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탐욕과 포학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사이다
세상사람들은 산속에 파묻혀 글이나 읽는 사람을 보고 항상 나약하고 무능하다고 말한다. 또 책만 알고 물정은 모른다고 말한다. 글을 알고 나면 차마 하지 못하는 바*가 생기고, 하지 않는 바가 생긴다. 차마 하지 못하고 또 하지 않기 때문에 나약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 또한 일찍이 글 읽는 자의 뒤를 따라다닌 적이 있는데, 매번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늘 병통으로 여겼으나 왜 그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세상에서 강하고 유능하다고들 말하는 사람은 모두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 없고, 할 수 없는 일을 행할 수 있는 자들이다. 세상에서 용감하다고들 말하는 사람은 의리에 용감한 자는 드물고 노여움과 욕망에 용감할 뿐이다. 술잔을 들고 담론을 세우다가도 한마디 말을 가지고 맞서다 갑자기 버럭 화를 내며 힘을 믿고서 서로 능멸하는데, 강한 자가 하늘 위로 방방 뜨면 약한 자는 땅속으로 꺼져버리고 말며, 사람들도 그 위엄에 굴복하고 만다.
관직에 있으면서 명예가 있는 자라면 형세를 믿고서 일을 판단하며, 잘못된 판단을 고집해 위엄을 세우면서 한 시대를 속이고 백 대에 해악을 남긴다. 먹고사는 일이 걸린 경우라면 채찍질을 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고, 사령이 분주히 뛰어다니는 것을 보고서 눈앞의 쾌락이라 여긴다. 세도 있는 호족들이 권세를 독점하고 좌지우지하는 것은 전대에도 모두 싫어하던 바이다.
그러나 가난한 자의 곡식을 빼앗아 부자들의 청탁을 들어주면서 저 불량한 자들은 그 사이에서 이득을 취한다. 그리고는 밖으로 나와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일처리가 아무개 공만큼 빠른 사람이 없어!”라고 말한다. 향당의 보잘것없는 백성들은 그 상황을 알지 못하므로, 입에서 나오는 대로 “아무개 재상, 아무개 재상” 하고 칭찬을 한다. 어쩌면 그리도 어리석은가!
산속에서 글 읽은 자들은 마을에 살더라도 남에게 한 마디 탓도 하지 않고, 백성으로부터 곡식 한 알 빼앗지 않는다. 그런데도 경박한 무리들은 오히려 얕잡아보고서 업신여기고 모욕한다. 어쩌다 현(縣) 하나를 얻어 고을살이를 하게 되더라도 정사를 뜻대로 펼칠 수 없고, 그렇다고 사납게만 하는 것은 그의 뜻이 아니다보니 혁혁한 공을 세우지 못한다. 그 사람이 꼭 공직에 관한 지식을 익힌 것은 아닐 수도 있는데, 실수만 한번 했다하면 남보다 열 배 이상의 비웃음을 받는다. 어찌 가슴 아프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군자의 마음씀은 반드시 충서(忠恕)를 근본으로 삼아, 자신에 대해서는 엄중히 책망하고 남에 대해서는 가볍게 책한다. 내가 남에게 잘못한 것이 있어 남이 나를 탓하는 것이라면, 자책할 겨를도 없을진대 남을 책할 것이 무엇이랴! 내가 남에게 잘못한 것이 없는데 남이 나를 탓하는 것이라면, 그 사람이 잘못된 것일 뿐, 나와 무슨 상관있으랴! 때문에 천하에는 노여워할 만한 일이란 없는 것이다.
옷이며 음식을 공양하는 절차나 권세를 믿고 행패 부리고 청탁하는 습관 등은 모두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만한 일은 아니다. 군자라면 본디 그런 것에 마음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뜻을 펴지 못한 시정배들은 종종 없는 말을 지어내어 비방을 퍼뜨리고, 백성들 역시 그 말을 믿곤 한다.
