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연암 박지원

목적을 위해 다른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다면

優拙堂 2017. 12. 19. 12:38

아무리 작은 기예(技藝)라 할지라도 다른 것을 잊어버리고 매달려야만 이루어지는 법인데 하물며 큰 도(道)에 있어서랴.


최흥효(崔興孝)는 온 나라에서 글씨를 제일 잘 쓰는 사람이었다. 일찍이 과거에 응시하여 시권(試卷)을 쓰다가 그중에 글자 하나가 왕희지(王羲之)의 서체와 비슷한 것을 발견하고는, 종일토록 들여다보고 앉았다가 차마 그것을 버릴 수가 없어 시권을 품에 품고 돌아왔다. 이쯤 되면 ‘이해득실 따위를 마음속에 두지 않는다’고 이를 만하다.


이징(李澄)이 어릴 때 다락에 올라가 그림을 익히고 있었는데 집에서 그가 있는 곳을 몰라서 사흘 동안 찾다가 마침내 찾아냈다. 부친이 노하여 종아리를 때렸더니 울면서도 떨어진 눈물을 끌어다 새를 그리고 있었다. 이쯤 되면 ‘그림에 온통 빠져서 영욕(榮辱)을 잊어버렸다’고 이를 만하다.


학산수(鶴山守)는 온 나라에서 노래를 제일 잘 부르는 사람이었다. 그가 산속에 들어가 소리를 익힌 적이 있었는데, 매양 한 가락을 마치면 모래를 주워 나막신에 던져서 그 모래가 나막신에 가득 차야만 돌아왔다. 일찍이 도적을 만나 장차 죽게 되었는데, 바람결에 따라 노래를 부르자 뭇 도적들이 모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쯤 되면 ‘죽고 사는 것을 마음속에 두지 않는다’고 이를 만하다.


나는 처음 그 이야기를 듣고서 이렇게 탄식하였다. “큰 도(道)가 흩어진 지 오래되어, 어진 이를 좋아하기를 여색 좋아하듯이 하는 사람을 나는 보지 못하였다. 그런데 저들은 기예를 위해서라면 자기의 목숨마저도 바꿀 수 있다 여겼으니, 아! 이것이 바로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것이로구나.”


도은(桃隱)이 《형암총언(炯菴叢言)》 도합 열세 조목을 글씨로 써서 한 권의 책자로 만들어 나에게 서문을 써 줄 것을 부탁하였다.


도은과 형암 이 두 사람은 내적인 면에 오로지 마음을 쓰는 사람인가?, 육예(六藝) 속에서 노니는 사람인가? 그것이 아니고 이 두 사람이 사생(死生)과 영욕(榮辱)의 분별을 잊어버리고 이와 같이 정교한 경지에 이르렀다면 어찌 지나친 것이 아니겠는가? 만약 이 두 사람이 무언가를 위해 다른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다면, 도와 덕 속에서 서로를 잊고 지내기 바란다.


**역자 주

1.《형암총언(炯菴叢言)》 : 이덕무가 지은 책인데,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는 전하지 않는다. 형암은 이덕무의 호이다.

2.육예(六藝) : 육예는 예(禮)ㆍ악(樂)ㆍ사(射)ㆍ어(御)ㆍ서(書)ㆍ수(數)를 말한다. 공자가 이르기를 “도에 뜻을 두고, 덕에 의거하며, 인에 의지하며, 예에서 노닌다.〔志於道 據於德 依於仁 遊於藝〕” 하였는데, 앞의 세 항목이 ‘내적인 면에 마음을 쓰는’ 것이라면, 육예에서 노니는 것은 외적인 면, 즉 일상적인 행동을 통해 수양에 힘쓰는 것을 뜻한다. 주자(朱子)의 주에 따르면, 그렇게 할 때 본말을 갖추게 되고 내외가 서로 함양된다고 하였다. 《論語 述而》

3.서로를 잊고 지내는 것: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물고기들이 샘물이 말라붙는 바람에 졸지에 육지에 처하여 서로 습기를 호흡하고 입의 거품으로 서로의 몸을 축여 주느라 고생하고 있는데, 그보다는 ‘강과 호수에서 서로를 잊고 지내는 것〔相忘於江湖〕’이 낫다고 하였다. 연암은 이와 같이 유교의 예악(禮樂)과 인의(仁義)를 모두 잊어버릴 것을 역설한 《장자》의 일절(一節)을 변용하여, 도리어 ‘도에 뜻을 두고 덕에 의거하라’는 공자의 말씀을 철저히 실천하는 일 외에 다른 모든 일을 잊어버리라는 뜻으로 이런 말을 한 것이다.


-박지원(1737~180), '형언도필첩서(炯言桃筆帖序)' , 연암집 제7권 별집/ 종북소선(鍾北小選)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옮긴이 주(에필로그):  ‘강과 호수에서 서로를 잊고 지내는 것〔相忘於江湖〕’,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나온다. 원글 전후의 맥락을 짧게 살펴보면 그 내용이 이렇다. 

『물이 말라 물고기가 땅위에 모여 서로 물기를 끼얹고 서로 물거품으로 적셔 줌은 드넓은 강이나 호수에서 서로의 존재를 잊고 있는 것만 못하다(不如相忘於江湖불여상망어강호)"......자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이 세상에 거하는 방법을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이에 공자가 말하기를, "물고기는 물에서 살고(魚相造乎水어상조호수), 사람은 도에서 산다(人相造乎道인상조호도). 물에 사는 자는 못을 파 주면 충분히 살아갈 수 있고(穿池而養給천지이양급), 도에 사는 자는 속된 삶에 관심을 두지 않으므로 마음이 편안하다(相造乎道者상조호도자 無事而生定 무사이생정). 그래서 이르기를 '물고기는 강이나 호수 속에서 서로를 잊고(魚相忘乎江湖어상망호강호), 사람은 도의 세계에서 서로를 잊는다'고 하는 것이다(人相忘乎道術인상망호도술).[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 

극해의 바다 위에 떠 있는 빙산은 대양 항해자들이 가장 무서워 한다. 그게 아름답던 경외스럽던 공포스럽던 어떻게 느끼던 간에 전체크기의 10분의 9가 수면아래에 감춰져 있고 보이는 모습은 10분의 1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드러나지 않는 거대한 부분이 눈에 보이는 일부분을 어떤 형태로든 수면 위에 떠 있게 한다. 실체는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눈에 보이고 드러난 일부분으로 전체를 가늠하고 판단할 수 없다. 


물에 사는 물고기의 비유는 무엇이든 당연한 것이 외면적으로 의식적으로 거듭 강조되고 확인해야할 필요가 있는 상황이나 상태는 무언가 잘못되어 있거나 결핍되어 있는 것임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오히려 공기나 물처럼 필수적임에도 너무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워 아예 그것을 잊고 사는 상태보다 못하다는 말이 되겠다. 개인적인 여담으로 사랑도, 우정도, 의리도, 정의도, 양심도, 애국심도, 상식도, 지식도, 행복도, 희망도, 쾌락도, 도덕도, 부와 명예도, 기타등등...연상할 수 있는 단어들 모두 예외없이 여기에 해당시킬 수있다고 하겠다. 제대로 잊고 무엇엔가 몰두하며 산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