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연암 박지원

보이는 바가 너무 멀어도, 너무 가까워도 못보는 것은 마찬가지

優拙堂 2017. 12. 19. 12:24

우연히 야성(野性)을 찬미하다가 스스로를 고라니(麋 큰사슴 미)에 비한 것은 고라니가 사람만 가까이하면 잘 놀라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지 감히 잘난 체해서가 아니었지요. 지금 그대의 편지를 받아 보건대, 스스로를 기마(驥馬) 꼬리에 붙은 파리에 비했으니, 또 어찌 그리 작지요? 진실로 그대가 작게 되기를 구한다면 파리도 오히려 크고말고요. 개미도 있지 않소?


내 일찍이 약산(藥山)에 올라 도읍을 굽어보니 사람들이 달리고 치닫고 하여 땅에 가득 구물대는 것이 마치 개밋둑에 진을 친 개미와 같아서, 한번 불면 능히 흩어질 것만 같았지요. 그러나 다시 그 도읍 사람으로 하여금 나를 바라보게 한다면, 비탈을 더위잡고 바위를 오르고 다래 넝쿨을 움켜쥐고 나무를 타고서 산꼭대기에 올라가서는 망령되이 스스로 높고 큰 양하는 모습이 이(虱)가 머리털을 타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게 있겠소?


그런데 지금 마침내 큰소리치며 스스로 비하기를 고라니라 했으니, 어찌 그리 어리석던지요. 당연히 대방가(大方家 식자(識者), 문장(文章)이나 학술(學術)이 뛰어난 사람)에게 비웃음을 사 마땅한 일이지요. 만약 다시 그 형체의 크고 작고를 비교하고, 보이는 바의 원근을 분별하기로 든다면, 그대나 내가 모두 다 망령된 짓을 할 뿐이지요. 


고라니는 과연 파리보다는 크다지만, 코끼리가 있지 않소? 파리가 과연 고라니보다 작다 하지만, 저 개미에게 견주어 본다면 코끼리와 고라니 사이나 마찬가지이지요. 


지금 저 코끼리가 서면 집채만 하고 걸음은 비바람같이 빠르며, 귀는 구름이 드리운 듯하고 눈은 초승달과 비슷하며, 발가락 사이에 진흙이 봉분같이 솟아 올라, 개미가 그 속에 있으면서 비가 오는지 살펴보고서 싸우려고 나오는데, 이놈이 두 눈을 부릅뜨고 보아도 코끼리를 못 보는 것은 어쩐 일입니까? 보이는 바가 너무 멀기 때문이지요. 


또 코끼리가 한 눈을 찡긋하고 보아도 개미를 보지 못하니, 이는 다름아니라 보이는 바가 너무 가까운 탓이지요. 만약 안목이 좀 큰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백 리의 밖 멀리에서 바라보게 한다면, 어둑어둑 가물가물 아무 것도 보이는 바가 없을 것이니, 어찌 고라니와 파리, 개미와 코끼리를 구별할 수 있겠소?


※[역자주] 

1.고라니〔麋〕 : 고라니처럼 자연 속에서 한적하게 살고 싶어하는 것을 ‘미록지(麋鹿志)’ 또는 ‘미록성(麋鹿性)’이라 한다. 또한 노루처럼 담이 작아 잘 놀라는 것을 ‘균경(麇驚)’이라 한다.

2. 기마(驥馬) 꼬리에 붙은 파리 : 기(驥)는 명마의 이름이다. 《사기(史記)》 권61 백이열전(伯夷列傳)에서 사마천은 “안연(顔淵)이 비록 학문을 독실히 했지만 기마의 꼬리에 붙었기에 그의 행실이 더욱 알려졌다.”고 하였다. 쉬파리가 기마의 꼬리에 붙어 천리를 가듯이, 안연도 공자의 제자가 된 덕분에 후세에 더욱 유명해졌다는 뜻이다.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아무개에게 답함 (答某)', 연암집 제5권/영대정잉묵(映帶亭賸墨)/척독(尺牘)-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