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연암 박지원

상생한다는 것은 서로 힘입어 사는 것

優拙堂 2017. 12. 19. 12:51

내가 나이 스무 살 때 마을 서당에서 상서(尙書, 서경(書經))를 배웠는데 홍범(洪範, 천지간에 가장 큰 법이라는 뜻)*이 너무도 읽기 어려워서 선생께 물었더니, 선생은 말했다.


이는 읽기 어려운 글이 아니다. 읽기 어려운 까닭은 속된 선비들이 어지럽게 만든 때문이다. 무릇 오행(五行)이란 하늘이 부여한 것이요 땅이 소장한 것으로, 사람들이 이에 힘입어 살아 나가는 것이다. 우 임금이 순서를 정한 홍범구주와 무왕과 기자(箕子)가 문답한 내용을 보면 오행이 하는 일은 정덕(正德, 백성의 덕을 바로잡는 것), 이용(利用, 백성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는 것), 후생(厚生, 백성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의 도구에 지나지 아니하며 오행이 하는 작용은 중화위육(中和位育, 서로 화합하고 상생하는 조화로운 삶을 통하여 모든 일이 제대로 되어 간다는 뜻)의 공효((功效, 을 들인 보람이나 효과)에서 벗어나지 않을 따름이다.


한 나라 유자(儒者)들이 휴구(休咎 길흉(吉凶))를 독실히 믿어 바로 어떤 일은 반드시 그 일에 상응하는 어떤 징조가 나타난다고 하면서 모든 일을 오행에다 나누어 배열하고 미루어 부연하여 그 허황되고 망녕됨을 즐겼다. 그리하여 이것이 잘못 흘러 음양과 복서(卜筮, 길흉화복을 알기 위(爲)하여 점(占)을 치는 것)의 학술이 되었고, 이것이 둔갑하여서는 성력(星曆 천문역법)과 참위(讖緯 미래 예언)의 서적이 되어 마침내 세 성인(앞서 거론한 서경의 우 임금, 무왕, 기자)의 본지(本志, 본래의 뜻)와 크게 서로 어긋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오행상생(五行相生)의 설(說)*에 이르러서는 그 어긋남이 너무도 극에 달했다.


만물이 흙에서 나지 않는 것이 없는데 어찌 유독 쇠만이 이를 모체로 삼는다 하겠는가. 쇠란 딱딱한 물질이니 불을 만나 녹아내리는 것은 쇠의 본성이 아니다. 저 넘실거리는 강과 바다, 황하(黃河)와 한수(漢水)를 보라. 이것이 다 쇠에서 불어났단 말인가?


돌에서 젖이 나오고 쇠에서도 즙이 배어난다*. 만물에 진액(津液)이 없으면 말라 버리거늘 어찌 유독 나무에 있어서만 물이 배었겠는가?


만물이 결국은 흙으로 돌아가지만 그렇다고 땅이 더 두터워지지도 않고, 건곤(乾坤 하늘과 땅)이 짝을 이루어 만물을 화육하거늘 어찌 한 아궁이의 불붙은 땔나무가 대지를 살찌게 할 수 있다 하겠는가?


쇠와 돌이 서로 부딪치거나 기름과 물이 서로 끓을 때는 모두 불을 일으킬 수 있고, 벼락이 치면 불타고 황충(蝗蟲)을 묻어 두면 불꽃이 일어나니, 불이 오로지 나무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도 분명하지 않은가? 그러므로 상생한다는 것은 서로 자식이 되고 어미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힘입어서 산다는 것이다.


예전에 하우씨(夏禹氏 고대 중국의 하 왕조를 세운 우 임금),는 오행을 잘 활용하였다. 하우씨가 산을 따라 나무를 베어 낸 것은 굽게 할 수도 있고 곧게 할 수도 있는 나무의 쓰임을 터득한 것이요, 토목공사를 크게 벌인 것은 곡식을 심고 거두는 농사의 방법을 터득한 것이요, 금, 은, 동 세 가지를 공물로 받은 것은 모양을 마음대로 변형할 수 있는 쇠의 성질을 터득한 것이요, 산을 태우고 늪을 태운 것은 위로 타오르는 불의 덕을 터득한 것이요, 하류를 터서 물을 끌어들인 것은 적시고 내려가는 물의 공을 터득한 것이니 백성과 만물이 살 수 있도록 서로 도움을 받은 것이 이렇듯 막대하다.


