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포저 조익

[고전산문] 폐단을 구제하는 도리

優拙堂 2017. 12. 30. 13:21

(상략)무릇 폐단을 구제하는 도리로 말하면, 마치 의자(醫者)가 병을 치료할 때에 반드시 그 병근(病根)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찾아서 먼저 병마가 침노한 근본을 치료하고 병이 생기게 된 원인을 막은 뒤에 당시에 앓고 있는 증세를 치료해야만 병을 없앨 수 있고 나아가 몸의 기운을 완전히 회복시킬 수 있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대저 군역(軍役)을 감당할 수 없게 되는 이유는 군인(軍人)의 숫자가 원래 적기 때문입니다. 군역은 모두 양인(良人)이 부담하는데, 옛날에는 양인의 숫자가 많지 않은 것이 아니었습니다마는, 지금에 와서는 양인이 매우 적어져서 읍(邑)마다 거주하는 백성 가운데 공천(公賤)과 사천(私賤)이 열에 팔 구를 차지하고 양인은 열에 하나나 둘밖에 없는 실정입니다. 지금 매우 적기만 한 군인을 가지고 옛날부터 정해져 내려오는 원래의 군역을 감당하게 하고 있으니, 그 부담이 어찌 무겁고 고달프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군인의 숫자가 점차 감소하는 데 따라 그 부담은 점차 고통스러워지고 그 부담이 날로 고통스러워짐에 따라 그 숫자가 날로 감축되는 것은 형세로 볼 때에 원래 당연한 일이라고도 하겠습니다.


따라서 지금 이러한 폐단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양인의 숫자가 불어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법을 보면 양인과 천인(賤人)이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으면 모두 천인이 되게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양인이고 어머니가 천인일 경우에 어머니를 따라서 천인이 되게 해 놓고는, 아버지가 천인이고 어머니가 양인일 경우에도 어머니를 따라서 양인이 되지 못하고 역시 천인이 되게 하고 있으니, 어쩌면 이렇게도 천인에게는 후하게 하고 양인에게는 박하게 하고 있단 말입니까. 이 법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필시 그 당시에 재상(宰相)과 조사(朝士)들이 천지의 대공(大公)한 도리는 생각하지 않고서 단지 자기 노비(奴婢)들의 숫자가 불어나는 것만을 이롭게 여겨서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이는 너무나도 공정하지 못한 것으로서, '불인(不仁)한 측면으로 볼 때 나무인형을 만들어 순장(殉葬)한 것보다도 더 심하다'고 할 것입니다.


**번역자 註:《맹자(孟子)》 양혜왕 상(梁惠王上)에 “처음에 나무인형을 만들어 순장을 한 사람은 후손이 없을 것이라고 공자께서 말씀하셨는데, 이는 그자가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서 썼기 때문이다.〔仲尼曰 始作俑者 其無後乎 爲其象人而用之也〕”라는 말이 나온다. 그런데 구양수(歐陽脩)가 이를 인용하여 당육신전후론(唐六臣傳後論) 서두에서 “아, 처음에 붕당의 의론을 만들어 낸 자는 누구인가? 나무인형을 만들어서 순장한 사람보다도 심하다고 할 것이니, 참으로 불인한 사람이라고 이를 만하다.〔嗚呼 始爲朋黨之論者誰歟 甚乎作俑者也 眞可謂不仁之人哉〕”라고 탄식한 내용이 나온다.


대저 천인인 아버지가 낳은 자식일 경우에는 어머니가 양인이든 천인이든 따지지 않고 모두 천인이 되게 하고 있는데, 양인인 아버지가 낳은 자식일 경우에는 오직 어머니까지도 양인이어야 비로소 양인이 될 수 있으니, 이는 천인이 양인을 병탄(倂呑)하는 것이요 양인은 천인에게 병탄되는 격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 때문에 천인은 날로 불어나는 반면에 양인은 날로 줄어들고 있으니, 세월이 오래 흐를수록 많은 천인은 더욱더 많아지고 적은 양인은 더욱더 적어지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 이 법을 바꾸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수십 년이 지나고 나면, 나라 안에는 온통 천인만 가득할 것이요 양인은 거의 없어지고 겨우 명맥만 유지하게 될 것입니다.


