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옛 사람의 찌꺼기
통발은 물고기를 잡기 위한 도구인지라 물고기를 잡으면 통발은 잊어버리며, 올무는 토끼를 잡기 위한 도구인지라 토끼를 잡으면 올가미는 잊어버린다. 이와 마찬가지로 말이라고 하는 것은 뜻을 알기 위한 도구인지라 뜻을 알고 나면 말을 잊어버린다. 그런데 세상의 학자들은 뜻보다 말을 중시하여 말을 천착하니 내 어디에서 말을 잊은 사람을 만나 그와 함께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인가.(장자 제 26편 외물 12장)
세상 사람들이 도(道)라 하여 귀하게 여기는 것은 서책(書冊, 책, 도서)이지만 이 서책은 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말에는 중요한 것이 있을 것이니 그 말이 중시하는 것은 말하는 사람이 전달하고자 하는 뜻(意味內容)이다.
뜻에는 따르는 것이 있으니 뜻이 따르는 것은 말로 전할 수 없는 것인데 세상에서는 말을 중시하여 서책을 전하니 세상에서 비록 그것을 중시하지만 중시하기에는 오히려 부족한 것이니 그 중시하는 것이 참으로 중시해야 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모양과 색깔뿐이고 귀로 들을 수 있는 것은 이름과 소리일 뿐이다.
슬프구나. 세상 사람들은 모양과 색깔, 이름과 소리만으로 충분히 저 도의 실정(實情)을 알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모양과 색깔, 이름과 소리로는 틀림없이 도의 실정을 알기에 부족하다. 그래서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하는 것인데 세상 사람들이 어찌 그것을 알겠는가.
환공(桓公)이 당상에서 글을 읽고 있었는데 윤편(輪扁)이 당 아래에서 수레바퀴를 깎고 있다가 몽치와 끌을 내려놓고 위로 환공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감히 묻습니다. 임금께서 읽고 계시는 것은 어떤 말입니까?” 환공이 대답했다. “성인의 말씀이다.” 윤편이 말했다. “성인이 지금 살아 있습니까?” 환공이 말했다. “이미 죽었다.” 윤편이 말했다. “그렇다면 임금께서 읽고 계시는 것은 옛사람의 찌꺼기(古人之糟魄已夫)로군요.” 환공이 말했다. “과인이 글을 읽고 있는데 수레기술자 따위가 어찌 논의하는가. 그럴싸한 이유를 댄다면 괜찮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죽임을 당할 것이다.”
윤편이 말했다. “신(臣)은 신(臣)이 하는 일로 살펴보겠습니다. 수레바퀴를 여유 있게 깎으면 헐거워서 견고하지 못하고 너무 꼭 맞게 깎으면 빡빡해서 들어가지 않으니 여유 있게 깎지도 않고 너무 꼭 맞게 깎지도 않는 것은 손에서 터득하여 마음으로 호응하는 것이어서 입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교묘한 기술이 그 사이에 있으니 신(臣)도 그것을 신의 자식에게 깨우쳐 줄 수 없고 신의 자식도 그것을 신(臣)에게 받을 수 없습니다. 이 때문에 나이가 칠십에 이르러 늙을 때까지 수레바퀴를 깎고 있습니다. 옛사람도 말로는 전할 수 없는 것을 함께 가지고 죽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임금께서 읽고 있는 것은 옛사람의 찌꺼기일 따름입니다.”(장자 제 13편 천도10장)
-장자(莊子), 第13篇 천도(天道) 第10章, 第26篇 외물(外物) 第12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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