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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산문] 비록 맛은 같지 않아도 / 성현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물었다. “육경(六經, 시경, 서경, 역경, 예기, 악기, 춘추) 외에는 모두 헛된 글입니다. 경(經)은 치도(다스리는 도리나 방법)의 율령(법률)과 같은 존재이니 마땅히 우선해야 할 것이고, 사가(史家)의 기록으로 말하자면 또한 빼놓을 수는 없지만 과장하고 꾸미는 폐단을 면치 못합니다. 더욱이 역사서 외에 괴이하고 궁벽한 것을 기록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대답하였다. “그대의 말과 같다면 식견이 매우 막힌 것이다. 이는 음식을 먹는 자가 단지 오곡만을 알고 다른 음식의 맛을 모르는 것과 같다. 무릇 육경은 깨끗한 오곡과 같고 《사기(史記)》는 맛이 훌륭한 고깃점과 같으며, 제가(諸家)들이 서술한 것은 온갖 과일이나 채소와 같다. 맛은 비록 같지 않지만 내 입에 맞지 않는 것이 없으..

[고전산문] 대나무를 사랑하는 까닭 / 성현

내가 어렸을 때 언젠가 설당(雪堂, 소식(蘇軾))의 시를 읽고서 그 말이 크게 사리에 맞지 않는 점에 대해서 괴이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사람이란 고기(肉)를 먹지 않으면 배가 부르지 않고, 배가 부르지 않으면 살이 찌지 않으며, 살이 찌지 않으면 기운이 점점 빠지고 지쳐서 결국에는 죽게 된다. 그럼에도 “밥 먹을 때 고기가 없는 것은 괜찮지만 거처하는 곳에 대나무가 없어서는 안 된다.〔可使食無肉, 不可居無竹.〕*”라고 하였으니, 이는 양생(養生, 몸과 마음을 편케 하고 이롭게 하여 건강하게 사는 일)의 추환(芻豢, 다양한 종류의 육류)*을 도리어 목전의 완상물(玩賞物, 구경하고 즐기며 감상하는 물건)보다도 못하다고 본 것이다. 어느덧 내가 나이 들어 세파를 많이 겪고 나서야 고인의 의론(견해)에 미칠..

[고전산문] 뜬구름을 생각하는 까닭은 / 이색

화엄종의 중 의공(宜公)이 저번에 나에게 시(詩)를 보내 왔다. 그 시를 음미하고 나는 시 잘 짓는 중을 만났다고 생각하였다. 서로 헤어진 지 오래되었더니 옥천사(玉泉寺)에 머무르면서 나에게 수백 마디의 말을 쓴 편지를 부쳐 왔다. 뜻하는 바와 표현이 바로 문인(文人)과 더불어 거의 차이가 없었다. 나는 곧 의공(宜公)이 시문(詩文)에 뜻이 매우 두텁다는 것을 알았다. 만나서 그의 말을 듣고 싶은 지 오래였다. 금년 여름에 서울로 찾아와서 말하기를, “나는 구름(雲)으로 나의 마룻방의 이름을 붙였으니, 선생의 기문을 청합니다.” 하였다. 내가 이미 그의 논의를 들으려고 하였으므로 곧 운헌(雲軒)이라고 이름을 지은 뜻에 대해 묻기를, “공은 어찌 색(色)ㆍ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의 장애를 받아..

[고전산문] 도(道)와 문(文)은 구별해야 한다 / 유한준

사마천․반고(사마천은 사기, 반고는 한서, 즉 공통점은 역사서를 저술하였다)의 학문이 정자․주자(정희와 주희,유교에서 성리학을 완성시킨 학자)만 못한 것은 어린애도 알고 있습니다. 학문으로 따지자면 사마천․반고의 문장이 의당 지극하지 못해야 마땅할 듯하지만, 문장으로 따지자면 오히려 정자․주자의 윗 자리에 있습니다. 정자․주자는 심오한 경지에 이른 자신들의 학문을 가지고도 문장에 있어서 만큼은, 사마천․반고의 아래 자리로 밀려나온 것은 과연 무엇 때문입니까? 만일 정자․주자의 문장이 사마천․반고의 문장만 못하다고 여겨 그들의 도(道)가 지극하지 못할 것이라고 의심한다면, 천하에 그러한 이치란 없습니다. 만약 사마천․반고의 문장이 도(道)에서 이탈한 것이라 생각하여 문장의 모범으로 삼을 수 없다고 말한다면..

[고전산문] 사람이 그 아는 바를 능히 행할 수 있다면 / 홍대용

영남(嶺南, 경상도 지역)은 본디 동국(東國)의 관민(關閩, 송대의 관중과 민중 지역을 가리킴, 즉 학문이 융성한 곳)이라 일컫는다. 회재(晦齋, 이언적)와 퇴도(退陶, 이황)가 앞서 인도하고, 한강(寒岡, 정구)과 여헌(旅軒, 장현광)이 뒤에 잇달았으니, 염락(濂洛, 염계와 낙양으로 도학(道學 성리학)의 근원지, 즉 저명한 성리학자들이 많이 살던 곳)의 시절이 이때에 융성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김우옹(金宇顒)과 정인홍(鄭仁弘)이 앞서 변고를 일으키고 정희량(鄭希亮)과 이인좌(李麟佐)가 뒤에 난리를 일으켰으니, 어진 이와 정직한 자를 모해(꾀를 써서 남을 모함하여 해를 끼침)하는 의론과 하늘을 욕하고 해를 꾸짖는 무리들이 잇달아 일어났다. 그러므로 빙 둘러있는 72주(州)가 이적(오랑캐)ㆍ금수..

