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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산문] 비록 초라하게 살지라도 / 이가환

만약 현실에서 마주하는 '이것(是, 여기에선 '상황' '처지'를 특정하고 있음, '거시기')’을 능히 즐길 수 있다면, 비록 달팽이집처럼 작고 누추한 집에 살고, 새끼줄 띠를 두른 허름한 옷을 입고, 부스러기 쌀 하나 들어있지 않은 초라한 나물국을 먹더라도 모두 다 즐거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능히 ‘이것(是)’을 즐길 수 없다면, 무기고와 같은 넓은 터에 튼튼하게 벽을 쌓아 큰 집을 짓고,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날마다 온갖 맛있는 음식을 갖추어 먹는 부유하고 풍요로운 상황에 처할지라도 오히려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고 부족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이 집의 주인은 비록 두어 칸 밖에 안 되는 보잘 것 없는 집이라도 비바람을 가릴 수 있으면 족하고, 비록 삼베와 갈포로 만든 옷일지라도 추위와 더위를 막..

[고전산문] 역사서를 읽는 방법 / 이이

○ 《사기(史記), 여기선 역사의 기록, 즉 역사서를 말함, 이하 '역사서'로 대체》를 읽으면, 모름지기 치란(治亂)의 기틀과 현인 군자의 출처(出處)와 진퇴(進退)를 보아야 할 것이니, 이것이 곧 격물(格物, 사물의 이치와 도리를 헤아려 규명함)이다. 《정씨유서(程氏遺書)》 ○ 이천(伊川) 선생의 말씀이다. 정자가 말하기를, “대개 역사서를 읽을 때에는 한갓 사적(事迹)만 기억할 것이 아니라 그 치란(治亂)과 안위(安危)와 흥폐(興廢)와 존망(存亡)의 이치를 알아야 한다. 또 〈한고조 본기(漢高祖本紀)〉를 읽는다면 한나라 4백 년의 시종(始終)과 치란이 어떠하였던가를 알아야 할 것이니, 이것 역시 배우는 것이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나는 역사서를 읽을 때마다 반쯤 읽으면 곧 책을 덮고 생각하..

[고전산문] 역사 인물의 평가 기준 / 기대승

대답하겠습니다. 천지 사이의 한 유생(儒生,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으로 만고의 일을 두루 살펴보매 한스럽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고인의 자취를 상상하고 전현(前賢, 옛 현인)의 뜻을 추구하여, 높은 난간에 기대고 경침(警枕, 공처럼 둥글게 깍아 만든 나무 베게 )*에서 잠을 깨는 회포를 한번 시원하게 펴 보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집사 선생께서 시장(試場, 시험장)에 책문(策問)을 내시되 특히 "고인(옛 사람)의 은현(隱見, 드러나지 않은 것과 드러난 것)과 지업(志業, 뜻을 세워 그것을 이루고자 한 일)의 서로 다른 점"을 들어서 물으셨습니다. 어리석은 소생은 청하건대 그 밝게 물어 주신 질문 가운데 이른바 ‘마음가짐과 일을 행한 자취(處心行事之跡)’ 의 뜻을 통해 말씀드리겠습니다. ..

[고전산문] 오직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이어야 알 수 있는 것 / 이익

사광(師曠 춘추시대 진(晉)의 악사(樂師))이 진 평공(晉平公)에게, “어려서 학문을 좋아하는 것은 해가 돋아오를 때의 햇빛 같고, 장성하여 학문을 좋아하는 것은 해가 중천에 오를 때의 햇빛과 같으며, 늙어서 학문을 좋아하는 것은 켜놓은 촛불의 빛과 같다.” 하였으니, 이 말은 무엇을 두고 한 말인가? 오직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이어야 알 수 있는 것이다. 학문이란 사색(思索)하는 것만 같은 것이 없고, 얻음이란 책만한 것이 없으니, 사색하여도 얻지 못하면 오직 책이 스승이 되는 것이다. 밤에 사색하여 얻지 못하였을 때에는 분ㆍ비(憤悱, 마땅히 표현을 어떻게 할 수 없어 고심하며 안타까워하고 한탄함 )하다가, 해가 돋은 뒤에 책을 대하면 그 즐거움이 어떠함을 알 수 있을 것이고, 낮에 얻지 못하였을 때에는..

[고전산문] 껍데기에서 나를 찾아 본들 / 박지원

영처자(嬰處子 이덕무(李德懋) )가 당(堂)을 짓고서 그 이름을 선귤당(蟬橘堂)이라고 하였다. 그의 벗 중에 한 사람이 이렇게 비웃었다. “그대는 왜 어지럽게도 호(號)가 많은가. 옛날에 열경(悅卿, 김시습)이 부처 앞에서 참회를 하고 불법을 닦겠다고 크게 맹세를 하면서 속명(俗名)을 버리고 법호(法號)를 따를 것을 원하니, 대사(大師)가 손뼉을 치고 웃으면서 열경더러 이렇게 말을 했네. ‘심하도다, 너의 미혹됨이여. 너는 아직도 이름을 좋아하는구나. 중(승려)이란 육체가 마른 나무와 같으니 목비구(木比丘)라 부르고 마음이 식은 재와 같으니 회두타(灰頭陀, 행각승)라 부르려무나. 산이 높고 물이 깊은 이곳에서 이름은 있어 어디에 쓰겠느냐. 너는 네 육체를 돌아보아라. 이름이 어디에 붙어 있느냐? 너에게 ..

