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를 알아 보는 안목 (筆洗說 필세설)

오래된 그릇을 팔려고 하나 3년 동안이나 팔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 그릇의 재질은 투박스러운 돌이었다. 술잔이라고 보기에는 겉이 틀어지고 안으로 말려들었으며, 기름때가 끼어 광택을 가리고 있었다. 온 장안을 다 돌아다녀도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다시 부귀한 집안을 다 찾아갔지만 값이 더욱 떨어져 수백에 이르고 말았다.


하루는 누군가가 이것을 가지고서 서군 여오(徐君汝五)에게 보였다. 그러자 여오가 말하기를, “이것은 필세(筆洗 붓 씻는 그릇)이다. 이 돌은 복주(福州) 수산(壽山)의 오화석갱(五花石坑)에서 나는 것인데, 옥에 버금가는 것으로 옥돌과도 같다.” 하며, 값의 고하를 따지지 아니하고 즉석에서 8000냥을 내주었다. 그러고는 때를 긁어내니, 예전에 투박스럽게 보였던 것은 바로 물결 모양의 무늬가 있고 쑥잎처럼 새파란 돌이었다. 비틀어지고 끝이 말려든 모양은 마치 말라서 그 잎이 또르르 말린 가을의 연꽃과 같았다. 그래서 마침내 장안의 이름난 그릇이 되었다.


여오는 말하기를, “천하의 물건치고 하나의 그릇 아닌 것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꼭 맞는 곳에 사용할 따름이다. 붓은 먹을 머금은 채 딴딴히 굳어지면 모지라지기 쉽기 때문에, 항상 그 먹을 씻어서 부드럽게 해 둔다. 그러므로 이 그릇이 필세가 된 것이다.” 하였다.


무릇 서화나 골동품에는 수장가가 있고 감상가가 있다. 감상하는 안목이 없으면서 한갓 수장만 하는 자는 돈은 많아도 단지 제 귀만을 믿는 자요, 감상은 잘하면서도 수장을 못 하는 자는 가난해도 제 눈만은 배신하지 않는 자이다. 우리나라에는 더러 수장가가 있기는 하지만, 서적은 건양(建陽)의 방각(坊刻)이고 서화는 금창(金閶 소주(蘇州))의 안본(贋本 위조품)뿐이다. 율피색(栗皮色) 화로를 곰팡이가 피었다고 여겨 긁어내려 하고, 장경지(藏經紙)를 더럽혀졌다고 여겨 씻어서 깨끗이 만들려고 한다. 조잡한 물건을 만나면 높은 값을 쳐주고, 진귀한 물건은 버리고 간직할 줄 모르니, 그 또한 슬픈 일일 따름이다.


신라의 선비들은 당 나라에 가서 국학(國學)에 들어갔으며, 고려의 선비들은 원(元) 나라에 유학하여 제과(制科)에 급제했으므로 안목이 트이고 흉금을 넓힐 수 있었으니, 그들은 감상학(鑑賞學)에 있어서도 아마 그 시대에 출중했을 터이다. 우리 왕조 이래로 3, 4백 년 동안에 풍속이 갈수록 촌스러워졌으니, 비록 해마다 북경을 내왕하였으나 부패한 약재나 저질의 비단 따위나 사올 뿐이었다. 우하(虞夏) · 은(殷) · 주(周)의 옛날 그릇이나 종요(鍾繇) · 왕희지(王羲之) · 고개지(顧愷之) · 오도자(吳道子)의 친필이 어찌 한 번이라도 압록강을 건너온 적이 있었으랴.


근세의 감상가로는 상고당(尙古堂) 김씨(金氏, 김광수(金光遂 : 1696~?)조선후기의 화가, 수집가)를 일컫는다. 그러나 재사(才思 재기, 깊이 있는 사유와 식견을 겸비한 재능)가 없으니 완미(完美. 흠잡을데없이 훌륭함)하다고는 못 할 것이다. 대개 김씨는 감상학을 개창한 공이 있으나, 여오(汝五)는 꿰뚫어보는 식견이 있어 눈에 닿는 모든 사물의 진위를 판별해 내는 데다가, 재사까지 겸비하여 감상을 잘하는 자라 하겠다.


여오는 성품이 총명하고 슬기로웠다. 문장을 잘 짓고 해서(楷書)로 소자(小字)를 잘 쓰며, 아울러 소미(小米)의 발묵법(潑墨法)에도 능숙하고 음률에도 조예가 깊었다. 봄가을로 틈나는 날에는 정원을 깨끗이 청소한 다음 그곳에서 향을 피우고 차를 음미하였다. 일찍이 집이 가난하여 수장(收藏, 수집하여 보존함)하지 못하는 것을 못내 한탄했고, 또 시속의 무리들이 그로 인해 이러쿵저러쿵 말들을 할까 걱정하곤 하였다. 


