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을 사귀고 사람을 대하는 도리 (사소절, 交接 교접)

벼슬로 서로 유혹하는 사람은 벗이 아니요, 권세와 이익으로 서로 의지하는 사람은 벗이 아니요, 장기 바둑이나 놓고 술이나 마시고 해학하며 떠들썩하게 웃는 사람은 벗이 아니요, 시문(詩文)ㆍ서화(書畫)ㆍ기예(技藝)로 서로 잘한다고 허여하는 사람은 벗이 아니다. 아! 오늘날의 이른바 우도(友道)란 것을 내가 매우 슬퍼하는 바이다.


겸손하고 공손하며 아담하고 조심하며 진실하고 꾸밈이 없으며 명절(名節)을 서로 부지하고 과실(過失)을 서로 경계하며, 담박하여 바라는 바가 없고 죽음에 임하여 의리를 저버리지 않는 사람이 참된 벗이다.


거짓된 인품은 사람을 많이 상대할수록 더욱 교활해지고, 참된 인품은 사람을 많이 상대할수록 더욱 숙련(신중하고 진지함)해진다. 진중순(陳仲醇)은 이렇게 말했다. “공자는 ‘대인(大人)을 두려워한다.’ 하였는데, 두려워하면 교만하지 않고, 맹자는 ‘대인을 경시한다.’ 하였는데, 경시하면 아첨하지 않을 것이니, 곧 중도(中道)다.”


영도(寧都)의 위희(魏禧)는 이렇게 말했다. “벗을 사귀는 자는 이미 안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지 않아서는 안 되고 의심을 버리지 않아서는 안 되고, 조그마한 혐의를 없애 버리지 않아서는 안된다.” 또 이렇게 말했다. “벗에 대하여 윤리를 손상하고 교화를 무너뜨린 자 외에는 차라리 그를 충분히 책망할지언정 조금이라도 박하게 대해서는 안 된다. 그를 박하게 대할 뜻을 가지면 성의가 이미 쇠해져서 비록 바른 말을 한다 하더라도 능히 남을 감동시키지 못하고, 또한 원망을 초래하기 쉽다.”


《백호통의(白虎通義)》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벗을 사귀는 도리가 네 가지가 있는데 재물을 통용하는 일은 그 가운데 들지 않는다. 가까우면 그를 바로잡아 주고, 멀면 그를 칭찬해 주며, 즐거운 일이 있으면 그를 생각하고, 환란이 있으면 그를 위해 목숨까지도 바친다.”


신함광(申涵光)은 이렇게 말했다. “나이가 많으면서도 덕이 없고 지극히 가난하면서도 아끼지 않는 이 두 종류의 사람은 더불어 계교할 수 없다.”


주자(朱子)는, “자신도 오히려 자신의 마음을 유쾌하게 못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이 나의 마음을 유쾌하게 하겠는가. 요컨대 겸허한 마음으로 착한 것을 따르는 데 달려 있다.” 하고, 여형공(呂滎公)은, “자신의 악을 다스리고 남의 악은 다스리지 말라. 자신의 악을 다스리되 주야로 점검(點檢)하여 조금도 다하지 못하면 마음에 흐뭇하지 않은데 어찌 다른 사람의 악을 점검할 공부를 할 겨를이 있겠는가?”

하였으니, 이상 두 분의 말은 자신을 책망하고 남을 용서하는 데 지극한 말이다. 


나는 일찍이 이를 명심하여 법식으로 삼는다. 《예기》에, “남이 나에게 충성을 다 바치기를 바라지 말라.” 하고, 《시경》에, “내 몸도 돌보지 못하는데, 어느 겨를에 남을 돌보랴?” 하였다. 남의 기색을 잘 살핀다고 하면서, 남의 잘못만 보고 남의 옳은 것을 보지 않는 자는 참으로 박정한 사람이다. 그러한 사람은 남과 좋게 지낸다 하더라도 나는 그의 마음속을 헤아리지 못하겠다.


사람의 심정은 누구나 남이 자기를 떠받드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므로 맨 처음 사귈 때 친애(親愛)하지 않음이 없음은 서로가 떠받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귄 지 오래되어 각기 상대방의 과실을 알고 혹시 규잠(規箴, 잘못을 지적하고 바로잡음)하면 크게 비위를 거스려 사귐이 비로소 등진다. 그런 까닭에 군자는 겸허함을 귀중히 여기고 시종(始終, 처음과 끝)을 삼간다. 《시경(詩經)》에 이렇게 말했다. “시작은 있지만 유종의 미를 거두는 이는 적다.”


나이 많은 사람, 학문 있는 사람, 엄정하고 바른말 하기 좋아하는 사람을 싫어하거나 피하지 말라. 언어나 행동이 항시 남의 비위를 거스르는 자는 십분 삼가서 대해야 한다. 그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바로 나를 공경하기 위한 것이다.


지나친 칭찬은 아첨에 가깝고, 지나친 비방은 헐뜯음에 가까우며, 칭찬할 때 칭찬하지 않으면 인색하고, 비방할 때 비방하지 않으면 나약하다. 그러므로 먼저 식견을 확립해야 이 같은 네 가지 허물이 없을 것이다.


남과 처음 사귈 때 비록 마음에 든다 해도 얼른 지기(知己)라고 칭해서는 안 되고, 사귄 지 약간 오래된 사이엔 마음에 조금 거슬린다 해서 갑자기 절교를 논해서도 안 된다.