[고전산문] 척하는 것을 경계하고 삼가한다 / 김정희

나는 《역(易), 주역》을 읽고서 건(乾) 구삼(九三)의 의(義)*에 깊이 느낌이 있어 나의 거실의 편액을 ‘척암(惕庵, 두려워할 척, 암자 암)’이라 했다. 김진항(金鎭恒)이라는 자가 있어 지나다가 보고 물으며 말하기를, “거룩하옵니다. 척(惕)의 의(義)야말로. 선생은 대인이시니 장차 대인의 덕(德)에 나아가서 업을 닦으시려니와. 진항은 소인이오라 겸(謙)에서 취한 바 있사오니, 그 산은 높고 땅은 낮은데 마침내 굽히어 아래에 그쳤음을 위해서 이옵니다. 그래서 제 실(室, 거실)을 ‘겸겸(謙謙)’이라 이름하였으니 원컨대 선생은 가르침을 내려주소서.”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그럴상해도 이는 겸이 아니다. 네가 먼저 하나의 높은 의상(意想, 뜻과 생각)을 일으켜 놓고, 다시 하나의 낮은 형체를 마련하고..

[고전산문] 나라의 세 도적(三賊) / 심익운

나라에는 세 부류의 도적(盜賊)이 있다. 이는 곧 백성의 재앙이다. 나라에 세 부류의 도적이 횡행함은 나라가 잘못되어 있음을 알리는 표식이다. 임금된 이가 세 도적을 살펴서 제거하면 나라가 창성할 것이요, 세 도적이 제거되지 않고 그 무리의 영향력이 청산되지 않으면 나라가 필시 멸망할 것이다. 무엇을 일러 세 부류의 도적(盜賊)이라고 하는가? 재능과 역량(才力)은 벼슬을 맡기에 부족하고, 명예는 향당(鄕黨, 태어나고 자란 지방이나 마을)에 일컬어지기에 부족한데도, 한갓 일가 무리(種族)의 강성함과 가문의 재력과 세력(世家巨室)의 중함을 등에 업고 위엄을 부리고 기세를 올리며, 백성들을 약탈하고 착취해도, 고을을 다스리는 현령이 감히 힐난하지 못하고, 고을이 속한 지방 전체를 다스리는 방백(관찰사)이 감히..

[고전산문] 아는 만큼 보인다 / 유한준

그림은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 아끼는 사람, 보는 사람, 소장하는 사람이 있다. 중국 동진(東晉)의 고개지(顧愷之)의 그림을 부엌에 걸거나, 왕애(王涯)의 그림을 벽에다 꾸미는 것은 오직 소장한 것일 뿐, 단지 소장한 것만으로는 능히 그 그림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설령 본다 해도 어린애가 보는 것과 비슷하다. 그림을 보며 입을 벌리고 흐뭇해 하지만, 붉고 푸른 색깔 외에 다른 것은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은 능히 그 그림을 아끼고 사랑할 수가 없다. 설령 사랑하고 아낀다 해도 오직 붓과 종이의 색깔만 가지고 취하는 사람, 또는 그림의 형상과 배치만 가지고 구하는 사람은 능히 그 그림을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다. 그림을 알아보는 사람은 외형이나 법도 같은 것은 잠시 접어두고, 먼저 오묘한 이치와 아득한 조..

[고전산문] 글을 짓는 방법 3가지 / 심익운

글(文)을 짓는 방법은 대략 세 가지가 있다. 도(道)와 법(法)과 신(神)이다. 도(道)는 본체며, 신(神)은 작용이고, 법(法)은 그 틀(器)이다. 이것을 사람의 몸에 비유하자면, 도(道)는 그 사람됨의 근본이다. 법(法)은 눈·코·입·귀·몸 등등처럼 바꿀수 없는 것이며, 신(神, 정신)은 그 지각운동의 영민함(정신활동, 즉 생각하고 느끼고 반응하는 일체의 정신활동)이다. 그러므로 도(道)로써 그 학문의 근본을 세우고, 법(法)으로써 그 바탕을 바르게 하며, 신(神)으로써 깨달음을 오묘하게 하는 것이다. 도(道)는 항상 주(主, 주인, 근본)가 되고, 법(法)과 신(神)은 서로 번갈아 그 뒤를 따르기에, 그로부터 기(奇, 독특함, 즉 독창성 혹은 창의성을 뜻함)와 정(正, 누구가 다 아는 원칙으로서의..

[고전산문] 중도(中道)는 일을 합당하게 처리하는 것 / 기대승

(상략) 근래에는 대소의 일에 대해 말하는 자가 있으면 과격하다고 하면서 중도(中道)를 얻어야 한다고 합니다. 아랫사람들이 어찌 중도(中道)를 배우고 싶지 않겠습니까마는 ‘중(中)’ 자는 가장 알기 어렵습니다.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똑같이 대해 주는 것이 중도가 아니고 선을 드러내고 악을 막는 것이 바로 중도(中道)입니다.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모두 거두어 함께 기르려고 하면 이것은 자막(子莫)의 집중(執中)*입니다. 도에 귀중한 것은 중도(中道)이고 중도에 귀중한 것은 권도(權道)입니다. 한 자 되는 나무를 가지고 말한다면 다섯 치가 중(中)이 되지만, 하나는 가볍고 하나는 무거운 물건을 가지고 말한다면 물건에 알맞은 것이 중도가 됩니다. 모든 일을 과격하게(냉정하고 엄격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