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를 친구로 삼는다

쇠똥구리는 스스로 쇠똥굴리기를 즐겨하여 여룡(驪龍)의 여의주(如意珠)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따라서 여룡도 여의주를 가졌다는 것을 스스로 뽐내어 저 쇠똥구리가 쇠똥굴리는 것을 비웃어서는 안 된다.


어옹(漁翁)이 긴 낚싯대에 가는 낚싯줄을 거울 같은 물에 드리우고 말도 않고 웃지도 않으면서 간들거리는 낚싯대와 낚싯줄에만 마음을 붙이고 있을 때는, 빠른 우뢰소리가 산을 부수어도 들리지 않고 날씬한 아름다운 여인이 한들한들 춤을 추어도 보이지 않는다. 이는 달마대사(達磨大師)가 벽을 향해 앉아 참선할 때와 같다.


용모에 은연중 맑은 물이나 먼 산의 기색을 띤 사람은 바야흐로 함께 고아한 운치를 얘기할 수 있음은 물론이고, 그의 마음에는 돈을 탐하는 속태(俗態)가 없다.


만약 내가 지기(知己)를 얻는다면 이렇게 하겠다. 10년 동안 뽕나무를 심고, 1년 동안 누에를 길러 손수 오색실을 물들인다. 10일에 한 가지 빛깔을 물들인다면 50일이면 다섯 가지 빛깔을 물들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따뜻한 봄, 햇볕에 말려서 아내로 하여금 강한 바늘로 내 친구의 얼굴을 수놓게 한 다음, 고운 비단으로 장식하고 옥으로 축을 만들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높은 산과 흐르는 물이 있는 곳에다 걸어놓고 말없이 바라보다가 저물녘에 돌아오리라. 선비라도 한 꿰미 돈을 아끼게 되면 앞뒤가 꽉 막히게 되고, 시정(市井) 사람이라도 마음속에 수천 자의 글을 지니게 되면 눈동자가 영롱하게 빛난다.


가난해서 반 꿰미의 돈도 저축하지 못한 주제에 천하의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은택을 베풀려 하고, 노둔해서 한 부(部)의 책도 통독하지 못한 주제에 만고의 경사(經史)와 총패(叢稗)를 다 보려 하니, 이는 오활한 자가 아니면 바로 어리석은 사람이다. 아, 이덕무야! 아, 이덕무야! 바로 네가 그렇다.


낙숫물을 맞으면서 헌 우산을 깁고, 섬돌 아래 헌 약구(藥臼, 약초를 찧는 절구)를 안정시키고, 새들을 문생(門生)으로 삼고 구름을 친구로 삼는다. 이런 형암(炯菴)의 일생을 편한 생활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으니 우습기 짝이 없다.


가는 모시[苧]의 실로 호박(琥珀, 보석의 일종)을 끊을 수 있고 엷은 판자 조각으로 쇠뿔을 벨 수 있는 것이니, 군자가 화(禍)를 예방함에 있어 소홀히 여기는 것을 삼가야 한다.


다정한 좋은 친구가 있는데도 그를 오래도록 머물게 하지 못할 경우에는 꽃술의 가루를 옮기는 나비가 꽃에 오는 것과 같아서 나비가 오면 너무 늦게 온 듯 여기고, 조금 머무르면 안스러워하고, 날아가면 못잊어하는 꽃의 심정과 같게 된다.


글을 읽음에 있어 공명(功名, 공을 세워 세상에 널리 이름을 드러냄)에만 유의하고 정신을 들여 분명하게 살피지 않고, 게다가 자기의 처지에 만족할 줄도 모른다면 시장에 가서 거간꾼이 되는 것이 낫다.


마음에 맞는 계절에 마음 맞는 친구를 만나 마음에 맞는 말을 나누며 마음에 맞는 시문(詩文)을 읽으면, 이는 최상의 즐거움이다. 그러나 이런 기회는 지극히 드문 것이어서 일생을 통틀어도 모두 몇 번에 불과하다.


눈 오는 밤이나 비 오는 밤에 다정한 친구가 오지 않으니, 누구와 얘기를 나눌까? 시험삼아 내 입으로 글을 읽으니 듣는 것은 나의 귀요, 내 손으로 글씨를 쓰니 구경하는 것은 나의 눈이었다. 내가 나를 친구로 삼았으니 다시 무슨 원망이 있으랴? 


시문을 볼 때는 먼저 지은 사람의 정경(情境, 처지와 상황)을 알아야 하고, 서화(書畫)를 평할 때는 먼저 자신의 기우(器宇, 용모, 모습)를 반성해 보아야 한다.


