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연암 박지원

마음이 빚어내는 조화

優拙堂 2017. 12. 19. 12:22

하수(강물)는 두 산 틈에서 나와 돌과 부딪쳐 싸우며 그 놀란 파도와 성난 물머리와 우는 여울과 노한 물결과 슬픈 곡조와 원망하는 소리가 굽이쳐 돌면서, 우는 듯, 소리치는 듯, 바쁘게 호령하는 듯, 항상 장성을 깨뜨릴 형세가 있어, 전차(戰車) 만 승(萬乘)과 전기(戰騎) 만 대(萬隊)나 전포(戰砲) 만 가(萬架)와 전고(戰鼓) 만 좌(萬座)로서는 그 무너뜨리고 내뿜는 소리를 족히 형용할 수 없을 것이다.


모래 위에 큰 돌은 흘연(屹然)히 떨어져 섰고, 강 언덕에 버드나무는 어둡고 컴컴하여 물지킴과 하수 귀신이 다투어 나와서 사람을 놀리는 듯한데 좌우의 교리(蛟螭)가 붙들려고 애쓰는 듯싶었다. 혹은 말하기를, “여기는 옛 전쟁터이므로 강물이 저같이 우는 거야.” 하지만 이는 그런 것이 아니니, 강물 소리는 듣기 여하에 달렸을 것이다. 


산중의 내집 문 앞에는 큰 시내가 있어 매양 여름철이 되어 큰비가 한 번 지나가면, 시냇물이 갑자기 불어서 항상 거기(車騎)와 포고(砲鼓)의 소리를 듣게 되어 드디어 귀에 젖어 버렸다. 내가 일찍이 문을 닫고 누워서 소리 종류를 비교해 보니, 깊은 소나무가 퉁소 소리를 내는 것은 듣는 이가 청아한 탓이요, 산이 찢어지고 언덕이 무너지는 듯한 것은 듣는 이가 분노한 탓이요, 뭇 개구리가 다투어 우는 듯한 것은 듣는 이가 교만한 탓이요, 대피리가 수없이 우는 듯한 것은 듣는 이가 노한 탓이요, 천둥과 우레가 급한 듯한 것은 듣는 이가 놀란 탓이요, 찻물이 끓는 듯이 문무(文武)가 겸한 듯한 것은 듣는 이가 취미로운 탓이요, 거문고가 궁(宮)과 우(羽)에 맞는 듯한 것은 듣는 이가 슬픈 탓이요, 종이 창에 바람이 우는 듯한 것은 듣는 이가 의심나는 탓이니, 모두 바르게 듣지 못하고 특히 흉중에 먹은 뜻을 가지고 귀에 들리는 대로 소리를 만든 것이다. 


지금 나는 밤중에 한 강을 아홉 번 건넜다. 강은 새외(塞外)로부터 나와서 장성을 뚫고 유하(楡河)와 조하(潮河)ㆍ황화(黃花)ㆍ진천(鎭川) 등 모든 물과 합쳐 밀운성 밑을 거쳐 백하(白河)가 되었다. 나는 어제 두 번째 배로 백하를 건넜는데, 이것은 하류(下流)였다. 내가 아직 요동에 들어오지 못했을 때 바야흐로 한 여름이라, 뜨거운 볕 밑을 가노라니 홀연 큰 강이 앞에 당하는데 붉은 물결이 산같이 일어나 끝을 볼 수 없으니, 이것은 대개 천리 밖에서 폭우(暴雨)가 온 것이다. 


물을 건널 때는 사람들이 모두 머리를 우러러 하늘을 보는데, 나는 생각하기에 사람들이 머리를 들고 쳐다 보는 것은 하늘에 묵도(黙禱)하는 것인 줄 알았더니 나중에 알고 보니, 물을 건너는 사람들이 물이 돌아 탕탕히 흐르는 것을 보면, 자기 몸은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고, 눈은 강물과 함께 따라 내려가는 것 같아서 갑자기 현기가 나면서 물에 빠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머리를 우러러 보는 것은 하늘에 비는 것이 아니라, 물을 피하여 보지 않으려 함이다. 또한 어느 겨를에 잠깐 동안의 목숨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으랴. 그 위험함이 이와 같으니, 물소리도 듣지 못하고 모두 말하기를, “요동 들은 평평하고 넓기 때문에 물소리가 크게 울지 않는 거야.”


하지만 이것은 물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요하(遼河)가 일찍이 울지 않는 것이 아니라 특히 밤에 건너보지 않은 때문이니, 낮에는 눈으로 물을 볼 수 있으므로 눈이 오로지 위험한 데만 보느라고 도리어 눈이 있는 것을 걱정하는 판인데, 다시 들리는 소리가 있을 것인가. 지금 나는 밤중에 물을 건너는지라 눈으로는 위험한 것을 볼 수 없으니, 위험은 오로지 듣는 데만 있어 바야흐로 귀가 무서워하여 걱정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이제야 도(道)를 알았도다. 마음이 어두운 자는 귀와 눈이 누(累)가 되지 않고, 귀와 눈만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더욱 밝혀져서 병이 되는 것이다.


