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군(君)이요 몸은 신(臣)이다

남이 나를 칭찬한다 하여 후하게 대하지 말고 남이 나를 훼방한다 하여 박하게 대하지 말아야 하며, 한 가지의 칭찬을 들었다 하여 스스로 기뻐하거나 자부(自負)하지 말고 다만 나의 몸을 조심하여 더욱 힘써야 하고, 한 가지의 훼방을 들었다 하여 스스로 화내거나 자기(自棄,좌절하고 스스로 포기함)하지 말고 다만 나의 몸을 반성하여 잘못을 고쳐야 한다.


하늘과 땅이 있은 뒤에 사람이 있는 것이다. 사람은 하늘과 땅의 부여(賦與)를 받았으니, 역시 하나의 하늘과 땅이 되는 셈이다. 하늘과 땅이 도수(度數)를 상실하면 오행(五行)이 뒤바뀌고 사람이 떳떳함을 상실하면 오륜이 무너진다. 하늘과 땅의 몸으로서 하늘과 땅의 도수를 법받아 그 떳떳함을 상실함이 없으면 거의 사람이 될 것이다.


말(言)은 어긋나게 할 것이 아니라 이치를 분석해야 하며, 쉽게만 할 것이 아니라 자세함을 들어야 한다. 사람 대하기를 공손으로 하면 욕을 면할 수 있고, 사물 처리하기를 청렴으로 하면 화를 면할 수 있다. 충고 듣기를 풍류소리 듣는 것처럼 하고 허물 고치기를 도둑 다스리는 것처럼 해야 한다.


남을 이기려 하는 것이 가장 큰 병통이다. 구구한 담론(談論)으로 기세를 올리고 소리를 돋구어 남을 꺾으려 하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다. 남에게 뒤진 이가 도리어 유쾌하여, 남을 이기는 자보다 나은 것만 같지 못하다. 사람이란 선하든 악하든 춘풍화기(春風和氣)와 같이 대하여 여유작작해야 하고, 일이란 크든 작든 청천백일과 같이 처리하여 포용력이 있어야 한다. 비루하고 난잡한 일은 눈에 접하지 말고 속되고 어긋난 말은 입에 올리지 말아야 한다.


당(唐) 나라 이후로 세상 풍습이 말(末)만을 추종하여 글씨와 문장에 능한 것을 상등으로 치고 학문(學問)하는 것을 하등으로 친다. 소위 글씨에 능하다는 것은 해정(楷正,글자의 모양이 분명하고 바름)하고 고아(古雅, 옛스럽고 고상함)함을 이름이 아니라 서찰(書札,편지) 따위에 능하여 그때의 형식에 맞추기만 힘쓰는 것을 이름이요, 문장에 능하다는 것은 평이하고 순수함을 이름이 아니라 부화(浮華, 내용은 없고 겉만 화려함)에 능하여 과거의 규정(科規, 과거시험용 형식과 규칙)에 맞추기만 힘쓰는 것을 이름이다. 개중에 학문하는 이가 있으면 으레 비웃고 지목하여 마치 별다른 사람처럼 취급하고 있으니, 경솔하고 부화한 풍습은 늘 스스로 경계하고 반성해야 한다.


가사 재주와 지혜가 있더라도 마땅히 내부에 함축해 두었다가 쓰일 때에 써야 할 것이요, 조그만 재주와 지혜로써 스스로 나서거나 과시해서는 안 된다. 만일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나는 아무 일을 잘한다고 하거나 아무 기술이 있다고 한다면, 이는 남들이 바보로 취급할 뿐 아니라 자신이 도리어 비루해지게 된다.


의복은 비록 박해도 추위를 막을 수 있지만 행실이 박하면 마을에서도 용납되지 못하며, 음식은 비록 궂어도 시장함을 면할 수 있지만 마음이 궂으면 방안에서도 편안할 수 없다. 의상(衣裳)이 남루한 자를 보면 우선 업신여기는 마음부터 견제하여 말을 더욱 공손히 하면서 측은하게 여겨야 하며, 의상이 헌칠한 자를 보면 우선 부러워하는 마음부터 견제하여 뜻을 더욱 가다듬고 경계해야 한다.


