‘우근진(右謹陳)’을 들어 타매(唾罵, 침을 뱉어가며 꾸짖는다는 뜻으로, '몹시 더럽게 생각하거나 욕함'을 이르는 말)하고 있다. 이른바 ‘우근진’이란 말이 저열한 표현인 것은 사실이나, 세상에 붓대를 쥐고 글줄이나 쓴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는가마는, 그들의 글을 책으로 간행한 것들을 보면 모두가 가득 늘어만 놓은 음식의 찌꺼기처럼 시금떨떨한 것에 지나지 않으니, 왜 구태여 문서의 서두어나 말을 꺼낼 때 사용하는 상투어만을 나무라는지 모를 일이다. 


제전(帝典, 《서경(書經)》 요전(堯典)ㆍ순전(舜典))의 ‘월약계고(曰若稽古, 옛일을 상고하건대)’나 불경(佛經)의 ‘여시아문(如是我聞, 이와 같이 내가 들었노라)’도 바로 지금의 ‘우근진’과 같은 성격의 투식어((套式語, 형식처럼 굳어져 버린 상투적인 말)일 뿐이다.


특히 봄 숲에서 새 울음을 들으면 소리마다 각기 다르고 해시(海市, 신기루현상으로 바다위에 나타나는 도시, 여기에선 이국의 도시를 가리킴)에서 보물을 둘러보면 하나하나 다 새로우며, 연잎 위의 이슬은 본디 둥글고 초(楚) 나라의 박옥(璞玉, '화씨의 벽')은 깎지 않은 채로 있다. 이것이 바로 척독가(尺牘家)들이 《논어(論語)》를 조술(祖述, 선인(先人)의 설(說)을 근본으로 하여 그 뜻을 펴 서술함)하고 풍아(風雅 ,시경(詩經))로 거슬러 올라간 점이다.(옮긴이 주: 척독은 편지글을 말한다, 여기서 척독가란 편지글을 포함하여 격식에 구애됨없이, 상대와 말을 주고 받는 듯한 자연스런 형식의,  진정이 담긴 소품글을 쓰는 사람들을 두루 칭한다. 이는 이 글의 중심 주제다.)


사령(辭令, 말로 응대하는 것)으로 말하면 자산(子産)과 숙향(叔向)을 본받고 장고(掌故, 예로부터 이어져 오는 관례)로 말하면 《신서(新序)》와 《세설(世說)》을 본받았다*. 확실하고 적절한 점으로 말하면 양책(良策, 훌륭한 대책이나 책략)을 올린 가 태부(賈太傅 가의(賈誼))나 정사(政事)를 주관하던 육 선공(陸宣公 육지(陸贄))만 그러했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저들은(침을 뱉어가며 글의 수준을 따지는 이들) 일단 고문사(古文辭)라 하면 단지 서(序)와 기(記)**가 으뜸이 되는 줄만 알아서, 거짓으로 글을 짓고 부화한 표현들을 끌어다 쓰고는, 정작 이러한 글들에 대해서는 소가(小家, 대가(大家)의 반대말로 하잘것 없는 작가란 의미)의 묘품(妙品, 교묘하게 꾸민 작품)이라고 배척하여, 밝은 창가의 조촐한 궤석(几席, 좌석과 돗자리를 아울러 이르는 말)에서 잠이 깬 뒤 베개 고이고 읽을 따름이다.(**옮긴이 주: 참고, ' 문장글의 분류'


무릇 공경은 예(禮)를 갖추어야 확립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엄숙하고 근엄하게만 대하는 것은 어버이를 섬기는 도리가 아니다. 더 나아가 큰 손님이라도 맞이하듯 도포를 떨쳐입고는 대충 안부나 묻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이는 어버이를 공경한다고는 할 수 있겠지만 예를 안다고는 할 수 없다. 기쁜 안색과 부드러운 목소리로 격식에 구애되지 않고 곁에서 어버이를 봉양하는 모습을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빙그레 웃으며 “아까 한 말은 농담이다.*” 한 것은 공자다운 멋진 해학이요, “아내가 ‘닭이 울었다’ 하자, 남편은 ‘아직 어두운 새벽이다’ 말하네.*” 한 것은 시인(詩人, 글을 지은 해당 작가를 가리킴)의 편지인 셈이다.


