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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산문] 내게 달린 것에 최선을 다할 뿐 / 홍석주

모계위(茅季韋, 밭을 갈며 생활했다는 高士, 포박자외편에 나온다)가 한 여름에 들에 나가 김을 매다가 틈이 나자 밭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었다. 밭두둑 사이에 그늘이 좋은 큰 나무가 있었는데, 아침에 그늘이 서쪽으로 지면 사람들이 앞다투어 그 아래로 가고, 얼마 뒤에 해를 따라 그늘이 동편으로 옮겨가면, 모두들 떠들썩하게 동편으로 몰려갔다. 뒤처져 온 이들 중에는 자리다툼에 신발을 잃거나 발꿈치를 상한 자도 계속 이어졌다. 그러던 와중에 그늘에 다닥다닥 모여 앉은 자들이 들판에 홀로 우두커니 서 있는 모계위(茅季韋)를 일제히 바라다보았다. 그러다가 한 사람이 모계위에게 말하기를, “저번에 그대는 동편에 홀로 서 있더니 이제 서편에 홀로 서 있다. 군자라고 자부하는 이가 어찌 그리도 지조가 없는가?” 이 ..

[고전산문] 타인이 행한 일에서 선한 점을 인정하는 기준 / 홍석주

그 마음이 옳으면 행여 그 말이 잘못되었더라도, 군자는 그 마음을 보아 그 말을 용서해 준다. 비록 그 마음이 그릇되었다할지라도 그 말이 옳으면, 군자는 그 말을 취할 따름이다. 이것이 군자가 타인이 행한 일에서 선한 점을 인정하는 기준이다(此君子所以與人爲善也차군자소이여인위선야, 옮긴이 註: 그래서 논어에 군자는 긍지를 지니면서도 다투지 않고 두루 섞이어 조화를 이루되 패거리를 이루거나 편을 가르지 않고, 너그럽고 태연하며 교만하지 않다고 특정한다. 군자와 달리 소인은 그렇지 않다, 그 반대다. 옛 선진들은 소인중에서도 특히 그속을 드러내지 않는 용렬한 소인을 가장 경계하였다.). 한 나라 원제(元帝)가 풍야왕(馮野王)을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삼고자 하여 석현(石顯; 한 원제 때의 환관, 내시)에게 물어..

[고전산문] 무명변(無命辯) / 홍석주

그렇게 해야 할 것이 그렇게 되는 것은 의(義)이고, 그렇게 하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되는 것은 명(命)이다. 성인(聖人)은 의를 말미암는데 명이 그 가운데 있고, 군자는 의로써 명에 순종하고, 보통 사람 이상은 명으로써 의를 단정하고, 중인 이하는 명(命)을 알지도 못하고 그 의도 잊어버리고 있다. 이 때문에 명을 알지 못하고서 의에 편안할 수 있는 자는 드물고, 의에 통달하지 못하고서 명에 편안할 수 있는 자는 없다. 그러나 명(命)은 말을 하지 않을 때가 있으나, 의는 어디를 가나 행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효로써 어버이를 섬기면서 그 명은 따지지 않고, 충(忠)으로써 임금을 섬기면서 그 명은 따지지 않고, 경(敬)으로써 자기 몸을 닦으면서 그 명은 따지지 않고, 부지런히 행실을 닦으며 그 명..

[고전산문] 용(庸)이라는 글자에 담긴 '한결같음'의 의미/ 홍석주

용(庸, 떳떳할 용, 쓸 용)과 구(久, 오랠 구)는, '언제나 일정하여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공히 가지고 있다. 이는 그 속성이 변함없이 '한결같음'(常, 항상 상, 떳떳할 상)을 뜻한다. 한결같음(常)의 속성이 바탕이 되어야 오래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오래감' (久)의 뜻(訓)이 비로소 통한다. 주역(周易)에 “한결같이 떳떳한 덕(庸德)을 행하고, 한결같이 떳떳한 말(庸言)하기를 힘써 조심하라"(庸德之行 庸言之謹)”는 가르침이 이와 같다. 그래서 공자(孔子)는 “중용(中庸)의 덕은 지극하고도 지극하도다"(中庸之爲德也 其至矣乎)라고 하셨다. 용(庸)이 '한결같음(常)'의 뜻을 가졌다는 데에는 다른 논의가 있을 수 없다. 천하 만물을 담고 품어서 태어나 자라게 하는 것은 천지(天地) 대자연의 '한..

[고전산문]정성을 다하여 할말을 분명하게 하되 애매모호하게 해서는 안된다

연와(然窩, 매천의 고모부 최우정(崔遇禎)의 호) 주인은 자신의 움집 이름을 ‘연(然)’으로 명명(命名)한 지 30년이 되었다. 오랫동안 그에 대한 기(記, 옛 문체의 한 형식으로, 어떤 내용의 쓰임에 대한 이유와 배경을 설명한 글)가 없었는데, 늘그막에 그는 스스로 의문을 품기를, ‘움집〔窩 움집 '와'〕이라 한 것은 내가 본래 그렇게 여겨서이지만, 사람들도 기꺼이 그렇게 여길까? 하나라도 그렇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나오면, 장차 따져 묻기를, 「주인이 연(然)이라 한 것은 그런 것을 그렇다고 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렇지 않은 것을 그렇다고 하는 것인가? 내가 그렇게 여기기에 남도 그렇게 여기리라 단정하는 것인가?, 아니면 남이 그렇게 여기기에 나도 그렇게 여기고자 하는 것인가? 나는 그렇게 여기지 ..