양인의 숫자가 적기 때문에 그 부담이 자연히 매우 고통스럽게 될 수밖에 없는데, 그 부담이 매우 고통스럽기 때문에 양인의 숫자가 또 더욱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대저 양인의 숫자가 본래 적은 상태에서 자식을 낳은 것이 조금이라도 많게 되면 그 자식들이 군대에 충정(充定)되어 부담해야 할 일이 더욱 많아질 것이 염려되기 때문에 마침내는 승려가 되게 하기도 하고, 그 부담을 끝내 견디지 못할 경우에는 또 온 가족이 도망쳐 숨기도 하니, 이렇게 해서 그 숫자가 갈수록 줄어들면서 그 부담을 더더욱 감당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심지어는 족린(族隣)을 침해하기도 하고 영아(嬰兒)를 군대에 충정하기까지도 하는데, 이는 양인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해서 궐액(闕額)을 채울 수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양인도 원래 우리 백성의 한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왕자(王者)로서는 그들을 대할 적에 후박(厚薄)의 차이가 있게 해서는 안 될 것인데, 태어날 때부터 그들의 신분을 나누어 소속시킬 적에 불균등하게 한 것만도 벌써 그들을 도외시한 것이니, 이는 일시(一視)하는 도리가 못 되는 것입니다. 저 양인들이 유독 무슨 죄가 있단 말입니까. 군대에 징발당하는 부담이 지극히 무거운 것으로 말하면 마치 물과 불 속에 들어 있는 고통과 같다고 할 것이요, 부자(父子)가 서로 이별한 채 승려가 되는 것이나 가업(家業)을 잃고서 떠돌아다니는 것으로 말하면 궁박한 처지가 극에 달했다고 할 것입니다. 왕자가 세상을 다스리는 도리로 볼 때에 어찌 이 백성들로 하여금 이런 극도의 고통을 당하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비단 왕자뿐만이 아니라 당시에 왕자를 보좌하던 신하들이라 하더라도 어찌 이를 보고서 구경만 할 수 있겠습니까. 가령 이윤(伊尹)이 이런 일을 눈으로 보았다면 수치스럽게 느끼는 것이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신이 삼가 이를 구제하기 위한 방도를 일찍이 탐구해 보건대, 전대에서부터 내려오는 불공정한 법제를 마땅히 바꿔야 한다고 삼가 여겼습니다. 지금 이후로 민간에서 태어나는 자들은 일체 어머니 쪽을 따르게 해서, 천녀(賤女)의 소생은 천인이 되게 하고 양녀(良女)의 소생은 양인이 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아버지가 비록 천인이라 할지라도 그 어머니가 양인이면 자식도 양인이 되게 해야 할 것이니, 이렇게 하면 양인의 숫자가 조금씩 불어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낳은 아들이 많이 있다 하더라도 한집안에서 부자간에 군역에 종사하는 자가 3인이 있을 경우에는 나머지 아들들은 군역을 정하지 말고 매년 포목 1필(疋)만 징수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승려가 되는 자들의 숫자도 분명히 조금씩 줄어들 것이요, 그 부담이 조금 수월해지면 떠돌아다니는 지경에 이르지도 않게 될 것이니, 이렇게 해서 10여 년 정도의 세월이 지나고 나면 양인의 숫자가 점진적으로 증가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미 승려로 되어 있는 자가 매우 많으니, 이에 대해서도 변통을 해서 환속(還俗)할 수 있게 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승려가 된 것은 진심으로 불교가 좋아서 그런 것이 아니고 모두가 군역을 피하려고 한 것입니다. 지금 만약 미곡 3석(石)만 바치게 하여 환속을 허락해 주고 군역을 정하지 말도록 하면, 그들 모두가 분명히 즐거워하면서 이를 따를 것입니다. 그들이 승려가 되어 일단 민간에서 떠났고 보면 실제로 있으나 마나 한 존재나 마찬가지라 할 것이요,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정도일 뿐만이 아니라 농민에게 폐를 끼치는 것이 또한 작지 않으니, 한유(韓愈)가 “농사를 짓는 집은 하나인데, 곡식을 먹어 치우는 집은 여섯이다.〔農之家一 而食粟之家六〕”라고 말한 것이 바로 이것을 가리킨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환속시키면 그들을 군역에 편입시키지 않더라도 자연히 농민이 될 것이니 곡식을 생산하는 사람이 자연히 증가할 것이요, 또 민간에 폐를 끼치는 피해가 자연히 감소할 것이니 민간에 유익한 점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자신이 군역을 담당하지 않더라도 장가를 들어서 아들을 낳을 것인 만큼 10여 년 뒤에는 인구가 자연히 불어날 것이니, 이것도 양인을 많이 길러내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입니다.


