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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산문] 문장의 법도 따위에 얽매여서는 안된다

글을 지을 때는 답답하게 법도(法度, 정해놓은 법칙과 형식) 따위에 얽매여서는 안된다. 법도는 자연스런 형세에서 나오는 것이지, 평상시에 강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어린 아이가 처음 걸음마를 배울때는 항상 빨리 달리다 잘 넘어지곤 한다. 그런데 턱이 높은 문지방을 넘는 걸 보면, 반드시 한 쪽 다리를 먼저 문지방 밖으로 내놓은 다음, 문지방 안쪽에 있는 다리로 문지방을 사이에 끼워 놓은다. 그런 다음 다리가 문지방 건너편 땅에 닿지 않기 때문에 엎드려서 문지방 말뚝을 붙잡고서 문지방 안쪽의 다리를 거두며 문지방을 천천히 넘는다. 어찌 어린 아이가 그런 방법을 배웠겠는가? 형세가 부득불 그렇게 만들었을 따름이다. 마치 곧게 흐르던 물도 산을 만나면 산을 안고 돌아 흐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처..

[고전산문] 고개를 숙이고 도적의 무리에 휩쓸릴 수는 없다

선비가 성현의 말씀을 암송하고 성현의 행실을 몸소 실천하는 것은, 장차 마음에 품은 뜻을 소중하게 여겨 지키고, 덕(德)을 기르고 베풀기를 힘써 노력하려는 것이다. 지금 길을 같이하여 나아가고, 문을 같이하여 들어가며 뜰을 같이하여 달리는 자들은 백 명 천 명의 사람이 모두 도적들이다. 유독 나만 홀로 성현의 말씀을 암송하고 성현의 행실을 애써 실천하고자 노력하는 듯하다. 그럴진대, 어찌 내가 세속의 부패한 권세와 불의한 권위에 고개를 숙일 것이며, 꽁무니를 쳐들어 두려워하고 전전긍긍하며 도적의 무리를 뒤쫓을 수 있겠는가? 참으로 이런 이치는 결코 없는 법이다. 내가 들으니, '청렴한 자는 갓과 의복이 바르지 않은 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내세우는 명분이 의리에 어그러지면 군자는..

[고전산문] 인간이해(人解)

사람은 천하 만물 가운데서 영물(靈物)인 까닭에 진실로 금수(禽獸,하늘과 땅의 짐승)와 비교할 바가 못된다. 그러나 무거운 것을 지고 나르는데는 소(牛)만 못하고, 장거리의 먼 곳을 가는데에는 말(馬)만 못하다. 물에 들어감에 있어서는 물고기만 같지 못하고, 바람을 타고 거슬러 하늘을 날아감은 새만 같지 못하다. 그러므로 사람과 금수(禽獸)중에서 어떤 것이 더 나은지, 나는 알지 못하겠다. 다만 사람만이 금수(禽獸)를 다스리고 부릴 수 있고, 금수(禽獸)는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러한 점에서 사람이 금수(禽獸)보다 영험(靈驗)한 이유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할지라도 만약 천하에 사람이 없다고 가정할 경우에, 금수(禽獸)가 살아가는데에 이무런 지장도 해(害)도 될 것이 없다. 반면에 천..

[고전산문] 물감을 발라야만 색채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완정(玩亭, 이서구李書九)씨의 시론은 너무도 특이하다. 시(詩)의 성율(聲律)은 말하지 않고 시의 색채(色彩)만을 말한다. 그가 하는 말을 들어보자. "시(詩)의 글자는 대나무와 부들에 비유할 수 있고, 시의 글월은 엮은 발과 자리에 비유할 수 있다. 잘 생각해보면, 글자는 그저 새까맣게 검을 뿐이고, 대나무는 말라서 누렇고, 부들은 부옇게 흴 뿐이다. 그런데 쪼갠 대나무를 엮어 발을 만들고 부들은 엮어 자리를 만들되, 줄을 맞추고 거듭 겹쳐서 짜면, 물결이 출렁이듯 무늬가 생겨나서 잔잔하기도 찬란하기도 하다. 그래서 원래의 누런 빛이나 흰빛과는 다른 새로운 빛깔을 만들어낸다. 그렇듯이 글자를 엮어 구절을 만들고 구절을 배열하여 글월을 이루었을 때에는 마른 대나무와 죽은 부들이 만들어내는 조화에 그치겠는..

[고전산문] 어떻게 독서를 할 것인가?

지난 가을에 서신 올리고 잘 들어갔는지 소식 몰라 지금껏 탄식하였는데, 초여름 사신의 돌아온 편에 멀리 회답을 주시고 겸하여 송전(松箋)의 아름다운 선물까지 주시니 감사합니다. 요사이도 귀체 편안하신지요? 시험 기일이 또 다가오니 연구에 많은 애를 쓰실 터인데, 더욱 새로 얻은 것이 많이 있으십니까? 제(弟)는 상기(喪期)를 마친 몸으로 쇠약한 모습이 이미 나타나니 공명(功名)의 길은 분수에 없는 줄로 알며, 또 다행이 선대의 음덕(蔭德)으로 두어 이랑의 박전(薄田)이 있어, 먹고 살 수 있으므로 장차 영달(榮達)의 길을 끊어버리고 힘에 따라 수행(修行)하여, 집안을 편안히 하고 한가한 틈을 타서 옛 교훈대로 노력하며, 대장부의 호웅(豪雄)의 본령(本領)을 갖추기에 마음을 쓸까 합니다. 그렇게 함이 혹 ..

