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남의 비위를 맞추려고 자기를 잃어 버리는 것은 부끄러운 일
나무는 이 세상에 나올 때부터 그 본성이 곧게 마련이다. 따라서 어떻게 막을 수도 없이 생기(生氣)가 충만한 가운데 직립(直立)해서 위로 올라가는 속성으로 말하면, 어떤 나무이든 간에 모두가 그렇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하늘 높이 우뚝 솟아 고고(孤高)한 자태를 과시하면서 결코 굴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으로는 오직 송백(松柏)을 첫손가락에 꼽아야만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나무들 중에서도 송백이 유독 옛날부터 회자(膾炙)되면서 인간에 비견(比肩)되어 왔던 것이다.
어느 해이던가 내가 한양(漢陽)에 있을 적에 거처하던 집 한쪽에 소나무 네다섯 그루가 서 있었다. 그런데 그 몸통의 높이가 대략 몇 자 정도밖에 되지 않는 상태에서, 모두가 작달막하게 뒤틀린 채 탐스러운 모습을 갖추고만 있을 뿐 더 이상 자라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나뭇가지들도 한결같이 거꾸로 드리워진 채, 긴 것은 땅에 끌리고 있었으며 짧은 것은 몸통을 가려 주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리저리 구부러지고 휘감겨 서린 모습이 뱀들이 뒤엉켜서 싸우고 있는 것과도 같고 수레 위의 둥근 덮개와 일산(日傘)이 활짝 펴진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는데, 마치 여러 가닥의 수실이 엉겨 붙은 듯 서로 들쭉날쭉하면서 아래로 늘어뜨려져 있었다.
내가 이것을 보고 깜짝 놀라 어떤 사람에게 말하기를, “타고난 속성이 이처럼 다를 수가 있단 말인가. 어찌해서 생긴 모양이 그만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하니,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그 나무의 본성이 그러해서가 아니다. 이 나무가 처음 나왔을 때에는 다른 산에 심겨진 것과 비교해 보아도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런데 조금 자라났을 적에 사람이 조작(造作)할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한 것들은 골라서 베어 버리고, 여려서 유연(柔軟)한 가지들만을 끌어 와 결박해서 휘어지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높은 것은 끌어당겨 낮아지게 하고 위로 치솟는 것은 끈으로 묶어 아래를 향하게 하면서, 그 올곧은 속성을 동요시켜 상하로 뻗으려는 기운을 좌우로 방향을 바꾸게 하였다.
그리고는 오랜 세월 동안 그러한 상태를 지속하게 하면서 바람과 서리의 고초(苦楚)를 실컷 맛보게 한 뒤에야, 그 줄기와 가지들이 완전히 변화해 굳어져서 저토록 괴이(瓌異)한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이다. 하지만 가지 끝에서 새로 싹이 터서 돋아나는 것들은 그래도 위로 향하려는 마음을 잊지 않고서 무성하게 곧추서곤 하는데, 그럴 때면 또 돋아나는 대로 아까 말했던 것처럼 베고 자르면서 부드럽게 휘어지게 만들곤 한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이 보기에 참으로 아름답고 참으로 기이한 소나무가 된 것일 뿐이니, 이것이 어찌 그 나무의 본성이라고야 하겠는가.” 하였다.
내가 이 말을 듣고는 크게 탄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 어쩌면 그 물건이 우리 사람의 경우와 그렇게도 흡사한 점이 있단 말인가. 세상에서 일찍부터 길을 잃고 헤매는 자들을 보면, 그 용모를 예쁘게 단장하고 그 몸뚱이를 약삭빠르게 놀리면서, 세상에 보기 드문 괴팍한 행동을 하여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아첨하는 말을 늘어놓아 세상 사람들이 칭찬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하여 남의 비위를 맞추려고 애쓰면서 이를 고상하게 여기기만 할 뿐,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 부끄러운 일인 줄은 잊고 있으니, 평이(平易)하고 정직(正直)한 그 본성에 비추어 보면 과연 어떠하다 할 것이며, 지극히 크고 지극히 강한 호기(浩氣)에 비추어 보면 또 어떠하다 할 것인가?
비계덩어리나 무두질한 가죽처럼 아첨을 하여 요행히 이득이나 얻으려고 하면서, 그저 구차하게 외물(外物)을 따르며 남을 위하려고 하는 자들을 저 왜송(矮松,키가 정상적으로 자라지 않아 낮고 작은 소나무)과 비교해 본다면 또 무슨 차이가 있다고 하겠는가?
