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렬한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도덕과 인문을 논할 수는 없다
온 나라 백성이 모두 나뉘어져 둘로 갈라졌다가 셋으로 나뉘었다가 넷으로 쪼개진 것이 이백여 년이나 지속되어 다시는 서로 합치지 못한다. 누가 사악하고 누가 정의로운지, 누가 역신이고 누가 충신인지 끝내 밝혀져 정론으로 매듭지을 수 없는 붕당은 오로지 우리나라만 그러하다. 고금 붕당의 역사에서 제일 크고 제일 오래가고 제일 밝혀 말하기 어려운 것이리라! (중략)
무릇 천하의 사람들은 제각기 자신의 몸이 있으면 자신의 마음이 있다. 자기 자신에게 이롭게 하고자 남과 경쟁하기를 즐기고 남에게 양보하기를 부끄러워하는 것은 형세가 그럴 수밖에 없다.
옛 성인들이 이를 걱정하여 예법을 높여서 외형을 균등하게 만들고, 산을 밝혀서 근본을 동일하게 했다. 사람들로 하여금 난폭하고 쟁탈하려는 기운을 극복하여 화목하고 공정한 상태에 이르도록 했다. 그러자 천하 사람들이 하나같이 성인을 존중하여 높이고 그 어짊을 가까이 하며 그 이익을 즐겨 죽을 때까지 잊지 못했다.
이렇게 된 것은 그가 권세와 힘이 있어서 사람들을 두렵게 만들어 복종시켰기때문이 아니다. 그가 자기를 극복하는 학문을 함으로써 나를 앞세우지 않는 무아의 도를 얻은 까닭이다.
그는 마음이 넓고 툭 트여 피차(彼此)와 동이(同異)의 차별없이 천하를 한 집안으로 생각하고 나라 안의 사람을 한 사람으로 생각했다. 선한 일을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자기 자신의 존재를 잊었다. 이것은 남들이 하기 어려운 일이나 도학(道學, 도덕학, 유학의 다른 이름)이라는 이름을 그런 사람에게 붙여주었다.
만약 자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나를 앞세우는 태도가 있을 경우에는, 비록 그가 읽는 책이 성현의 책이고, 입는 옷이 성현의 옷이며, 행실이 성현의 행실을 따르려는 의도가 있다고 해도 자기 자신을 이롭게 하려는 마음은 오히려 천하의 용렬한 사람들과 끝내 차이가 크게 나지 않는다.
용렬한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도학(道學)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면, 이는 안될 말이다. 더욱이 천하의 용렬한 사람들을 끌어다가 자기 도학(道學)의 당의 만들어 당세에 호령하며 남들이 감히 자기 잘못을 거론하지 못하도록 한다면, 옛 성현들과 비교하여 어떠하겠는가?
자기는 나날이 높아지고, 나를 앞세우는 태도는 나날이 커지며, 사사로움은 나날이 굳어지고, 이익은 나날이 쌓여간다. 그 누가 이런 도학(道學)을 하고 싶어 하지 않으랴! 그리하여 경쟁하고 빼앗는 형국이 만들어지고 화란(禍亂)이 일어나게 되었다.
용렬한 사람과 서로 경쟁하여 빼앗는 사람은 반드시 용렬한 사람이다. 따라서 그 화(禍)는 한 때에 그친다. 그러나 도학과 경쟁하여 힘을 빼앗는 것은 반드시 도학이니 그 화(禍)가 무궁하게 지속될 것이다.
무릇 도학이 귀한 것은 무궁한 혜택이 있기 때문이지 무궁한 화(禍)가 있기 때문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 그 결과가 이러하다. 아마도 도학(道學)이 모두 이렇다기보다는 부질없이 추종하는 무리들의 잘못일 것이다.(이하생략)
-이건창(李建昌, 1852년~1898년), '원론(原論)' 중에서,『당의통략(黨議通略)』-
※용렬(庸劣): 사람이 비겁하고 좀스러우며 변변하지 못함
▲번역글출처: e-book 『안대회,이종묵, 정민의 매일 읽는 우리 옛글 06: 세상 모든 강물에 비친 달과 같이 外』(안대회, 이현일 역해/ 민음사 2013)
※[옮긴이 주 및 사족]
1. 도학(道學): 흔히 조선의 선비들이 논하는 도학(道學)을 도가류나 불가류의 학문, 도통하는 도술 등과 연관된 우주자연의 근본원리를 통달하는 초월적인 형이상학적 학문으로 착각하거나 오해하기 쉽다. 이는 잘못된 이해다. 조선 선비들이 말하는 도학(道學)은 도가류나 유사종교의 도학과는 다르다. 송대의 신유학 즉 성리학을 다르게 칭하는 말로 '도덕에 관한 학문'이란 뜻이다. 즉 '도덕학'의 준말이다. 성리학은 인간됨의 도리와 이치(理)를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의미로 이학(理學)이라고도 부른다. 그래서 조선 시대의 유학에서 말하는 도(道)는 곧 '도덕'의 줄임말이라 이해해도 무방하다. 궁극적으로는 ‘도덕의 실천적 완성을 추구하는 학문’이라는 뜻으로 일상의 삶에서 도덕의 실천에 그 목적이 있다. 따라서 조선 주류 학문의 역사에서 말하는 도학(道學)은 도술, 도사, 신선, 해탈, 열반 등등 그런 것들과는 하등 상관이 없다, 따라서 위의 글에서 언급되는 도학을 현대의 인문학(도덕과 윤리, 종교를 포함한), 또는 좀 더 나은 세상의 건설을 추구하는 학문.이념,사상들로 대체해도 별 무리는 없다고 생각된다,
2. 위에 옮긴 글은 이건창(李建昌, 1852~1898)이 지은 『당의통략(黨議通略)』의 말미에 부기된 「원론(原論)」의 일부다. 당의통략은 조선후기의 정치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된다. 이건창은 그의 부친 이상학이 지은 『국조문헌(國朝文獻)』에서 붕당 정치와 관련한 내용만을 발췌하여 『당의통략』을 구성하였다. 『당의통략』은 선조부터 영조대까지 연대기별로 주요한 정치적 사건, 즉 정쟁을 객관적인 관점에서 기술하는 형식을 취하여 ‚약 180년 간의 붕당 정치 흐름을 기술하였다. 책의 말미에 「원론」을 부기(附記)하여 붕당정치의 원인과 그 폐해의 심각성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붕당정치의 청산과 개혁의 당위성을 주장하였다.