[고전산문] 변할 수 없는 것 / 이덕무

사람이란 변할 수 있는 것일까? 변할 수 있는 것이 있고 변할 수 없는 것도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어려서부터 장난을 하지 않고 망령되고 허탄하지 않으며 성실하고 삼가며 단정하고 정성스러웠는데, 자라서 어떤 사람이 권하여 말하기를, “너는 세속과 화합하지 못하니 세속에서 너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하므로 그도 그렇게 생각하여, 입으로는 저속하고 상스러운 이야기를 하고, 몸으로는 경망하고 부화(浮華, 실속없이 겉치레를 화려하게 꾸미는 것)한 일을 행하였다. 이와 같이 하기를 3일쯤 하고는 축연(蹙然)히(문득) 기쁘지 않아서 말하기를, “내 마음은 변할 수 없다. 3일 전에는 내 마음이 든든한 듯하더니 3일 후에는 마음이 텅 빈 것 같다.” 하고는 드디어 처음으로 되돌아갔다. 이욕을 말하면 기운이 없어..

[고전산문] 부끄러움을 아는 것 / 이언적

군자가 지녀야 할 도리 중에서 귀한 것은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다. 내면을 살피고 헤아려서 마침내 잘못이 없어야 비로소 마음에 부끄러움 없다고 능히 말할 수 있다. 아무도 없는 방에 홀로 있을 때부터 천지간의 일들에 이르기까지 잘못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누가 보든 말든 듣든 말든 상관없이 오직 한결같이 스스로 삼가하여 어디에도 잘못으로 인한 부끄러움이 없어진다면, 비로소 중심을 잡고 뭇 사람들 가운데 의젓하게 우뚝 서서 오직 사람된 도리(道)에 의지한다 자신할 수 있을 것이다. 불행히도 허물과 실수가 쉽게 알아차릴 수 없는 모호한 상태에 놓이게 되면, 마치 흰 종이에 찍힌 점 하나와 같아서 비록 그리 흠이 되지 않을 듯해도, 마침내 그 점 하나가 드러남으로 인하여 그 마음의 ..

[고전산문] 사람을 헤아리는데에 조심해야 할 것 / 최한기

바르지 못한 믿음과 부당한 의심​측인(測人, 사람을 살피고 헤아림)함에 있어 엄히 조심할 것이 있으니, 의심하지 않을 사람을 의심하고 믿지 못할 사람을 믿는 것이다. 이것은 전에 들은 기괴(奇怪)한 말을 자기 혼자만 아는 기밀로 자부한 데서 생기는 것이니, 이런 자들은 의거하는 것이 허무한 방술(方術, 방법과 기술)이고 찾는 것이 음사(陰邪, 음흉하고 사악함)한 묘맥(苗脈, 일의 실마리 또는 단서)이다. 광명(光明)한 대업(大業)과 경상(經常, 변함없이 일정함)의 인도(人道, 사람의 도리)가 이런 사람을 만나면 무너지니, 사람을 속여서 물건을 취하고 사람을 암흑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것이 이들의 능사이다. 재색(財色, 재물과 여색)ㆍ과환(科宦, 과거시험에 합격한 벼슬아치)에는 부정한 방법으로 추구하여 서..

[고전산문] 바르게 서야할 근본 세 가지 / 신흠

예의와 법도는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지만 먼저 할 바는 아니고 형명(刑名)과 비상(比詳)*은 정사(政事, 정치, 나라와 백성을 다스림)에서 나온 것이지만 힘쓸 바는 아니고 삼군(三軍)과 오병(五兵 5종의병기)은 법률에서 나온 것이지만 긴요한 것은 아니고 돈ㆍ비단ㆍ곡식은 용도에 필요하지만 급한 것은 아니다. 예의와 법도일 뿐이라고 한다면 두 손을 잡고 꿇어 앉는 것으로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이며, 형명과 비상일 뿐이라고 한다면 수갑과 형틀로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이며, 삼군 오병일 뿐이라고 한다면 긴 창과 큰 칼로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이며, 돈ㆍ비단ㆍ곡식일 뿐이라고 한다면 말ㆍ휘ㆍ저울로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이니, 이 네 가지는 끝이지 근본이 아니며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섬기는 바이지 ..

[고전산문] 입언(立言)을 배우고자 한다면 / 유몽인

만약 옛날의 이른바 '입언(立言)'*이라는 것을 배우고자 한다면, 거기에는 어떤 묘리가 있다. 내가 보기에 한나라 시대의 사람(漢人)으로 삼대(三代, 중국 고대 왕조시대, 하(夏)·상(商)·주(周))를 배운 자는 삼대(三代)가 될 수 없고, 단지 한나라 시대의 사람(漢人)일 따름이다. 송나라 시대의 사람(宋人)으로 한퇴지(한유)를 배운 자는 한퇴지가 될 수 없고, 오로지 송나라 시대의 사람(宋人)일 뿐이다. 이에 나는 고인(古人, 옛 현인의 사상과 문장)을 배우고자 한다면 앞서 고인(古人)이 배운 바를 먼저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경(西京, 한나라 수나라 당나라의 도읍지인 장안, 즉 한, 수, 당 시대)의 문장을 하고자 한다면, 먼저 그 시대의 현인들이 배우고 익힌 바의 육경(六經)과 『좌전』․『국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