어느 손님과 마주 앉아 은근히 이야기하다가, 그 손님이 작별하고 겨우 문을 나가자 마자, 한자리에 있는 다른 손님과 더불어 떠난 손님의 평생 숨긴 비밀을 이야기 하는 것은 충후(忠厚, 진실하고 인정이 두터움)한 풍속이 아니다. 어찌 아까 그 손님과 은근히 이야기하던 것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겠는가? 남을 몸둘 바 없을 정도로 곤란하게 만들지 말라.


악한 사람은 미워하지 않을 수 없고, 불쌍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다. 불쌍하게 여기고 미워하는 것은 모두 그가 인류의 숫자에 들어 있음을 탄식하는 것이다.


사람의 심정은, 남에게 착한 점이 있다는 말을 듣기 싫어한다. 만약 일종의 질투하는 사람을 만나면 비록 자기가 애중히 여기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의 앞에서 극구 칭찬하여 그의 꺼리는 마음을 도발하게 해서는 안 된다. 남의 가진 것을 투기하는 자는 나의 없는 것을 혐의하는 사람이요, 남의 없는 것을 비웃는 자는 나의 있는 것을 자랑하는 사람이다.


남의 말 한마디, 일 한 가지를 선뜻 보고서 그 사람의 평생을 속단해서는 안 된다. 사리를 모르는 사람에게 그가 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을 억지로 권하지 말라. 한 가지 일이 마음에 맞지 않는다 해서 일마다 남을 의심한다면, 어찌 양우(良友, 좋은 친구)며 길사(吉士, 좋은 선비)이겠는가?


가장 두려운 것은 얼굴이 두툼하고 말을 간략하게 하는 소인이다. 그것은 그의 마음을 헤아리기 어려워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험악한 사람의 심리는 남의 우호(友好)를 미리 시기하여 반드시 이간해서 서로 떨어지게 하려 한다.


선비는 자기 의견과 다른 의견을 만났을 때 기를 쓰며 다투어서는 안 된다. 나의 체모만 손상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저 따르지 않는 것이 옳을 뿐이다. 대저 뜻이 맞지 않는 자를 자기의 지력(智力)으로 제재할 수 없을 경우 부득불 당세의 유명하고 세력 있는 사람을 끌어서 공갈하기를, “모(某)의 아무 일은 모공(某公)이 몹시 비난하더군, 내가 직접 들었는데 매우 위험한 일이구려. 내가 그대를 위해 해명해 주리라.” 하기 마련인데, 그가 말한 모공은 일찍이 비난한 적도 없고 설사 비난한다 하더라도 아예 해명해 주기는커녕 도리어 무함할 자다. 이러므로 한 문공(韓文公)이 〈석언(釋言)〉을 짓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그런 행위를 몹시 부끄럽게 여기는 동시에 그런 무리와는 사귀기를 원하지 않는다.


남의 쟁송(爭訟)을 잘 참견하거나 남의 은밀한 일을 들을 때 가까이 대해서 달콤하게 듣고서 다른 사람에게 퍼뜨리는 것은 소인의 기상 중에서도 심한 것이다. 대저 사람의 심정이란 남의 허물 듣기를 좋아한다. 이런 죄과(罪科)를 범하기 쉬우니, 더욱 성찰(省察)하라.


무릇 남에게 요구할 일이 있어서, 은근한 언사로 대접하여 평소보다 배나 친절을 베푸는 것은 참으로 시정(市井)의 야박한 풍속이니, 이른바 언사로 대접하는 것에는 진실도 거짓도 있기 때문이다.


귀에 소근거리고 눈을 깜빡거리는 어떤 손님이 자리에 있고 주인이 자주 들락날락하거든 그 자리에 오래 앉아 있어서는 안 되고, 그런 집에 자주 가도 안 된다. 그 주인은 필시 시정배(市井輩)일 것이다. 거짓으로 친절한 체하는 것은 진심으로 불친절한 것만 못하다. 한 번 오가고 나서 벗을 책망하는 사람은 그 벗삼는 도리를 알 만하다.


스스로 남을 도와주기를 좋아한다 하면서 완급(緩急)ㆍ경중(輕重)ㆍ친소(親疏)ㆍ후박(厚薄)을 구별하지 않는다면 명예는 도리어 헛된 것이 되고 원망도 또한 깊이 쌓일 것이니, 패망을 자초할 뿐이다. 장괴(張壞)는 이렇게 말했다. “두기공(杜祁公)이 남을 도와주던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가 망령되이 도와주지 않은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내가 부유하고 학문도 꽤 좋아하는데, 평소 절친한 친구 중에 비록 굶주림에 허덕이면서도 나에게 빌려 달라고 입을 여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면 어찌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돌이켜 생각하면 나는 인간이 아니고 다만 인(吝 아낄 린)이란 한 글자에 묻혀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학문을 좋아한다는 것은 진짜 학문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친절하다는 것도 진짜 친절한 것이 아니니, 크게 반성해야 할 점이다.


사대부(士大夫)는 비록 가난하더라도 흉중(胸中,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에 항시 안평중(晏平仲)이 70호(戶)를 살리던 일과 범희문(范希文)이 의전(義田)을 두어 친족을 도움으로써 조상의 부탁을 저버리지 않았던 일을 간직한 뒤에야 부귀가 쓸모가 있는 것이다. 옛사람이, “가난한 친구를 때때로 생각하여 자기에겐 쌀이 없으면서도 아침을 못 짖는 남을 돕는다.” 하였으니, 이 말이 매우 좋다.


착한 일을 보거든 드러내기를 생각하고 곤궁한 자를 보거든 돕기를 생각한다면 충분히 천지의 원기를 부지(扶持)할 것이다.


-이덕무(李德懋, 1741~ 1793), '교접(交接)'부분 발췌,『청장관전서 제27~29권사소절 4(士小節四)-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김동주 (역) ┃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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