친구가 없다고 한탄할 필요가 없이 책과 함께 노닐면 된다. 책이 없으면 운하(雲霞, 구름과 노을 또는 안개)가 내 친구고, 운하가 없으면 하늘 가를 나는 갈매기에 내 마음을 의탁할 것이다. 나는 갈매기가 없으면 남쪽 마을의 회화나무를 친구삼아 바라보아도 되고 원추리 잎새 사이의 귀뚜라미도 구경하며 즐길 수 있다. 무릇 내가 사랑해도 상대가 시기하거나 의심하지 않는 것은 모두 나의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


나보다 훌륭한 사람은 우러러 사모하고, 나와 동일한 사람은 아껴주어 교제하면서 서로 격려하고, 나만 못한 사람은 딱하게 여겨 가르쳐 준다면 천하가 태평하게 될 것이다.


밖으로 점잖은 체 꾸미면서 속에 시기심이 꽉 찬 사람은 사랑하려 해도 한 푼의 값어치가 없고 미워하려 해도 또한 때릴 가치조차 없는 사람이다. 단지 그가 거짓을 꾸미느라 매우 노고하는 것을 가엾게 여길 뿐이다. 만약 그가 잘못을 뉘우치면 한 번 가르쳐볼 만은 하다.


어린애가 거울을 보고 빙그레 웃는 것은 분명히 저 뒤쪽까지 탁 트인 줄 알고 그러는 것이다. 그러나 급히 거울의 뒤쪽을 보면 거울의 등은 검을 뿐인데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할 뿐 어째서 어두운가에 대해 묻지 않는다. 묘하구나, 구애됨이 없음이여! 본보기로 삼을 만한 일이다.


간사한 사람의 가슴속에는 마름쇠 1곡(斛)이 들어 있고, 속인(俗人)의 가슴속에는 때 1곡이 들어 있고, 청사(淸士)의 가슴속에는 얼음 1곡이 들어 있으며, 강개한 선비의 가슴속은 모두 가을 빛 속의 눈물이고, 기사(奇士)의 가슴속에는 여러 개의 가지처럼 뻗어난 마음이 모두 대나무와 돌을 이루고 있다. 대인(大人)의 가슴속은 평탄해서 아무런 물건도 없다.


미불(米芾)은 돌에 절했고 반곡(潘谷 송 나라 때의 묵공(墨工))은 이정규(李廷珪 송 나라 때의 묵공)의 먹[墨]에 절했으며, 역생(酈生)은 패공(沛公)에게 절하지 않았고 도연명(陶淵明)은 관장(官長)에게 절하지 않았다. 절해서는 안 될 경우에 절하면 이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사람이고, 당연히 절해야 될 경우에 절하지 않으면 이는 거만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다.


고금(古今)도 따지고 보면 잠깐일 수 있고 잠깐도 따지고 보면 조그만 고금이 될 수 있다. 잠깐이 쌓이면 거연(居然)히 고금이 되기 때문이다. 또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수레바퀴처럼 수없이 교대하면서 돌아가지만 늘 새롭기만 하다. 이 가운데서 낳고 이 가운데서 늙으므로 군자는 이 ‘3일’에 유념한다(君子着念此三日).


일이 뜻대로 되어도 그렇게 넘길 뿐이고 일이 뜻대로 안 되어도 그대로 넘길 뿐이다. 그러나 언짢게 넘기는 것과 즐겁게 넘기는 것이 있다. 망령된 사람과 논쟁하느니보다는 얼음물 한 그릇 마시는 것이 낫다. 


글을 읽고도 시정배(市井輩)의 마음이 있다면, 시정배로서 글을 잘 읽은 사람이 낫다. 분수를 지켜 편안히 여기고 처해진 형편대로 즐기고 모욕을 참고 관대함을 지니면, 이것이 대완(大完)이다.


조정에 출사(出仕)하여 임금의 계책을 돕지 못할진대, 초가집에 앉아 십삼경(十三經) 주소의 이론을 열람하고 이십일사(二十一史) 기전(紀傳)의 잘잘못을 평론하는 것이, 차라리 헛되이 살다 헛되이 죽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루에 두 그릇 밥을 먹는 데에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 마음을 닦고 성령을 배양하는 것만은 못하다(然都不如修心養性, 그럴지라도 마음을 닦고 본성을 바르게 잘 자라도록 힘쓰는 것만 못하다


-이덕무(李德懋, 1741~1793),' 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제 63권/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 중에서 부분발췌-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나금주 (역) ┃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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