참으로 이와 같은 몇 가지 방법을 제대로 시행하기만 한다면 양인을 우대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만약 포목을 예전과 같이 그들에게서 징수한다면 그 고통은 여전히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예로부터 국가에서 군사들을 기르는 법이 있다는 말은 들었어도 군사들에게 마구 거두어들인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지금 다른 나라의 경우를 살펴보아도 모두 그러합니다. 그러고 보면 군사들에게 포목을 징수하도록 되어 있는 것은 원래 우리나라 법제상의 잘못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전혀 징수하지 않을 수는 없다 하더라도 만약 예전보다 반절 정도로 줄여 준다면 군병들로서는 그래도 자기 가정을 안정시킬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징수하는 액수가 일단 줄어들면 여러 군영(軍營)과 진보(鎭堡)의 수요를 공급해 주기에 반드시 부족하게 될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별도로 마련해서 지급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속오군(束伍軍)의 제도로 말하면 양인과 천인을 뒤섞어 뽑아서 군대를 이루는 것이니 실로 좋은 법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양인이 뽑힐 경우에는 본역(本役)도 이미 매우 고달픈 데다가 다시 이 군역까지 부담해야 하고, 천인이 뽑힐 경우에는 이미 자기 주인에 대한 부담이 있는 데다가 다시 이 군역까지 부담해야 하는 형편입니다. 따라서 모두 한 몸에 두 가지 부담을 지게 되어 다른 사람에 비하면 그 고통이 갑절이나 심한데, 여기에 또 군복(軍服)과 군기(軍器)까지도 모두 스스로 마련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대저 국가가 변란에 대처하고 환란을 막기 위해서는 오직 이 군병들을 의지해야 하는데, 한갓 침해하는 고통만 안겨 주고 너그럽게 보살펴 주는 은혜는 조금도 없어서 단지 견디지 못하겠다고 원망하는 소리만 들리니, 이렇게 하고서야 어떻게 그들이 윗사람을 가깝게 여기고 어른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환란에 대비하고 국가를 견고하게 하는 방도가 또한 너무도 허술하니, 이들에 대해서는 반드시 후하게 어루만져 주어 그들의 마음을 굳게 단결시킴으로써 위급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의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 군영과 진보의 수요를 보충해 주고 속오군을 후하게 어루만져 주기 위해서는 모두 재정이 확보되어야만 가능한데 이에 대한 재정을 마련해 낼 길이 없습니다. 따라서 특별히 재정을 마련할 계책을 반드시 강구해야만 그 수요에 충당할 수가 있을 것인데, 신이 반복해서 생각한 결과 하나의 계책이 떠올랐습니다. 대개 당(唐) 나라 때에 조용조(租庸調)의 법을 실시해서 몸이 있으면 용(庸)이 있게 하였으니, 이는 육신을 지닌 자는 모두 부담을 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외방(外方)의 각 읍(邑)에 있는 품관(品官)의 서얼(庶孼)들 중에는 부담을 지지 않는 자들이 매우 많으니, 이 사람들에게 모두 포목 1필씩을 징수하면 될 것입니다. 이는 예전에 있지 않았던 일인 만큼, 많이 징수하면 원망을 사게 되겠지만 1필 정도만 징수한다면 필시 원망까지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향읍(鄕邑)의 사람들에게만 징수한다면 이들이 필시 치욕스럽게 생각하면서 원망하겠지만, 만약 삼공(三公) 이하 백관들 모두에게 포목을 내게 하고, 또 유생(儒生)이나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들에게도 내게 한다면, 포목을 내는 자들 자신이 치욕으로 여기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징수하는 액수가 분명히 많아질 것이니, 군영과 진보에 보태 줄 수도 있고 속오군에게 지급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혹자는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이와 같이 해서 군인들을 여유 있게 해 주는 것은 좋지만,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예전에 행하지 않던 징수를 행하는 것이 타당한가.”라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마는, 이것은 바로 환란을 당해서 서로 구해 주는 도리를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군인들 모두가 현재 도탄(塗炭)의 고통 속에 빠져 있는데, 그래도 고통을 받지 않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각자 힘을 보태어서 구해 주는 것이 어째서 안 된단 말입니까. 


