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칼럼] 지지위지지(知之爲知之) 부지위부지(不知爲不知) /이국환
누구나 이번 생은 처음이고, 인생은 내 발길이 닿은 적 없는 오지(奧地)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알아야 하며, 이러한 앎이 곧 지(知)이고, 심리학에서는 이를 인지(認知)라 한다. 호모사피엔스의 생존은 다양한 지식의 축적 덕분이었다. 우리 선조들은 혹독한 환경 속에서 생존하고자 양식을 저장하듯 당장 쓸모없는 지식이라도 일단 저장해 두었다. 본래 쓸모란 시기의 개념이며, 언제 쓸모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오늘날 우리가 스마트폰을 보며 이런저런 잡다한 정보를 탐색하는 것도 인간이 진화 단계에서 체득한 생존 본능 때문이다.
스마트폰 덕분에 알고 싶은 것과 아는 것 사이의 간극이 사라진 시대, 지적 허기가 즉석식품처럼 쉽게 충족되는 시대, 그런데도 박학한 자들이 텔레비전에 출연해 알아두어도 쓸데없는 지식의 향연을 펼치면 사람들은 즐거워한다. 이는 일종의 ‘유사 독서 행위’이다. 다양한 분야의 책을 한꺼번에 읽은 것 같은 만족감은, 요즘 대중이 열광하는 인문학 강의를 듣는 것과 유사하다. 문자로 지식과 사유를 구축하는 글쓰기도 힘들지만, 이런 글을 다시 자기 생각으로 풀어 수용하는 책 읽기도 힘든 건 마찬가지다. 독서의 번거로움과 힘겨움 대신 지식을 쉽게 얻고 싶은 욕구를 지닌 사람들이 강연장으로 몰려들고, 지식과 교양을 담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본다.
그렇다면 도대체 앎이란 무엇인가. 공자는 논어 위정편에서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知之爲知之),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不知爲不知), 이것이 아는 것(是知也)이라 말한다. 공자의 제자 자로는 평소 스스로 체득한 지식이 아니라 남에게 들은 말을 자기 지식인 양 여기며 말하는 습성이 있었다. 자로는 순자(荀子)가 말한, 귀로 들어와 마음에 붙어 온몸으로 퍼져 행동으로 나타나는 군자의 앎이 아니라, 귀로 들어와 입으로 나오는 소인의 앎에 치중한 셈이다. 그래서 공자는 내 것이 되지 못한 남의 앎을 수다스레 옮기는 것은 진정으로 아는 것이 아님을 제자에게 일러두고 싶었던 것이다.
공자의 통찰은 놀랍다. 공자가 제자에게 강조한 것은 오늘날 교육심리학 용어인 초인지 (Metacognition)와 관련이 깊다. 인지가 ‘아는 것’이라면, 초인지는 ‘아는 것을 아는 것’, 즉 자신이 무엇을 알고 있고, 무엇은 모르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했을 때, 이 또한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인정하라는 무지(無知)의 지(知)를 뜻하기에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아는 것을 안다고 말하기는 쉽다. 정작 어려운 것은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자신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다는 깨달음과, 이를 인정하는 정직한 용기가 필요하다. 공자는 아는 것과 아는 척하는 것의 차이를 지적하며, 앎의 기본이 정직함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과한 자신감에 빠진 사람을 자주 본다. ‘빛나는 실수’의 저자 폴 J.H 슈메이커는 ‘우리가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는 상태’를 과한 자신감이라 했다. 이들은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기에 배움을 멈추며, 남의 조언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나이가 들수록 ‘부지위부지’를 실천해야 하는 이유다.
과거에는 책을 많이 읽고 아는 것이 많아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 혹은 ‘척척박사’라고 불리던 사람들이 인재로 인정받았다. 예전에 많이 안다는 것은 책을 많이 읽었다는 의미였다면, 지금은 손 안의 컴퓨터라 불리는 스마트폰을 우리가 쥐게 되면서 누구나 척척박사가 될 수 있다.
특히 인공지능은 지식의 양에서 인간을 압도한다. 그래서 뇌과학 연구자들은 지식을 빠르게 습득하고 이를 활용하는 분야는 인공지능이 머지않아 인간을 대체할 것이라 예상한다.
어디서 한 번 들었거나 본 것을 마치 자신이 알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이리저리 말로 옮기며 박학을 과시하는 이들이 있다. 다산 정약용은 책을 읽고 공부하는 데 있어, 박학(博學)에 머물지 말아야 함을 당부했다. 그는 자세히 묻고(審問), 신중히 생각하며(愼思), 명백히 말하고(明辯), 성실히 실행하는(篤行) 것을 강조했는데, 이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구분하는 힘, 아는 것을 실천하는 힘을 강조한 것이다.
널리 읽고, 스스로 의문을 품어 깊이 생각하는 자, 그리하여 자신의 견해를 명백히 밝히고, 이를 실천에 옮기는 자, 그러한 사람이 진정으로 아는 자이다. 앎이란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깨달음과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정직함이다. 자신이 무엇을 알고 있고, 무엇은 모르고 있는지를 알고 있다면, 인간은 인공지능보다 나은 존재다. 인공지능은 자신이 무엇을 아는지는 알지만,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는 알지 못한다.
-이국환(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글출처: 국제신문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key=20180118.22031007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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