[고전산문]생각의 창을 통해 나오는 노래

무릇 생각은 즐거워도 나고 슬퍼도 난다. 나의 생각은 어디에 있는가? 서 있어도 생각나고 앉아 있어도 생각나며, 걸어도 생각나고 누워도 생각난다. 어떤 때는 잠깐 생각나고, 어떤 때는 오래오래 생각난다. 어떤 때는 생각을 오래 할수록 더욱 잊지 못한다. 그러니 나의 생각은 어디에 있는가? 생각하여 느낌이 있으니 소리가 나오지 않을 수 없고, 소리를 따라 운을 붙이니 곧 시가 되었다. 비록 음조가 비리하여 음악으로 연주하기에는 부족하지만, 저 오나라와 채나라의 민요와 비교해보면 또한 내가 생각한 것을 스스로 울린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에 시 약간 수를 깨끗이 하여 ‘사유악부’(思牖樂府, 생각의 창을 통해 나오는 노래)라 이름하였다. -김려(金鑢, 1766∼1822),'사유악부서(思牖樂府序)' , ..

[고전산문] 시를 짓는 것은 초상화를 그리는 것과 꼭 같다

시(詩)는 성조(聲調)의 고하(高下)와 자구(字句)의 공졸(工拙)을 막론하고, 그 시가 묘사하는 경(境)이 참되고[眞] 서술하는 정(情)이 실제적이어야만[實] 천하의 좋은 시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백과 두보 이후에 백거이․소식․육유(陸游) 등의 시는 그 성조가 반드시 다 수준 높은 것은 아니며 자구도 모두 솜씨좋은 것은 아니나, 참되지 않은 경을 묘사하거나 실제가 아닌 정을 서술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읽어 보면 정말로 그 시 속의 장소를 직접 밟아보고 그 시속의 사람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는 듯하니 모두 천하의 좋은 시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시를 짓는 것은 화가가 초상화를 그리는 것과 꼭 같다. 터럭 하나 하나가 모두 꼭 닮아야만 비로소 그 사람을 그려냈다고 말할 수 있다. 만일..

[고전산문] 절조가 무너진 세상, 본성을 잃지 않으려고

선비들의 무너진 절개와 지조 아아, 선비들의 절조가 무너진지 오래되었도다! 세력가에게 달려붙고 권세있는 요인에게 기웃거리면서 쉴새없이 바쁘게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며, 구름처럼 몰려들어 청탁하고 바람처럼 빠르게 달려든다. 심지어는 높은 관리들도 자식을 위해 벼슬자리를 구하고 명사들도 편지를 써서 아우를 천거하니, 사람들은 서로 눈을 부릅뜨고 반목하며 자리를 얻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여, 공(公)에 등 돌리고 사(私)를 좆으면서도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인사철이 되면 온갖 구설이 난무하여 서로서로 설을 퍼뜨리기를, ‘누구는 모 대신의 아들이니 모 산감(山監)이 될 것이다’, ‘누구는 모 재상의 아우이니 모 능참봉(陵參奉)이 될 것이다’, ‘누구누구는 모 관리의 친척이고 친지이니 모 현감, ..

[고전산문] 깨달으라고 권하기보다는 생각해보라고 권하는 것이 낫다

천하에 이른바 도술(道術, 도덕과 학술)이나 문장이란 것은 부지런함으로 말미암아 정밀해지고,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다. 진실로 능히 깨닫기만 한다면 지난 날 하나를 듣고 하나도 알지 못하던 자가 열 가지 백 가지를 알 수 있다. 앞서 아득히 천리 만리 밖에 있던 것을 바로 곁에서 만나볼 수 있다. 전에는 어근버근 어렵기만 하던 것이 너무도 쉽게 여겨진다. 옛날에 천 권 만 권의 책 속에서 찾아 헤매던 것이 한 두 권만 보면 너끈하게 된다. 이전에 방법이 어떻고 요령이 어떻고 말하던 것이 이른바 방법이니 요령이니 하는 것이 없게 된다. 기왓장 자갈돌을 금덩이나 옥덩이처럼 써먹을 수 있고, 되나 말로 부(釜, 가마솥)나 종(鍾)이 되게 할 수도 있다.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고, 아무리 써..

[고전산문] 말로는 표현할 수도 깨우칠 수도 없는 것

명(明) 나라 이후로 문장을 한다는 사람들을 내가 대강 안다. ‘나는 선진(先秦)의 문장을 쓴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찬찬히 살펴보면 그렇지는 않고 입이 쓸 뿐이다. 또 ‘나는 사마천(司馬遷)의 문장을 쓴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있는데, 찬찬히 살펴보면 그렇지는 않고 뜻만 높을 뿐이다. 또 ‘나는 한유(韓愈)의 문장을 쓴다.’는 사람도 있는데, 찬찬히 살펴보면 그렇지는 않고 억지로 우겨댈 뿐이다. 또 ‘나는 소식(蘇軾)의 문장을 쓴다.’는 사람도 있는데 찬찬히 살펴보면 그렇지는 않고 거칠 뿐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모두 저 옛사람들의 문장의 기가 성한 것[氣之盛]만 부러워한 나머지, 그와 같아지려고 일생의 힘을 모두 다 바치는 정도에 이르렀으나, 마침내 여기에 그치고 말았으니 그 어려움을 알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