이건창은 붕당의 원인을 여덟 가지로 지적하였는데, 위의 글은 그 첫 번째 원인으로 든 글이다. 인류역사에서 지나치게 엄격하게 도덕과 윤리가 강조되고 강요된 시기는 한결같이 암흑시대였다는 사실은 역설이 아닐 수 없다.
더욱 역설적인 것은 이건창의 '원론'을 일제 식민 사학자들은 식민주의 사관 창출에 악용하여 식민 지배를 정당화시키는 주요 근거로 삼았다는데에 있다. 붕당정치와 폐해와 당쟁의 극복을 위한 조선 지성인의 분석과 비판적 논의를 오히려 조선 왕조의 역사를 소모적이고 당파성이 강한 마땅히 청산되어야할 부정적인 역사로 평가하는 근거로 삼은 것이다. 세계 역사에서 당파 정쟁이 없고 그 암투가 치열하지 않았던 나라의 역사는 어디에고 찾아 볼 수 없다.
오늘 날 조선역사, 심지어 조선 선비정신을 무능하고 부패한 양반정신으로 폄하하고 왜곡하여 거의 고정관념화 되다시피한 부정적 인식의 배경에는 이러한 식민사관이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이건창 선생뿐만 아니라 수많은 조선의 참 선비들, 의로운 선비들은 일신의 영달을 지푸라기처럼 여기고 당파정치, 붕당정치의 혁파를 위해서 목숨을 걸고 나섰지만, 번번히 이들을 가로막은 것은 절대왕권이 아니라 기득권력, 즉 세도정치의 문턱이었다.
역사는 반복된다. 우리의 역사에서 한결같이 개혁과 적페청산을 가로 막는 것은 언제나 수구권력, 즉 기득권세력 집단이었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오늘 날의 적폐세력이다.
오늘 이웃 블로그에서 "한 사람으로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는 시간은 딱 하루면 충분했다"...."그 한 사람 덕분에..." 라는 글을 콧등을 시큰거리며 보았다. 이러한 소회는 내 주변 블로그 이웃들에게서 한결 같이 비슷한, 참으로 소박한 희망의 글들을 본다. 덕분에 내 좁은 가슴도 덩달아 부풀어 오른다. 위의 글의 요점도 이와 맥락이 닿는다. 모쪼록 촛불이 희망으로 타올랐듯이 화왕산의 봄들불처럼 온 나라에 번져 촛불대신 태극기를 들었던 사람들에게까지도 전염되기를 소망한다.
한편으로는 한경오를 비롯하여 심지어 미디어오늘까지 조중동문과 비슷한 방식으로 스스로가 적폐의 대상임을 발악하듯 커밍아웃하는 소위 족벌좌파, 학벌귀족좌파, 강남좌파, 입진보, 기레기들과 그들의 깐죽대는 독선적인 글들을 본다, " " 그 한 사람덕분에..." 온 나라에 가득했던 절망이 온통 희망으로 들불처럼 번지는데도 말이다.
보통사람들보다 좀 더 평등을 누릴 선택받은 권리, 좀 더 자유를 누릴 특별한 권리를 신념처럼 주장하고 강요하는 사람들, 스스로 지성과 엘리트 집단임을 훈장처럼 내세우며 민중을 계몽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집단들, 그들이 바라는 세상을 위해 우마처럼 이끌어야하는 수단과 도구로 생각하는 극우와 극좌는 무늬만 다를 뿐 그 속성은 기가 막히게도 닮아있다. 민주주의를 가로막는 진짜 적이 누구인지 눈 크게 뜨고 분별해야할 필요가 있다. 나는 그리 순수하거나 정의롭거나 도덕적인간은 더욱 못된다. 하지만 희망을 가져다 준 "그 한 사람 덕분에 ", 촛불의 정신에 의지하는 어용 촛불필부가 되기로 다짐한다.(2017.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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