가령 열 집이 사는 마을에서 두 집이 고통을 받고 있고 여덟 집이 걱정 없이 살고 있다면, 어떻게 그냥 방관만 하면서 구해 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농민은 재물과 곡식을 내어서 군병을 길러 주고 군병은 목숨을 바쳐서 농민을 보호해 주는 것이야말로 원래 서로 돕고 사는 도리라고 할 것입니다. 다만 그중에 궁핍하여 굶는 정도가 심한 나머지 조석의 끼니도 제대로 잇지 못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모두 아는 그런 자에 대해서는 당연히 면제해 주고 징수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혹자는 또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조정의 재상과 백관들까지 포목을 내게 하다니, 이것은 또 무슨 의리인가.”라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마는, 이것은 대개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으로서, 그렇게 하는 의리도 원래 있다고 할 것입니다. 


《주역(周易)》에 아래를 덜어서 위를 보태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또 위를 덜어서 아래를 보태 주는 경우도 있는데, 그 단사(彖辭)에 “위에서 아래로 내려 주니 그 도가 크게 빛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옛날에 봄에는 밭갈이가 잘 되었는지 살펴보고서 부족한 것이 있으면 보충해 주고, 가을에는 수확이 잘 되었는지 살펴보고서 부족한 것이 있으면 도와주었는데〔春省耕而補不足 秋省斂而助不給〕, 이 모두가 국가의 창고를 열어서 백성들을 도와준 것이었습니다. 


정(鄭) 나라 자피(子皮)가 기민(飢民)을 진휼(賑恤)할 적에 공족(公族)과 귀경(貴卿) 이하에게 모두 곡식을 내놓게 하였고, 이동(李同)은 평원군(平原君)을 설득하여 기물(器物)과 종경(鍾磬) 등을 모두 흩어서 전사(戰士)에게 주게 하였습니다. 지금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있다면 조정의 경상(卿相) 이하가 모두 구원해 주어야 마땅한데 어째서 안 된다는 말입니까. 전년에 국가에서 품포(品布)와 품은(品銀)을 거둔 적도 있었으니, 그러고 보면 조사(朝士)가 재물을 내는 것도 원래 전례(前例)가 있다고 할 것입니다. 군인이 일단 고통을 받는 일이 없고 또 모두 감격해서 기뻐하기를 이와 같이 한 다음에 다시 훌륭한 장수를 택하여 그 군대를 맡기고는 때에 따라 교련(敎鍊)시켜 모두 정예 군사가 되게 한다면, 누구와 싸운들 승리하지 못할 것이며, 어디를 지킨들 견고하지 않을 것이며, 어떤 적인들 막아내지 못하겠습니까.