마음은 군(君)이요 몸은 신(臣)이다. 어찌 신으로서 군을 속일 수 있겠는가? 만일 군을 속이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재앙이 따르게 된다. 마음을 속이는 자도 이와 같으므로 “혼자만이 아는 곳을 삼간다.[愼其獨]”는 것은 《대학》에서 훈계한 것이고, “방구석에서도 부끄럽지 않다.[不愧屋漏]”는 것은《시경》에서 경계한 것이다.


한 가지 사물에도 자신이 스스로 깨닫기도 하고 혹은 남에게 배워서 깨닫기도 하는 것이니, 만일 깨달은 바가 있으면 마치 큰 이익이라도 얻은 것처럼 여겨 한평생 잊지 말아야 하며, 한 가지 허물에도 자신이 스스로 깨닫기도 하고 혹은 남의 말로 말미암아 깨닫기도 하는 것이니, 만일 깨달은 바가 있으면 마치 무거운 짐이라도 벗어 버린 것처럼 여겨 한평생 스스로 기뻐해야 한다.


옛말에 “훼방을 종식시키기에는 변명하지 않는 것이 으뜸이요, 원망을 방지하기에는 다투지 않는 것이 으뜸이다.”고 하였다. 나는 변명하지 않고 다투지 않는데 남이 또 나를 훼방하더라도 담담히 모르는 척할 것이요, 절대로 변명하거나 다투어서는 안 된다.


무릇 사람을 대할 때 말이 너무 많으면 상대방이 잘 듣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말이 이중 삼중으로 되어, 마치 바람이 귓전을 스치는 것처럼 여겨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사리를 피력하고 골자만 들어서 간결하게 말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이렇게 하면 듣는 사람이 싫증을 느끼지 않고 말한 대로 전부 받아들여 실천하게 될 것이다.


생활을 영위하는 데 있어 구차스레 하지 말아 아무리 기한과 질병에 봉착하더라도 담담할 뿐이다. 그러나 진삼(陳三)이 갖옷(裘)을 퇴각하던 일과, 중자(仲子)가 거위(鵝)고기를 내뱉던 행동은 혹 무던하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그와 같이 비뚤어지고 좁은 처사는 본받을 바가 못된다.


언어는 과도한 흥분에 치우쳐서는 안 된다. 아무리 못난 하인배나 미천한 금수에게라도 혹 조그마한 분노로 말미암아 칼이나 몽둥이를 뽑아들고 위협과 질타를 가하면서, 내가 이것들을 죽이고야 말겠다는 등의 언사를 써서는 안 된다. 참음으로써 노여움을 견제한다면 무슨 일인들 실패하겠으며, 부지런함으로써 게으름을 이긴다면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겠는가? 간결함으로써 번거로움을 견제하고 안정으로써 움직임을 견제하는 것은 한평생 가슴에 간직하여야 한다. 이것이 정심(正心) 공부이므로 군자는 말은 간결하고 마음은 안정하다. 옛사람을 배우는 데는 실천하는 것을 공부로 삼아야 한다. (하략)


*[역자 주]진삼(陳三) : 진삼은 송 휘종(宋徽宗) 때 사람 진사도(陳師道)를 가리키는 말인데, ‘삼’은 진씨 집안의 셋째 아들이란 뜻인 듯하다. 그는 동서(同壻) 조정지(趙挺之)가 탐오하다 하여 미워하였는데, 하루는 휘종을 따라 교사(郊祀)에 참여하게 되었다. 날씨가 추워 그의 아내가 조정지 집에 가서 갖옷을 얻어다가 입으라고 하니, 물리치고 입지 않고 갔다가 한질(寒疾)에 걸려 죽었다.《宋史 卷444 陳師道傳, 通鑑50篇詳節要解上》


-이덕무(李德懋, 1741~1793), ‘무인편(戊寅篇)’ 부분발췌,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제5권/영처잡고 1(嬰處雜稿一) /무인편(戊寅篇))』-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이재수 (역) ┃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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