군자는 관직에 오르면 아전이 관청 곡식을 축내는 것을 보고 “아전은 녹을 받지 못하니, 어찌 축낸 것을 가지고 책망할 수 있겠느냐?”고 말하고, 비천한 백성이 법을 어긴 것을 보고 “본래 좋은 법이 아니었으니, 어찌 법을 어긴 것을 가지고 책망할 수 있겠느냐?”고 말한다.
사건이 터질 때마다 근본을 좇아 그 부득이한 정황을 곡진히 살피고, 먼저 나를 책한 다음 대부분의 사안을 공정한 입장에서 용서해준다. 이렇다 보니 일은 연체되고 상사의 독촉은 날로 다급해진다. 이에 편협하고 천박하고 속 좁은 무리들이 그 틈을 타 군자를 무고하여 곤란한 지경에 빠뜨려도, 묵묵히 한마디 변명의 말도 하지 않으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는가!
- 환재(瓛齋) 박공(朴公, 박규수 1807~1877, 운양 김윤식 선생의 스승)이 평하여 말한다. 탐욕과 포학(暴虐, 몹씨 잔혹하고 난폭함)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사이다. 포학하지 않고서는 탐욕을 채울 길 없으니, 포학하면서 탐욕스럽지 않은 자 없고, 탐욕스러우면서 포학하지 않는 자 없다. 이른바 글 읽은 선비가 작은 현 하나라도 얻게 되면, 그 좌우에서 충성을 도모합네 하는 자들은 걸핏하면 위엄과 사나움을 내보이라 권할 뿐이다. 한 가지 명령 한마디 말이 조금이라도 지체될라치면 몰래 서로 돌아보면서 근심 어린 탄식을 그치지 못하니, 주인 된 자 역시 마음이 동요하지 않을 수 없어 이로 인해 본래의 태도를 바꾸어버린다. 이에 좌우의 사람들은 마음껏 백성들을 못살게 굴 핑계의 구실을 얻게 되고, 주인 된 자는 고과(考課)에서 낮은 등급을 받아 떠나게 된다. -
군자의 노여움은 대의에 크게 관계되는 바가 아니라면 갑작스레 발하지 않는다. 순 임금은 한번 노하여 사흉(四凶)을 제거하였고,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은 한번 노하여 천하를 안정시켰으며, 공자는 한번 노하여 소정묘(小正卯)를 주살하였고, 맹자는 한번 노하여 양주(楊朱, 위아설(爲我說) 즉 극단적으로 이기적인 자기애를 주장)와 묵적(墨翟, 겸애설(兼愛說)을 주장, 겸(兼)은 아우르다, 포용하다의 뜻을 갖고 있다. 즉 겸(兼)은 유가에서 도덕과 윤리의 출발을 자기과 타인, 남녀를 분명하게 구별함에 두는 별(別)에 대비되는 개념이다. 묵자의 겸애는 자신을 위하고 사랑하듯 남을 위하고 사랑하고 두루 포용하자는 뜻을 가지고 있다. 겸애상동설(兼愛尙同說)이라고도 한다. 이는 당시로는 파격적인 사상으로 특히 효를 인륜의 근본으로 삼는 유가에서는 이단취급되었다. 이를 폴리 아모리, 즉 남녀간의 무분별한 다자간 육체적 사랑으로 확대해석하여 오해하거나 왜곡하여 적용하는데서 윤리도덕적 문제가 발생한다. 하지만 그 요체는 인류애적 보편적 사랑 그리고 오늘 날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과 그 맥락을 같이한다.)을 제거하였다. 이것이 어찌 모두 그 자신을 위해 발한 것이겠는가.