그 때문에 답답해하면서 내게 말하기를, “나더러 좋아하는 물건에 팔려 큰 뜻을 상실했다〔玩物喪志〕고 나무라는 자는 어찌 진정 나를 아는 자이겠는가? 무릇 감상이란 것은 바로 《시경(詩經)》의 가르침과 같네. 곡부(曲阜)의 신발을 보고서 어찌 감동하여 분발하지 않을 자가 있겠으며, 점대(漸臺)의 위두(威斗)를 보고서 어찌 반성하여 경계하지 않을 자가 있겠는가?” 하기에, 나는 그를 위로하기를,


“감상이란 구품중정(九品中正)의 학문일세. 옛날 허소(許劭)는 인품이 좋고 나쁜 것을 탁한 경수(涇水)와 맑은 위수(渭水)처럼 분명히 판별했으나 당세에 허소를 알아주는 자가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네.”하였다. 지금 여오는 감상에 뛰어나서, 뭇사람들이 버려둔 가운데서 이 그릇을 능히 알아보았다. 아아, 그러나 여오를 알아주는 자는 그 누구이랴? 


필세를 빌려서 자신의 문장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음을 스스로 슬퍼한 것이다.(옮긴이 註: 원문은 借筆洗而自悼無人知自家文者이다. 즉, 나름 정리하자면,  '붓을 씻는 그릇의 사례를 빌려서 여오와 같이 안목(감상)에 학문적인 일가견을 스스로 이룬 사람을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음을 슬퍼한다'는 의미로 보면 되겠다. 개인적으로 옮긴 글에서 글향이 남다르게 다가오는 것은 외면적인 것에 연연하지 않고 그속을 헤아리는 연암선생의 남다른 인간적인 헤아림때문이다.)


-박지원(朴趾源,1737~1805), '필세설(筆洗說)', 연암집(燕巖集) 제3권 /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역자註>

1. 서군 여오(徐君汝五) : 서상수(徐常修 : 1735~1793)로, 여오는 그의 자의 하나이다. 호는 관재(觀齋) · 관헌(觀軒) 등이다. 서얼 출신으로, 진사시에 급제하였으나 관직은 광흥창 봉사(廣興倉奉事)에 그쳤다. 경제적으로는 윤택하여 백탑(白塔) 서쪽의 관재(觀齋)와 도봉산 서쪽의 별장인 동장(東庄)을 소유하였으며, 이덕무에게도 경제적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2. 상고당(尙古堂) 김씨(金氏) : 김광수(金光遂 : 1696~?)로, 상고당은 그의 호이다. 조선후기의 화가.

3. 시경(詩經)》의 가르침 : 《시경》을 배우면 권선징악(勸善懲惡)의 효과가 있음을 말한다. 주자(朱子)는 《시집전(詩集傳)》의 서문에서, 《시경》의 시는 감정을 말로 표현한 것인데 감정에는 사(邪)도 있고 정(正)도 있어 시에도 좋은 시가 있고 나쁜 시가 있으나, 좋은 시를 읽고서 선을 행하고 나쁜 시를 읽고서 악을 경계하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하였다.

4.구품중정(九品中正)의 학문 : 구품중정은 위진 남북조(魏晉南北朝) 시대의 관리 선발제도로서, 각 고을에 중정관(中正官)을 두어 그 고을 인사들을 재능에 따라 9품으로 나누어 평가해서 조정에 천거하게 하였다. 여기서는 인재를 엄격히 품평하듯이 골동품과 서화를 품평하는 것도 전문 분야라는 뜻으로 썼다.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옮긴이 註>

1. 8000냥: 원문은 立與八千刮其垢, '선 자리에서 8천을 쳐주었다'  화폐단위가 안나온다. 1678년에 제정된 '행전절목'이라는 문헌에 따르면 당시 화폐단위는 상평통보 1개가 1문,1냥(兩)은 400문(文), 400문은 쌀(米) 10말(斗), 즉 1냥의 가치는 쌀 1석(1섬, 144kg)과 같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초가 7칸 집 시세가 50냥, 초간삼간이 15냥이었다고 한다. 이로 추정하면 8천냥은 그당시로서는 상상 이상의 엄청난 가격이다. 따라서 8천냥이 아니라 8천문 즉 80냥으로 이해하면 앞서 말한 수백이라는 가격도 이치에 부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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