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두실기(斗室記): 독서의 대요는 숙독과 사색에 있다
나의 사제(舍弟)인 재(材)가 상산현(常山縣) 두곡(斗谷)에 우거(寓居)하면서, 그 집의 서북쪽으로 매우 비좁은 공간이나마 맑은 정취가 우러나는 그윽한 곳을 택하여, 세 칸의 방을 만들고 띠풀로 지붕을 덮는 등 간소하게 집을 짓고는, 연거(宴居)하며 독서하는 곳으로 삼았기에, 내가 그 집의 이름을 두실(斗室)이라고 지어 주었다.
그렇게 이름을 지은 까닭은, 대개 민간에서 모난 형태의 협소한 집을 두실(斗室)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있고, 우리나라에서 발음할 때 곡(谷)을 ‘실’이라고 하기 때문에 그가 사는 곡(谷)의 지명에 착안하여 실(室)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니, 이 또한 간단한 방식을 채택하여 이름 지은 것이라고 하겠다.
세상을 떠난 나의 벗 임무숙(任茂叔 무숙은 임숙영(任叔英)의 자(字)임)이 일찍이 어떤 이를 위해 두정기(斗亭記) 수천 언(言)을 지어 준 적이 있었다. 그 내용을 보면 정자를 왕래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마치 말[斗]로 물건을 되듯 하면서, 세간의 인물들을 수십 종으로 분류하여 차례로 서술해 나간 것이었는데, 그 글이 포박자(抱朴子)의 인품론(人品論)과 비슷하면서도 그 표현이 특히나 기발하였기 때문에, 학자들이 많이들 전송(傳誦)하였다.
하지만 지금 재(材)가 우거하는 곳은 궁벽진 산골이라서 왕래하는 사람들도 거의 없을 뿐만이 아니요, 또 이곳을 단지 독서하는 공간으로만 삼고 있을 따름이니, 임자(任子)의 설을 다시 취해서 덧붙이는 것은 온당한 일이 되지 못하겠기에, 그저 나 자신이 젊어서부터 행해 온 나름대로의 독서법이나 은밀히 전해 줘 볼까 한다.
나는 성품이 무척이나 노둔한 데다 습관 또한 게으르기 짝이 없는데, 젊어서부터 또 병치레를 많이 하는 바람에 제대로 독서에 공력을 들이지 못하였다. 그리고 병이 좀 뜸해질 때면 문득 간책(簡冊)을 가까이 해 보기도 하였지만, 서너 번 읽어 보는 것에 불과하였고 심할 경우에는 눈가림용으로 한번 스쳐 지나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바야흐로 열독(閱讀)할 때에 이르러서는, 경(經)의 경우는 대략 그 의리를 탐구한 다음에 내 몸에 적용을 해 보고, 사(史, 역사)일 경우에는 그 득실(得失) 관계를 대략 따져 본 다음에 오늘날의 세상에 비추어 보곤 하였으며, 운문이나 산문의 경우에는 대략 그 의의(意義)를 본따서 나의 입으로 표현해 보려고 노력하곤 하였다. 이러한 방식으로 읽다 보면 재미도 있을 뿐 더러 시간이 오래 지난 뒤에도 간혹 기억이 나곤 하였다.
그런데 그 뒤에 나와 함께 글을 읽은 사람들을 보면, 상당히 총명하고 민첩할 뿐만 아니라 독서에 쏟는 공력도 나의 몇 배는 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잊어버린다고 늘 고민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괴이하게 여겨 그 까닭을 물어보면, 그들이 대답하기를, “나는 경(經)을 읽을 적에는 강석(講席)에서 합격될 수 있도록 힘을 쏟고, 사(史)를 읽거나 시문(詩文)을 대할 때에는 과장(科場)에서 채택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 고 한다.
아, 경을 읽는 목적은 도를 밝히기 위함이요, 사(史, 역사)는 옛날 일을 상고하기 위함이요, 시문은 나의 글을 짓기 위함이다. 그러니 이것은 모두가 성현의 덕을 쌓고 수업해 나가는 바탕이 되는 것들이지, 과시(科試)를 잘 치르기 위해서 마련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는 이들이 그런 마음을 갖고 읽어 나간다면, 참으로 옛 성현들의 본지(本旨)와는 어긋난다 할 것이니, 시간이 지나면서 흐릿해져 기억에서 사라져 버린다고 괴이하게 여길 것이 뭐가 있겠는가.
아, 나는 그동안 글을 읽을 때 과시(科試)를 염두에 두지는 않았지만, 대충 보고 넘어갈 뿐 정밀하게 연구하지 못한 병통이 있었다. 그래서 경(經)을 내 몸에 적용해 보았어도 그 뜻을 충만하게 채울 수가 없었고, 사(史)를 오늘날에 견주어 보았어도 조치해서 시행할 수가 없었으며, 시문을 보고 나의 목소리로 표현해 보려고 생각했어도 글 지을 때 윤색(潤色)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오늘날까지 우두커니 서서 범속한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 보건대, 글을 읽는 것 자체에 재미를 느낀 나머지 시간이 오래 지나도 간혹 기억해 낼 수가 있었기 때문에 거꾸로 과시(科試)에 도움이 되어 급제할 수 있었으니, 이는 장경(匠慶)*이 상 받을 것은 아예 생각지도 않는 가운데 우(虞) 제사를 제대로 지내게 하였던 일과 비슷한 경우라고 할 것이다.
지금 재(材)가 빈한한 살림에 해야 할 일은 많아 근실하게 송습(誦習)하지 못하는 것을 늘 고민하고 있는데, 행여 나의 독서법을 가지고 시험해 본다면 도움이 되는 점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가령 옛날 성현들의 독서법을 다시금 찾아 보려 한다면, 나의 방법과는 같지 않은 점이 있으니, 단계를 밟아 점차적으로 나아가고 숙독(熟讀)을 하면서 정밀하게 사색하는 것이 바로 그 대요(大要)라 할 것이다.
하지만 나 역시 그 방법대로 행해 본 적이 없으니 감히 재(材)에게 꼭 그렇게 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는데, 재가 만약 그런 의향을 갖고 있다면 나의 조악(粗惡)한 독서법은 내던져 버려도 좋을 것이다.
[역자 주]장경(匠慶) : 춘추 시대 노(魯) 나라의 소군(小君) 정사(定姒)가 죽었을 때, 당시 실력자인 계문자(季文子)가 장례에 대한 일을 소홀히 하며 우제(虞祭)도 지내지 않으려고 하였는데, 도목수인 장경(匠慶)이 계문자의 관재용(棺材用) 나무를 베어 관곽(棺槨)으로 쓰고 원만하게 우 제사를 지내게 했던 고사가 있다. 《春秋左傳 襄公 4年》
-이식(李植, 1584~1647), '두실기(斗室記)', 택당집(澤堂集)/택당선생 별집 제9권/기(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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