신이 구구하게 천박한 생각으로 군제(軍制)를 변통해 보고자 하였는데, 이상이 그 대략적인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또 모름지기 완급(緩急)을 자세히 살피고 증감(增減)을 참작하여 일에 따라 적절히 조처함으로써 조리(條理)와 절목(節目)이 모두 온당하게 될 수 있도록 한 다음에야 미진한 점이 없게 될 것입니다. 


신이 엉성하고 어리석으며 비루하고 졸렬해서 사람들 중에서도 최하위에 속한다고 하겠습니다만, 구구하게 세상을 걱정하는 생각만은 지니고 있기에 일찍이 이 세상의 병폐에 대해서 고민을 해 왔습니다. 그리하여 전역(田役)이 균등하지 못한 폐단과 군인이 고통 속에 빠져 허덕이는 참상과 유생(儒生)이 허위로 강경(講經)하는 폐해를 목격하고는, 오늘날의 병폐 중에서도 이 세 가지보다 더 큰 것은 없으니, 반드시 이 세 가지를 변통해야만 비로소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 수 있을 것이요, 만약 이 세 가지를 예전 그대로 놔둔다면 그 병폐가 장차 날이 갈수록 심각해져서 결국에는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게 되고 말 것이라고 항상 생각하였기 때문에, 구구하게 언제나 이 일을 주장해 왔습니다. 그러다가 외람되게 은총을 입어 과분하게 이 지위에까지 이르게 되었으므로, 혹시라도 시행될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삼가 지니고서 감히 이렇게 의견을 바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삼가 여러 신하들의 의견을 살펴보건대, 그 가부(可否)를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서 단지 저지하고 억누르려고만 애를 쓰고 있습니다. 가령 대동법(大同法)의 시행이나 배강(背講) 제도를 개정하는 것으로 말하면, 그 이해관계가 매우 분명할 뿐더러 시행하는 데에 어려운 점이 없는데도 실현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군역(軍役)을 변통하는 이 일로 말하면 더욱이나 대대적으로 변경하는 일인 만큼 세상에서 불편하게 여기는 자들이 필시 많을 것이니 그들이 듣고서 반드시 크게 놀라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전하께서 비록 신의 의견을 채택하려 하시더라도 여러 신하들이 반드시 별의별 방법을 동원해서 저지하고 억누르려고 애를 쓸 터이니, 필시 시행될 수 없으리라는 것도 신이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이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시행될 수 있으리라고 감히 기대하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전에 이미 심사숙고하고 널리 상의해서 좋은 계책을 얻은 다음에 진달하겠다고 말씀드렸기 때문에, 감히 전하께 다시 이에 대한 의견을 모두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어서입니다. 


그리고 옛날에 한(漢) 나라 가의(賈誼)와 동중서(董仲舒) 등이 진달한 계책들도 모두 당시에는 행해지지 않다가 선제(宣帝) 때에 와서 위상(魏相)이 아뢰어 행해지게 되었으니, 신의 이 계책이 지금은 시행되지 않더라도 뒷날에 위상과 같은 사람이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 전하께서 그 이해관계에 대해서 깊이 살펴보신다면 꼭 행해지지 않으리라고 단정할 수도 없겠기에 만에 하나라도 기대하는 마음이 또한 없지도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굽어 살펴 주소서. 전하의 하교를 기다리겠습니다.


-조익(趙翼, 1579~1655), '군정(軍政)을 변통(變通)하는 일에 대해서 진달하려고 생각했던 차자', 포저집 제13권 차(箚) 12수(十二首)-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2004


**조익은 노비제의 부분폐지를 주장하면서 기득권자들이 그 고통을 함께 분담하자고 제안한다. 조선시대에 노비제의 부당함을 논하며 악법의 부분적 폐지를 주장한 선현들은 유형원뿐만 아니라 꾸준히 제기되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신숙주(1417~1475 국조보감 제28권), 조 익 (1519~1655 포저집 13권), 이경억(1620~1673 서계집 12권 이경억 묘비명), 유수원(1694~1755 우서 제7권)등이 그렇다. 이들의 논조에 깃들인 가치관은 한결같이 평정(平政)애민(愛民,保民)의 정신이 깃들어 있음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