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두 갈래 길

내 소싯 적에 사서(史書)를 읽으면서, 옛 분들이 고난의 시기를 당하여서도 훌쩍 떠나지 못하고 두리번거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음을 보아왔는데, 아부 잘하고 속세에 푹 빠진 자야 말하잘 것도 없지마는 명현(사리가 밝고 어진 사람, 明賢 또는 名賢)이라는 이도 준사(俊士, 재주와 슬기가 매우 뛰어난 사람)철인(哲人,품성이 어질고 사리에 밝은 사람)도 가끔은 그 오욕을 면하지 못한 이가 있었으며, 더러는 불결한 세상이 싫어서 매미처럼 청고하게 속세 밖을 떠돌면서 자기 자신을 세상 밖에다 내놔 버린 이도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취한 길은 비록 각기 다르지만 그들 세상살이가 불행했던 점은 같은 것으로 그 마음과 자취를 더듬어 볼 때 사실 슬픈 점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 저으기 그 두 길을 놓고 혼자서 말을 붙이기를, 군자(君子)라면 은미한 것도 알고 드러난 것도 알고, 진실된 행위를 하고, 사리를 따르면서 무엇이든지 할 터이면 의리에 맞도록 해야 하고, 맞지 않으면 그만두어야지, 갔는데 잘못 갔으면 그것은 사리에 달한 사람이 할 일은 아닌 것이다. 


함부로 나섰던 심원(深源)이 되는 것보다는 자취를 감추었던 손등(孫登)이 되는 것만 못하고, 세속을 바로잡으려던 문거(文擧)가 되는 것보다는 바다에 숨은 유안(幼安)이 되는 것만 못한 것이다. 온포(縕袍)가 패옥(佩玉)보다 화려할 수 있고, 물마시는 것이 전골보다 감미로울 수 있는 것인데, 내 몸 밖의 것을 뭐 그리 부러워하랴.


나와 설촌(雪村 정엽의 호)이 벼슬하기 시작하여 함께 조정에 오른 지 거의 20년이 되었고, 출처(出處) 행장(行藏)도 대략 서로 비슷한데, 그나 내나 시대와 맞지 않아 백 번 생각해도 한 가지 소득도 없이 지금 와서는 머리털만 희끗희끗한 것이다. 


우리들 마음가짐과 몸가짐이 비록 이른바 명현ㆍ준사ㆍ철인에 견주기는 부끄러우나 아부 잘하고 속세에 푹 빠진 자와 어깨를 겨루기는 또 부끄러운 것이다. 그렇다면 잡다한 관무에 매달려 늙어가면서 더더욱 거기에만 빠져들고 만다는 것은 어찌 그나 내나 견뎌낼 일이겠는가?


어떻게 하면 그와 함께 자그마한 산 하나를 정하여 집을 마주 짓고 함께 밭 갈며 세상과는 인연을 끊고 학문 서적에 전념하여 우리 서로 자연의 본분을 즐기고, 그리하여 혹 옛날 매미처럼 청고하게 속세의 허물을 벗어버리고 바깥세상을 떠돌면서 자기를 세상 밖에다 내놔 버렸던 그러한 무리가 될 수 있을까?


설촌공이 승정원(承政院)에 있다가 명을 받고 경사에 조회 가는 것은, 물론 시대가 그를 필요로 하여 봉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공은 학문이 도저하고 행실이 엄전하며 명과 실이 대단하므로 당세를 위하여 일하도록 격려하는 것이 옳을 일이지만 그런데도 내가 이렇게 말한 것은, 앞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함께 좋아하면서 우리가 가야 할 평탄한 길을 잊지 말았으면 하는 뜻에서이니 내가 그에게 준 말이 그에게는 맞지 않은 말이라고 나무라지만 말지어다.


**역자 註


1.심원(深源) : 진(晉)의 은호(殷浩)의 자(字). 은호는 약관 시절부터 명망이 대단했고, 풍류와 이론을 좋아하여 그 부류의 우두머리 격이었었다. 세상을 내리보고 주현(州縣)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다가 뒤에 간문제(簡文帝)의 간곡한 부름을 받고 나가 양주(揚州)ㆍ예주(豫州) 등 5개 주의 도독(都督)을 역임하고 중원(中原)을 바로 세울 것을 자기 임무로 여겼다. 뒤에 반기를 든 요양(姚襄)을 정벌하다가 패하여, 그것을 계기로 환온(桓溫)의 중상모략을 받고 폐기 당하여 서인(庶人)이 되었다.《晉書 77》 

2.손등(孫登) : 삼국(三國) 시대 위(魏)의 사람. 독신으로 북산(北山)의 토굴 속에서 살며 일생 《주역(周易)》을 즐겨 읽고 일현금(一絃琴)을 타면서 세상에 바라는 것이 없었다.《晉書 九十四 隱逸傳》

3.문거(文擧) : 후한(後漢) 시대 공융(孔融)의 자(字). 공융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특이하였고, 헌제(獻帝) 때 북해상(北海相)이 되어서는 학교를 세우고 유술(儒術)을 장려하였으며, 곧 태중대부(太中大夫)에 임명되어 기울어져가는 한실(漢室)을 바로 세워보려고 뜻을 가졌었으나 아무런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결국 조조(曹操)에게 미움을 사 전가족과 함께 주륙을 당하였다.《後漢書 卷70 鄭孔荀列傳》

4.유안(幼安) : 삼국(三國) 시절 관영(管寧)의 자(字). 한(漢) 나라 말기에 황건적(黃巾賊)이 난리를 꾸미자 요동(遼東)으로 피해갔는데, 한 달 사이에 읍(邑)을 이룰 정도로 그를 따르는 자가 많았다. 조정의 누차에 걸친 부름을 다 물리치고 오직 학문과 교육에 열중하였음.《三國志 卷11 魏書》


 -신흠(申欽, 1566∼1628), '경사에 조회 가는 첨추 정엽을 전송하는 서[送鄭僉樞曄朝京師序]', 상촌집(象村集)/상촌선생집 제22권 / 서(序) 25수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양홍렬 (역) ┃ 1994


**옮긴이 註: 경사(京師)는 왕이 거처하는 수도를 말한다. "조선시대 궁중 조회는 1월과 12월에 열리는 정지조회(正至朝會), 5일마다 열리는 아일조회(衙日朝會) 또는 조참(朝參), 매일 열리는 상참(常參) 등으로 구분되며, 매일하는 조회도 아침 일찍 열리는 조회를 조조(早朝), 정오에 열리는 조회를 오조(午朝), 오후 늦게 열리는 조회를 만조(晩朝)라 하였다." (문화재청자료). 글의 내용으로 보아 1월 혹은 12월에 국사를 논하는 정지조회로 추측된다. 첨추(僉樞)는 중추원의 정삼품당상관인 첨지중추부사의 직책이다. 이 당시 중추부는 임직(任職)이 정해지지 않은 문무당상관 이상의 관료들이 소속된 명목상의 부서다. 정삼품당상관은 정책을 입안하는 위치에 있는 조선시대의 중앙고위관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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