한나라 이후에도 영웅호걸이 간혹 나왔는데, 마음씀이 실로 성인의 공정함에 미치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요인즉 모두 천하를 위한 마음에 기인해 노여움을 발하였고, 천하 사람들 역시 그들에게 승복하였다. 만일 작은 일을 보고서 또 작은 말을 듣고서 노여워 눈을 부릅뜨고 하루 사이에도 얼굴색이 몇 번씩이나 붉어지던 사람이, 막상 대단한 일과 대단한 말을 보고 듣고는 기운이 다 빠져 위엄도 세우지 못한 채 우물쭈물하다가 물러선다면, 이는 군자가 부끄러워하는 바일 것이다.
따라서 군자의 노여움이란 수양을 쌓고 때를 기다리다 움직이는 것이니, 혹은 천 년에 한번 노하고, 혹은 수삼백 년에 한번 노한다. 크게 노하면 천하가 움직이고 작게 노하면 한 나라가 진동한다. 이로움과 윤택함을 당대에 입혀주고, 명성과 기림을 무궁에 드리운다. 그러나 시대를 만나지 못해 혹 초야에서 곤궁하게 지내기도 하고, 또 한구석에 살며 무사한 시대를 만나 끝내 나약하다는 이름을 면치 못한 채 줄줄이 죽어갔으리니, 슬프도다! 노여움이란 항상 발하는 것이 아니며, 강직하고 굳세고 정직한 기운은 노하기 전에 이미 갖추어져 있는 것인데,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서 나약하다고만 여긴다.
사람들이 노여워할 만할 때 나 홀로 억누르고 발하지 않는다면, 큰 용기가 아니고서야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또 사람들은 할만하다고 하여도 나는 하지 않는 바가 있고, 사람들은 참을 만하다 하여도 나는 참지 못하는 바가 있다면, 그 용기는 반드시 남보다 뛰어난 것이리라.
존경하는 벗 서여심(徐汝心)은 내가 형으로 모시는 분이다. 일찍이 거하는 곳에 ‘수춘재(收春齋)’라 스스로 이름 붙이고 나에게 글을 써달라 요청한 지 3년이 되었으나 미처 구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경신년(1860) 여름에 나는 순천의 금오도(金鰲島)에 있었는데, 사슴을 잡아 피나 마시면서 한가로이 지내다가 우연히 옛날에 수춘재의 서문을 부탁받은 일을 떠올렸다.
봄은 으뜸이다. 사시(四時, 사계절)의 처음에 자리 잡고 살리기 좋아하는 덕을 주로 하며, 네 덕(四德)*을 겸하여 포괄하나 혼연히 그 자취를 볼 수 없다. 나는 이에 느낀 바가 있어 마음속에 품었던 생각을 꺼내어 말해보았을 뿐이다.
※[역자 주]
1.차마 하지 못하는 바 : 《맹자》 〈진심 하(盡心下)〉에 나오는 말로, “사람이 차마 하지 못하는 바가 있는데, 그 차마 하는 바에 도달하면 인(仁)이요, 사람이 하지 않는 바가 있는데, 그 하는 바에 도달하면 의이다.〔人皆有所不忍 達之於其所忍 仁也 人皆有所不爲 達之於其所爲 義也〕”라고 하였다.
2. 양주(楊朱)와 묵적(墨翟) : 맹자 당시에 양주와 묵적의 사상이 성행하였는데, 맹자는 양주의 이기(利己)와 묵적의 겸애(兼愛) 모두 성인의 도에 위배된다며 배척하였다.
3. 네 덕(四德) : 만물의 시작인 봄은 인(仁)을, 여름은 예(禮)를, 가을은 의(義)를, 겨울은 지(智)를 뜻한다. 이것을 사덕(四德)이라 부르는데, 주희(朱熹)는 ‘인포사덕(仁包四德)’을 주장했다. 따라서 인을 상징하는 봄이 사덕을 겸했다라고 표현한 것이다.
-김윤식(金允植, 1835~1922), '수춘재 서문 경신년(1860, 철종11)[收春齋序 庚申], 운양집(雲養集) 제9권/서(序)-
▲원글출처: 한국고전번역원 ⓒ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 이주해 (역) ┃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