어느 것이고 물질이 아닌 것이 없지만, 유독 나무, 불, 흙, 쇠, 물만을 오행이라고 말한 것은 이 다섯 가지로 만물을 포괄하면서 그것들의 덕행을 칭송한 것이다. 그런데 후세에 물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성(城)을 침수시키는 수공(水攻)에 이를 남용하였고, 불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화공(火攻) 작전에 이를 남용하였으며, 쇠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뇌물을 주는 데에 이를 남용하였으며, 나무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궁실을 짓는 데에 이를 남용하였으며, 흙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논밭을 만드는 데에 이를 남용하였다. 이로부터 세상에서는 홍범구주(洪範九疇)의 학설이 단절된 것이다.”


나는 물었다. “우리 동방은 기자가 와서 다스린 나라이며 홍범은 그에게서 나왔으니 마땅히 가가호호 깨우치고 외우게 하였을 터인데, 아득한 수천 년 동안 홍범의 학설로 세상에 이름난 이가 없었던 것은 무슨 연유입니까?”


선생이 대답하였다. “허허, 참 슬프도다! 이는 네가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대저 ‘황극(皇極)을 세운다(皇建其有極 임금이 만백성의 삶의 준칙이 되는 인륜 질서를 세우는 것)’는 것은 당연히 이르러야 할 곳에 반드시 이르며 이치에 맞기를 기약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후세의 학자들은 그렇지 못하여, 명백하고 알기 쉬운 인륜과 정사는 도외시한 채 어렴풋하고 고원한 도상(圖像)*에만 치중하여 논설하고 쟁변하였으며, 견강부회하여 먼저 스스로 오행의 순서를 어지럽혀 놨으니, 이 때문에 그 학설이 정교할수록 더욱 빗나가는 것이다.


이제 내가 오행의 쓰임에 대해 먼저 말해 볼 터이니, 이를 통해 구주(九疇)의 이치는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이용’이 있은 후에라야 ‘후생’할 수 있고, ‘후생’한 후에라야 ‘정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물을 적기(適期)에 모으고 빼곤 하여 가문 해를 맞아 수차로써 관개(灌漑)하고 수문으로 조운(漕運)을 조절한다면 물을 이루 다 쓸 수 없을 터이다. 그런데 지금 너에게 물이 있어도 쓸 줄을 모르니 이는 물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지금 불은 사시(四時)에 따라 화후(火候)가 다르고 강약의 정도에 따라 그 효과가 다르니, 질그릇, 쇠그릇, 쟁기, 괭이를 만드는 데에 각기 적절하게 맞추게 되면 불을 이루 다 쓸 수 없을 터이다. 그런데 지금 너에게 불이 있어도 쓸 줄을 모르니 이는 불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100리 되는 고을이 360군데이나 고산준령이 10에 7, 8을 차지하니 명색만 100리라 하지 실제 평야는 30리를 넘지 못한다. 때문에 백성들이 가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저 우뚝하니 높고 큰 산들을 사방으로 측량해 보면 몇 배나 더 많은 면적을 얻을 수 있으며, 그 속에서 금, 은, 동, 철이 왕왕 나오니, 만일 채광(採鑛)의 방법과 제련의 기술만 있다면 이 나라의 부가 천하에서 으뜸갈 수도 있을 것이다.


나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궁실, 관곽(棺槨), 수레, 쟁기는 그 재료가 각기 다르니, 우형(虞衡, 산림과 토지를 관장하는 관리)이 재생한 나뭇가지를 때맞추어 잘 가꾼다면 나라 안에서 쓰는 분량은 충분할 것이다.


