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국민성을 잃으면 나라는 없는 것과 다름없다
한국의 유민(遺民) 김택영(金澤榮)은 그 나라의 선달(先達, 벼슬이나 학문이 자기보다 앞선 선배)의 글 중에서 우아하고 바른 것을 모아 ‘여한구가문(麗韓九家文)’이라 이름 짓고, 그의 벗 왕성순(王性淳)에게 주었더니, 왕씨는 다시 김씨가 지은 글을 보태어 십가(十家)로 만들고, 십가의 글 한 편씩을 베껴 장계직(張季直, 장건) 선생을 통해 나에게 서문을 청하였다.
나는 늘 전집을 읽지 않으면 시문을 평할 수 없다고 생각해 왔다. 겨우 이 열 편의 글로는 십가의 조예(造詣)를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나라 문운(文運)의 성쇠(盛衰) 자취를 볼 수 없음이 더욱 분명하다. 그러나 나는 이것만 읽고서도 그 나라에 진실로 훌륭한 사람이 있음을 감탄하였고 이 열 편을 통하여 그 나라 사대부의 쌓고 숭상하고 펼친 바를 대략 알 수 있었다.
나라의 존망은 종묘사직의 흥폐를 말하는 것도 아니요, 정삭(正朔, 해의 시작과 달의 시작을 기록한 달력[曆], 나라를 세우면 제왕이 이를 선포한다)이나 복색(服色,신분, 관직 등에 따른 옷의 색깔과 꾸밈새에 대한 규정을 말함)을 바꾸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이른바 국민성이란 것이 있어, 국민성을 잃으면 비록 종묘사직, 정삭, 복색이 엄연히 있다 하더라도, 군자는 ‘본래 나라가 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 비록 종묘사직, 정삭, 복색이 없다 한들 어찌 나라라 하기 어렵겠는가.
국민성이란 무엇인가? 한 나라의 사람이 천 수백 년 이래로 조종을 이어 내려와 그 뛰어남을 자각하고, 별도로 한 체계를 이루어 단체를 조직하여, 다른 국민과는 다름을 나타내는 것이 그것이다. 이 국민성은 무엇으로써 이어지며, 무엇으로써 펼쳐지며, 무엇으로써 나타나는가를 보면, 문학이 그 신화(薪火,땔나무 불이란 뜻으로, 불가에서 사제(師弟)의 도를 서로 전하는 것을 비유)를 전하고 그 원동력을 맡는다 하겠다. 이 뜻을 알아야 옛사람의 이른바 ‘문장은 나라를 다스리는 큰일이며, 썩지 않는 장한 일이다.’라는 말이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금년에 유럽에 일어난 대전(大戰)에 화근이 된 나라가 세르비아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바다. 이 나라가 망한 지는 7백 년이나 되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1백 년 전에 옛것을 광복하기 시작하여 차차 종속국으로 끼어들더니, 이젠 팔을 걷어붙이고 세계의 일대 명국(名國)과 싸우고 있다. 그 승패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저 나라는 세상의 의지할 데 없는 백성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마침내는 이렇게까지 되었다.
내가 그 역사를 살펴보니, 그 백성이 몹시도 문학을 숭상하여, 문학을 통해 선열(先烈)을 기억하고 사모하고 노래하면서 그 뜻을 계승하여, 근원을 회복할 때까지 그치지 않았다. 어찌 세르비아뿐이겠는가? 희랍(希臘)이며 이탈리아며 독일이 모두 이와 같다.
오늘날 한국 사람으로 태어난 자는 우주간의 한 기령(奇零,일정한 정수(整數)에 차지 않는 수를 뜻하는 말로, 여기서는 강국이 아닌 약한 존재를 가리킴)의 사람으로서 다시는 나라와 세상에 이바지할 수 없어 보이지만, 나의 지론(持論)은, ‘우주간에 어찌 기령의 사람이 있겠는가? 사람이 스스로를 기령할 따름이다.’고 말할 수 있다. 스스로를 기령하기를 달갑게 여기는 것은 당세(當世)의 명국 중에도 그런 사람이 적지 않으니, 어찌 한국 사람뿐이겠는가?
그렇다면 김택영, 왕성순 두 분의 뜻과 일은 이에 존경할 만하고, ‘십가문’의 초집(鈔輯)은 쓸모없지 않을 것이다. 갑인년(1914) 그믐날 중화 양계초(梁啓超)는 서(序)한다.
-양계초(梁啓超 1873~1929), '여한십가문초(麗韓十家文鈔)서(序)' /여한십가문초/서(序)-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최진원 (역) ┃ 1977
*옮긴이 주:
1. 양계초(梁啓超, 1873~1929)는 중국의 근대 사상가이자, 개혁가, 문학가, 사학가, 언론인, 교육가이다. 양계초는 20세기 초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라 불렸을만큼 중국에서 동양과 서양 사상에 모두 해박한 학자 중 하나였다. 1898년 서태후를 축으로 하는 중국의 구조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한 정치 및 제도를 타파하고 혁신하기 위해 일어난 개혁 운동인 변법자강 운동(變法自強 運動,1898년)을 주도한 인물이다. 소설과 시학과 사학 혁명에서 문체와 사상 혁신을 주도하며 신문화운동을 창도한 학인 중 한 사람이었으며 애국자로서의 오사운동(五四運動, 1919년)을 지지하였다.
2. 김택영(金澤榮, 1850∼1927)은 한말의 문신·학자·시인이다. 당대의 문장가며 시인인 이건창(李健昌)·황현(黃玹) 등과 교유하였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국가의 장래를 통탄하다가 중국에 망명했다. 우리나라의 역사서 <동사집략(東史輯略)>을 저술하였고, 후일 이를 더욱 보강 증보하여 <역사집략歷史輯略>을 편찬하였다.
3. 장계직(張季直): 본명은 장건(張謇). 청의 우국지사로 원세개의 최측근 참모이며 고위관리를 지낸 인물. 임오군란 당시 金昌熙(1844∼1890)가 그를 만나 기울어지는 조선의 국운을 염려하여 충고를 부탁하자 '조선선후육책(朝鮮善後六策)'을 지어 보냈다. 김창희는 이를 보강하여 이연호의 '조선부강팔의'와 함께 엮어 조선의 부강 회생책을 논한 '삼주합존三籌合存'을 저술하였다.
4.. 여한십가문초(麗韓十家文鈔): 여한십가문초는 김택영(金澤榮)이 펴낸 것을 그의 제자 왕성순(王性淳1869~1923)이 고쳐서 다시 펴낸 고문 선집이다. 고려 시대부터 당대까지 우리나라의 문장가 9명의 문장 95편을 가려서 ‘여한구가문초’라는 제목의 책을 엮었는데, 왕성순(王性淳)이 여기에 스승 김택영의 문장을 넣고, 제목을 '여한십가문초'로 바꾸어 책으로 펴냈다. 여한구문가는 김부식, 이제현, 장유, 이식, 김창협, 박지원, 홍석주, 김매순, 이건창이 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