[고전산문] 시속(時俗)에 아첨하거나 침묵하는 것은 그르다

일은 군자가 행한 것이라고 해서 다 옳다고 할 수는 없으며, 성현(聖賢)이 논정(論定, 토론하여 사물의 옳고 그름을 결정함)한 것이라 해도 다 맞다고 할 수 없다. 대체로 일은 그때그때 벌어지므로 성인이 아니면 진선(盡善, 선을 다함, 온전한 선)할 수 없으며, 그게 지난 일이 되고 나서야 말깨나 하는 선비들도 다 판단을 내릴 수 있다. 그렇기에 종종 그 속내를 따져 보고 그 일을 들추어내어 자초지종을 규명한 뒤에 힘써 최고 극치의 이론(理論)을 펼쳐 옛사람이 다시 살아나도 참견하거나 변명할 수 없을 정도가 되면, 후세의 선비가 어떤 이의 성공과 실패를 상고하여 논했더라도, 그 말이 성현에게서 나오지 않았다 하여 다 그르게 여길 수는 없으리라. 나는 《맹자(孟子)》를 읽으면서 백리해(百里奚)의 일을 논한..

[고전산문] 글의 요체는 얽매이지 말되 그 진정한 의미를 추구하여 깨닫는 것

(상략)삼가 생각건대, 문학(文學)이란 분야는 무엇보다 풍기(風氣,작가가 생존했던 당대의 조류와 역사적 조건, 즉 그 시대의 정치 현실과 역사적 상황)와 밀접한 관련이 있어 고금(古今)의 경계(境界)가 매우 분명합니다. 역대의 추앙받는 걸출한 작가들 중에서 한번 살펴봅시다. 이백(李白)이나 두보(杜甫)의 경우도 각각 그 상황에서 나름의 글을 지었기에 한(漢)나라나 위(魏)나라의 글이라고 해서는 안 되며, 한유(韓愈)와 유종원(柳宗元)도 각각 그 상황에서 나름의 글을 지었기에 사마천(司馬遷)이나 반고(班固)의 글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따져 보면 이백, 두보, 한유, 유종원이 그 당시에 어찌 옛글에서 법(法)을 취하지 않았겠습니까만, 결국에는 자신의 시와 문을 지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된 것은 하..

[고전산문] 뜻은 추구하되 그 행적에 얽매이지는 않는다

성인(聖人)은 배워서 같아질 수 있는가? 배울 수는 있어도 같아질 수는 없다. 만약에 배워서 모두 꼭 같아지려고 한다면 장차 그 가식(假飾 속마음과 달리 언행을 거짓으로 꾸밈)을 금할 길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제대로 배우는 사람은 성인의 본뜻을 구하지 그 행적에는 얽매이지 않는데, 또 어찌 같아지기를 일삼겠는가. 성인을 건성으로 존모하여 멍청하게 그 행적에만 구애된다면 자지(子之)*도 요순(堯舜)과 같아질 수 있으며, 조조(曹操)도 문왕(文王)과 같아질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서로 가식으로 이끄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큰 혼란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중인(衆人)은 성인과 같아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비록 성인으로서 성인을 배우더라도 같아지기를 추구하지 않는 법이다.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은..

[고전산문] 정부공사 총감독관 강복구(姜福九)씨

(상략) 관직매도가 시작될 때에는 시골 사람들이 재산을 바치고라도 출세를 원했지만, 오랜 시일이 지난 후에는 자주 좋지 않은 일을 보았기 때문에 서로 싫어하였다. 이에 부랑배들은 서울과 시골을 오가며 집안을 망치려고 하고 혹은 그로 인한 이익을 노려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강제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관문으로 독촉하는 사례가 매우 엄하였으므로 지방관들은 자기의 상납이 늦을까 두려워서 늑탈한 것에다가 또 자기 재산을 더하여 충당하였다. 이것을 벼락감투(별악감투)라고 한다. 우리말로 풀면 벽력을 벼락(별악)이라 하고, 관리의 모자를 감투(감투)라고 한다. 이것은 한 번 관직에 임명되면 가산을 탕진하는 것이 벼락을 맞은 것과 같다는 것이다. (중략) 호서의 어느 강변에 강(姜)씨라는 늙은 과부가 살고 있었..

[고전산문] 속물근성(俗氣)을 치유하는 것은 오직 책밖에 없다

모든 병을 고칠 수 있으나 속기(俗氣 세상시류에 쉽게 요동하고 영합하는 조잡하고 속물적인 기운 또는 마음)만은 치유할 수 없다. 속기를 치유하는 것은 오직 책밖에 없다. 현실 생활과는 거리가 있어도 의기(義氣)가 드높은 친구를 만나면 속물 근성을 떨어버릴 수가 있고, 두루 통달한 친구를 만나면 부분에 치우친 성벽(性癖)을 깨뜨릴 수가 있고, 학문에 박식한 친구를 만나면 고루함을 계몽받을 수 있고, 높이 광달(曠達)한 친구를 만나면 타락한 속기(俗氣)를 떨쳐 버릴 수가 있고, 차분하게 안정된 친구를 만나면 성급하고 경망스러운 성격을 제어할 수 있고, 담담하게 유유자적하는 친구를 만나면 화사한 쪽으로 치달리려는 마음을 해소시킬 수가 있다. 명예심을 극복하지 못했을 때에는 처자의 앞에서도 뽐내는 기색이 드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