아! 오토(五土, 산림(山林), 천택(川澤), 구릉(丘陵), 하천지(河川地), 저습지(低濕地))는 거름 주는 법이 다르고 오곡은 파종하는 법이 다르거늘 영농의 지혜를 어리석은 백성들에게만 맡겨서 토지를 이용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으니, 백성들이 어찌 굶주리지 않으리오. 그러므로 ‘부유하게 살아야 착하게 행동한다.(旣富方穀 기부방곡)’ 하였으니, 먼저 일상생활의 일부터 잘 밝히고 나면 부유하고 착하게 되니 구주의 이치가 이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읽기 어려운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나는 화림(花林 안의(安義)의 옛 지명)의 수령이 되자 제일 먼저 현(縣)의 문헌을 찾아보았다. 속수(涑水) 우공(禹公, 조선후기의 문신, 학자인 우여무(禹汝楙 ,1591~1657))이 홍범에 조예가 깊어 《홍범우익(洪範羽翼)》 42편과 《홍범연의(洪範衍義)》 8권을 지었다 하므로, 급히 가져다 읽어 보니 정연하게 구분하고 조리 있게 분류하였다. 이 책들은 크게 말하면 나라를 다스리는 이가 반드시 가져다 보아야 할 내용이요, 작게 말하면 경서 공부하는 서생이 과거 답안 작성 연습 때 반드시 참고로 삼아야 할 내용이니, 이 책이 그다지 읽기 어렵지 않다는 것이 새삼 믿어진다.(이하 생략)


※[역자 주]

1. 홍범(洪範) : 《서경(書經)》 주서(周書)의 한 편(篇)이다. 홍범은 대법(大法), 즉 천지간에 가장 큰 법이라는 뜻이다. 무왕이 은 나라를 멸망시킨 후 기자(箕子)를 주(周) 나라의 도읍으로 데리고 가서 하늘의 도가 무엇이냐고 묻는 말에 기자가 답한 것이 이 홍범이라고 한다. 《서경》 홍범에는 우(禹)가 상제에게서 받았다는 ‘아홉 가지 큰 규범〔洪範九疇〕’이 제시되어 있는데, 첫째는 오행(五行)으로,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꼭 필요한 다섯 가지 물질을 가리킨다. 둘째는 사람들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일, 즉 오사(五事)이고, 셋째는 여덟 가지 정사, 즉 팔정(八政)이고, 넷째는 다섯 가지 기율, 즉 오기(五紀)이고, 다섯째는 임금의 법도, 즉 황극(皇極)이고, 여섯째는 세 가지 덕, 즉 삼덕(三德)이고, 일곱째는 점을 쳐서 의심나는 일을 밝혀내는 일, 즉 계의(稽疑)이고, 여덟째는 하늘이 내리는 여러 징조, 즉 서징(庶徵)이고, 아홉째는 다섯 가지 복과 여섯 가지 곤액, 즉 오복육극(五福六極)이다.

2. 오행상생(五行相生)의 설(說) : 오행이 상호 생성해 준다는 학설로서, 동중서에 의해 주창되었다. 나무는 불을 낳고〔木生火〕, 불은 흙을 낳고〔火生土〕, 흙은 쇠를 낳고〔土生金〕, 쇠는 물을 낳고〔金生水〕, 물은 나무를 낳는다〔水生木〕는 내용이다. 따라서 나무는 불의 어미〔母〕가 되고 불은 나무의 자식〔子〕이 된다고 하여 오행을 자모(子母) 관계로 간주하였다. 《春秋繁露 卷11 五行之義》

3. 돌젖과 쇠즙 : 지하수에 녹아 있던 석회분이 고드름처럼 결정(結晶)을 이룬 종유석(鐘乳石)과, 쇠 부스러기를 물에 오래 담궈 산화(酸化)시켜 우려낸 철장(鐵漿)을 예로 든 것이다.

4. 어렴풋하고 고원한 도상(圖像) : 한 나라 유자들은 《주역》 계사전 상에 “황하에서 그림이 나오고, 낙수(洛水)에서 글이 나오니, 성인이 이를 본받았다.〔河出圖 洛出書 聖人則之〕”는 구절에 근거해서, 우가 낙수에서 거북이 등에 지고 나온 글에 의거하여 홍범구주를 지었다고 주장했다. 송(宋) 나라 때 주자학파는 이 같은 주장을 더욱 발전시켜 낙서(洛書)의 도형과 숫자로써 홍범구주의 의미를 확대해석하고자 하였다. 채침(蔡沈)의 《서집전(書集傳)》에 수록된 하도낙서도(河圖洛書圖), 구주본낙서수도(九疇本洛書數圖) 등의 여러 도상들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도상을 통해 《서경》 홍범의 의미를 천착한 것은 미신적인 술수학(術數學)에 떨어진 것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박지원(朴趾源, 1737~1805), '홍범우익서(洪範羽翼序)', 연암집 제1권 /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