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무덤을 파헤치는 것보다 더 매서운 것
선비란 뜻을 고상하게 가지며, 배움을 돈독하게 하며, 예절을 밝히며, 의리를 지니며, 청렴을 긍지하며, 부끄러워할 줄 아는 것인데 또한 세상에 흔하지 않다.
선비로서 선비의 행실을 가진 자를 유(儒)라고 하는데 공자(孔子)께서 이른바 ‘유행(儒行)’이 바로 이것이다. 옛날의 유자(儒者)들은 둥근 관을 써서 하늘을 본받고 모가 난 신을 신어 땅을 본받고 구슬을 차 과단을 본받고 일마다 반드시 상(象, 정해진 법칙, 규례)을 따르는데 상(象)은 도(道, 도덕, 도리,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다.
수사(洙泗)의 저작*과 염락(濂洛)의 저술*은 물론 논할 것이 없지만 그 밖에 직하 선생(稷下先生 전국 시대 제 나라 사람)처럼 호방한 변론과 이야기로 사물에 적응하여 규각을 드러내지 않고 방자 방종하면서 남을 비웃는 자들은 시(詩)ㆍ서(書)ㆍ예(禮)ㆍ악(樂)을 따르지 않고 괴변을 부리며 즐겁게 지내면서도 오히려 물욕의 누를 입지 않고 풍속에 물들지 않고 남에게 부림을 받지 않는데, 이는 선비 중에 거친 자이지만 이와 같고 보면 선비의 기풍을 알 만하다.
세상에서 선비라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과연 어떠한가? 숭상하는 것은 권세이며 힘쓰는 것은 이익과 명예이며 밝은 바는 그때의 유행이고 가지고 있는 바는 이야기이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바는 겉치레이고 잘하는 바는 경쟁이니, 이러한 여섯 가지를 갖고서 날마다 중인(重人 권리 있는 사람, 중인(重人)은 한비자(韓非子)에 보인다)의 문 앞에서 저울질하면서 그의 취향이 무엇인지 엿보고 그 뜻이 어디에 있는가 찾다가 눈여겨 보아 주면 흐뭇하여 우쭐대고, 따뜻한 입김을 입으면 소근소근 서로 축하한다. 이와 같은 사람을 선비라고 한다면 이 땅 위에 가로의 눈과 세로의 귀가 달린 자라면 모두가 선비일 것이고 이와 같은 사람을 선비라고 하지 않는다면 나라 안에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쇠 방망이로 턱을 쳐서 천천히 그 볼을 구별하는 도굴꾼은 피해가 마른 뼈에만 그치어 한 몸에만 누가 되지만, 갓끈을 드리우고 옷을 차려 입고서 손뼉을 치고 시속을 쫓아가는 자는 윤리(倫理)에 해가 미치고 온 세상에 화가 뻗치게 될 것이니, 권세를 좋아하는 추태는 무덤을 파는 것보다도 더 매서운 것이다. (이하생략)
-신흠(申欽, 1566∼1628), '사습편(士習篇)'부분, 상촌집(象村集)/상촌선생집 제40권 내집 제2/ 잡저(雜著)-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1990
※[옮긴이 주]
1. 수사(洙泗)의 저작(洙泗之作): 수사(洙泗)는 노(魯)나라의 수수(洙水)와 사수(泗水)를 말한다.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공자(孔子)가 수·사(洙泗)의 사이에서 설교(設敎)하여 시서·예악을 닦자, 사방에서 제자가 더욱 많이 왔다.”고 하였다. 즉 수사의 저작은 공자의 사상과 학문을 말한다. 수사(洙泗)는 공자의 학문과 사상을 따르는 유가(儒家)를 따로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2. 염락(濂洛)의 저술(濂洛之述): 염락(濂洛)은 북송(北宋) 이학(理學, 성리학)의 양대 학파로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와 낙양(洛陽)의 정호(程顥), 정이(程頤)를 말한다. 염락의 저술은 이들의 학문적 성취를 기록하여 집대성한 성리학의 주요 저술들을 뜻한다. 즉 성리학(도학, 이학, 정주학)을 일컫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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