아, 사람이나 다른 생물이나 각각 항상 지니고 있는 본성이 있는 만큼, 곧게 잘 기르면서 해침을 당하는 일이 없게끔 한 연후에야 사람이 되고 생물이 된 그 이름을 더럽히는 일이 없게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만 본성이 손상을 입고 녹아 없어진 나머지, 이처럼 정상적인 것과는 정반대로 참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으니, 이 어찌 ‘곧게 길러지지 않은 채 살아 있는 것은 요행히 죽음을 면한 것일 뿐이다(罔之生也 幸而免 망지생야 행이면)’라는 말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 그러고 보면 저 나무의 입장에서 볼 때에도 역시 슬픈 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옮긴이 주: 《논어》 옹야(雍也)편에서 공자는 말하기를, '人之生也直(인지생야직) 罔之生也(망지생야)幸而免(행이면)'이라고 했다. 즉 "사람은 정직하고 올바르게 살아야 하는데, 정직하지 못하면서도 살 수 있는 것은 요행히 화(벌, 죽음)를 면하고 있는 것 뿐이다."라는 뜻이다)
내가 일찍이 산속에서 자라나는 송백(松柏)을 본 일이 있었는데, 그 나무들은 하늘을 뚫고 곧장 위로 치솟으면서 뇌우(雷雨)에도 끄떡없이 우뚝 서 있었다. 이쯤 되고 보면 사람들이 그 나무를 쳐다볼 때에도 자연히 우러러보고 엄숙하게 공경심이 우러나는 느낌만을 지니게 될 뿐, 손으로 어루만지거나 노리갯감으로 삼아야겠다는 마음은 별로 들지 않을 것이니, 이를 통해서도 사람들의 호오(好惡, 좋아함과 싫어함)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을 엿볼 수 있다 하겠다.
그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사랑(愛)이라고 하는 것은 장차 그 대상을 천하게 여기면서 모멸을 가할 수 있는 가능성이 그 속에 있는 반면에, 공경(敬)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 내에 덕을 존경한다는 뜻이 들어 있는 개념이라 하겠다(愛者賤侮之端。敬者尊德之名, 흔히 착각하기 쉬운 사랑과 애착을 구별하는 가장 쉬운 기준이 바로 상대를 독립적인 인격을 가진 소중한 존재로써 인정하고 존중하는 공경심의 유무에 있다.택당선생은 이 점을 통찰하고 있다). 대저 그 본성을 해친 나머지 남에게 모멸을 받게 되는 것이야말로 남에게 잘 보이려고 한 행동의 결과라고 해야 할 것이요, 자기의 본성대로 따른 결과 존경을 받게 되는 것은 바로 위기지학(爲己之學)의 효과라고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군자라면 이런 사례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돌이켜보기만 하면 될 것이니, 저 왜송을 탓할 것이 또 뭐가 있다고 하겠는가.?”
청사(靑蛇 을사년) 납월(臘月) 대한(大寒)에 쓰다.
**[역자 주] 지극히 강한 호기(浩氣) : 《맹자(孟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호연지기는 지극히 크고 지극히 강한 것이니, 이를 곧게 잘 기르면서 해침을 당하는 일이 없게끔 하면, 그 기운이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차게 될 것이다.[其爲氣也 至大至剛 以直養而無害 則塞于天地之間]”라는 말이 나온다.
**[옮긴이 주] 위기지학(爲己之學): 이 개념은 『논어』「헌문(憲問)」에 "옛날의 학자는 자기를 위해 공부했으나, 오늘날의 학자는 남을 염두에 두고 학문한다"라고 한 데서 비롯된 말이다. 이것은 자신의 이익만을 내세우는 이기주의와는 엄격히 구별되며, 따라서 자기 개인의 사리사욕을 충족시킨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대인관계에서 자기의 언행이 마땅한가의 여부를 스스로 반성하여 그 실현 가능 근거를 자기자신 속에서 발현하고, 따라서 자기수양을 위주로 한다는 뜻에서의 위기지학이다. 그것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학문, 즉 위인지학(爲人之學)을 거부하고 철저하게 학문과 윤리실천의 주체를 자아(自我)에 둔다. 위기지학의 목적은 구체적으로 성인(聖人)이 되는 데 있다. 이 공자(孔子)의 정신은 그대로 맹자(孟子)에게 계승되어 도덕인(道德人)의 독립적 의지(意志)로 나타나며, 이 같은 위기(爲己)의 학문은 윤리 실천의 주체를 자아에 두고 그 근거 위에서 참다운 이타(利他), 즉 급인(及人)·애인(愛人)으로 연결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이타주의에 보다 가깝다. 공자의 이상은 인(仁)의 실현인데, 그것은 곧 인도주의적 인간애의 정신과 지성구세정신(至誠救世情神)을 배움으로써 시작된다. 따라서 위기지학은 옛 성현이 말하고 행한 것에서 어긋남이 없도록 그것을 본받아 자기 언행의 바름과 바르지 못함을 판별하여 수정하는 것이다. 우리 나라 조선시대의 도학(道學)은 이 위기지학으로서의 유교를 철저하게 관철하고자 한 것이었으며, 그 방법으로 제시된 것이 바로 성(誠)과 경(敬)이다.(개념풀이: 유교넷)
-이식(李植, 1584~1647), '작은 소나무 이야기(矮松說왜송설)', 택당집(澤堂集)/택당선생 별집 제12권/ 설(說)-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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