우연히 상자 속을 뒤지다가, 추운 겨울을 맞아 창구멍을 바르려던 참에 옛날에 친구에게 보냈던 편지의 부본(副本)으로 쓸데없는 것들을 찾아내었는데, 모두 50여 건이었다. 어떤 것은 글자가 파리 대가리만 하게 작고 어떤 것은 종이가 나비 날개마냥 얇다. 어떤 것은 장독 덮개로 쓰기에 넉넉하고 어떤 것은 농(籠, 대로 만든 바구니)을 바르기에 부족하다. 이에 한 권으로 베껴 내어 방경각(放瓊閣)의 동루(東樓)에 보관한다.


임진년(1772) 맹동(孟冬) 상한(上澣)에 연암거사(燕巖居士)는 쓴다.


※[역자 주]

1. 상투어 : 앞의 ‘우근진(右謹陳)’은 관청에 청원하는 문서, 즉 소지(所志)의 서두어이다. 다음에 나오는 ‘옛일을 상고하건대’라는 뜻인 월약계고(曰若稽古)나 ‘이와 같이 내가 들었노라’라는 뜻인 여시아문(如是我聞)은 《서경》이나 불경에서 말을 꺼낼 때 사용하는 상투어이다.

2. 사령(辭令)으로 …… 본받고 : 사령은 말로써 응대(應對)하는 것을 말한다. 외교에서는 특히 사령을 잘해야 한다. 정(鄭) 나라가 형법(刑法)의 조문을 새긴 정(鼎)을 주조하자, 진(晉) 나라 숙향(叔向)이 정 나라 공자(公子) 자산(子産)에게 서신을 보내어 형벌로써 백성을 다스리려 하는 것을 힐난했으며, 자산은 이러한 숙향의 서신을 받고 그의 충고에 감사하는 답신을 보냈다. 《春秋左氏傳 昭公 6年 3月》 이는 서신을 통해 사령을 잘한 예이다.

3.《신서(新序)》와 《세설(世說)》 : 둘 다 한(漢) 나라 때 유향(劉向)이 지은 책이다. 《신서》는 춘추전국 시대의 고사를 모아 놓은 책이다. 《세설》은 실전(失傳)되어 내용을 알 수 없는데, 후세의 《세설신어(世說新語)》는 이 책에서 이름을 딴 것이다.

4. 아까 한 말은 농담이다: 공자가 무성(武城) 지방에 가서 백성들이 음악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 빙그레 웃으며 “닭을 잡는 데에 어찌 소 잡는 칼을 쓰겠는가.” 하며 넌지시 조롱하였다. 무성의 수령인 제자 자유(子游)가 ‘군자가 도(道)를 배우면 사람을 사랑하고 소인이 도를 배우면 부리기가 쉽다.’고 예전에 공자가 한 말을 들어 따지자, 공자가 제자들을 보고서 “얘들아 자유의 말이 옳다. .” 하였다. 《論語 陽貨》

5.아내와 남편의 문답 : 《시경(詩經)》 계명(鷄鳴)의 첫 구절로서, 아내가 닭이 울었으니 일하러 나가라고 하자 남편이 나가기 싫어 아직 어두운 새벽이라고 둘러대는 것을 묘사한 것이다. 주자(朱子)는 이 시를 부부가 서로 권계(勸戒)한 것이라고 주해(註解)하였으나, 연암은 부부가 일상적인 집안일로 문답을 나눈 시로 보았다.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영대정잉묵 자서(映帶亭賸墨 自序)', 연암집 제5권/영대정잉묵(映帶亭賸墨)/척독(尺牘)-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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