이제 내 마부가 발을 말굽에 밟혀서 뒷차에 실리었으므로, 나는 드디어 혼자 고삐를 늦추어 강에 띄우고 무릎을 구부려 발을 모으고 안장 위에 앉았으니, 한 번 떨어지면 강이나 물로 땅을 삼고, 물로 옷을 삼으며, 물로 몸을 삼고, 물로 성정을 삼으니, 이제야 내 마음은 한 번 떨어질 것을 판단한 터이므로 내 귓속에 강물소리가 없어지고 무릇 아홉 번 건너는데도 걱정이 없어 의자 위에서 좌와(坐臥)하고 기거(起居)하는 것 같았다. 


옛날 우(禹)는 강을 건너는데, 황룡(黃龍)이 배를 등으로 떠받치니 지극히 위험했으나 사생의 판단이 먼저 마음속에 밝고 보니, 용이거나 지렁이거나 크거나 작거나가 족히 관계될 바 없었다. 


소리와 빛은 외물(外物)이니 외물이 항상 이목에 누가 되어 사람으로 하여금 똑바로 보고 듣는 것을 잃게 하는 것이 이 같거늘, 하물며 인생이 세상을 지나는데 그 험하고 위태로운 것이 강물보다 심하고, 보고 듣는 것이 문득 병이 되는 것임에랴. 


나는 또 우리 산중으로 돌아가 다시 앞 시냇물 소리를 들으면서 이것을 증험해 보고 몸 가지는데 교묘하고 스스로 총명한 것을 자신하는 자에게 경고하는 바이다.


-박지원(朴趾源1737~1805), ' 일야구도하기(一夜九度河記)', 『열하일기 熱河日記/산장잡기(山莊雜記)』-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에필로그(사족):  번역글을 읽다가 이해하기에 애매한 부분이 있어서 염치불구하고 숟가락을 얹는 심정으로 개인적인 사족을 단다. '마음이 어두운 자'로 번역된 한자원문은 '冥心者 명심자'로, '마음이 깊고 고요한 사람'을 의미한다. 즉 정서적으로 마음이 깊이 안정된 사람은 보고 듣는 것 때문에 마음이 흔들려 근심으로 삼지 않고, 반면 信耳目者 신이목자, 즉 귀와 눈에 의지하고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에 따라 마음이 수시로 흔들려 분명하게 인식할 수록 그것이 도리어 근심이 되고 병이 된다는 깨달음으로 이해된다. 


이는 원효대사(元曉大師)가 해골바가지 물을 달게 마신 후의 깨달음, '모든 것은 마음이 빚어내는 조화' 즉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와 그맥락이 통한다."만일 어떤 사람이 삼세(과거,현세, 내세) 일체의 부처를 알고자 한다면(若人欲了知三世一切佛약인욕료지 삼세일체불),마땅히 법계의 본성을 바라보라(應觀法界性 응관법계성 ).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내는 것이다(一切唯心造일체유심조) ." 특히 인간관계에 있어서 변한 것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마음가짐이나 마음의 뜻에 따라 들리는 것도 보이는 것도 다 달라 보인다. 같은 것을 두고 수시로 호불호가 교차하는 것은 자칫하면 놓치기 쉬운 일상의 보편적 경험이라 하겠다. 


여담으로 연암선생의 통찰처럼 이러한 병적인 정동은 세상을 보는 안목을 흐리게 한다. 뿐만 아니라 자기 마음을 괴롭히기도 한다. 일상적인 대인관계를 훼손할 정도로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심할 경우, 현대 정신의학에서는 '경계선 인격장애'가 의심된다. 혹은 드물지만, 이에 더하여 매우 이기적이며 감정의 기복이 지나칠정도로 과장과 극단을 오가며 타인의 관심을 끌어 자기에게만 맞추려한다면 연기성(히스테리성)인격장애에 해당된다. 여기에 자기 반성과 후회가 전혀 없는 양심과 공감의 결여가 특징적으로 덧붙여지면 반사회적 인격장애로 의심한다. 


다만 인격장애는 정상적인 사람도 비정상적인 인격정동의 특성을 가끔 드러내기 때문에 외면적으로는 전문가라도 웬간해선 구별이 안된다. 그래서 단기간이 아닌 장시간을 두고 그 패턴의 일관성과 지속성, 상습적인 관계의 훼손 정도 등을 보고 추정할 뿐이다. 


"생사의 기로, 재물의 있고 없음, 부귀빈천에 처해봐야 비로소 참사람이 누구인지를 안다"는 한(韓)나라 적공의 말이나, "된장과 사람은 오래 두고 봐야 제 맛을 안다"라는 옛 어른들의 말은 빈말이 아니다. 일생에 외물에 구애됨이 없는 정신적으로 건강하며 진실되고 한결같은 사람을 만난다는 것과 스스로 그런 목적적 인간이 되도록 노력하고 마음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천복(天福)임에 틀림없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