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연암 박지원

참되고 올바른 식견은 중간에 있다

優拙堂 2017. 12. 19. 13:25

자무(子務)와 자혜(子惠)가 밖에 나가 노니다가 비단옷을 입은 소경을 보았다. 자혜가 서글피 한숨지으며, “아, 자기 몸에 지니고 있으면서도 자기 눈으로 보지를 못하는구나.” 하자, 자무가, “비단옷 입고 밤길을 걷는 자와 비교하면 어느 편이 낫겠는가?” 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청허선생(聽虛先生)에게 함께 가서 물어보았더니, 선생이 손을 내저으며, “나도 모르겠네, 나도 몰라.”하였다.


 옛날에 황희(黃喜) 정승이 공무를 마치고 돌아오자 그 딸이 맞이하며 묻기를, “아버님께서 이〔蝨〕를 아십니까? 이는 어디서 생기는 것입니까? 옷에서 생기지요?” 하니, “그렇단다.” 하므로 딸이 웃으며, “내가 확실히 이겼다.”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며느리가 묻기를, “이는 살에서 생기는 게 아닙니까?” 하니, “그렇고 말고.” 하므로 며느리가 웃으며, “아버님이 나를 옳다 하시네요.” 하였다. 


이를 보던 부인이 화가 나서 말하기를, “누가 대감더러 슬기롭다고 하겠소. 송사(訟事)하는 마당에 두 쪽을 다 옳다 하시니.” 하니, 정승이 빙그레 웃으며, “딸아이와 며느리 둘 다 이리 오너라. 무릇 이라는 벌레는 살이 아니면 생기지 않고, 옷이 아니면 붙어 있지 못한다. 그래서 두 말이 다 옳은 것이니라. 그러나 장롱 속에 있는 옷에도 이가 있고, 너희들이 옷을 벗고 있다 해도 오히려 가려울 때가 있을 것이다. 땀 기운이 무럭무럭 나고 옷에 먹인 풀 기운이 푹푹 찌는 가운데 떨어져 있지도 않고 붙어 있지도 않은, 옷과 살의 중간에서 이가 생기느니라.” 하였다.


백호(白湖) 임제(林悌)가 말을 타려고 하자 종놈이 나서며 말하기를, “나으리께서 취하셨군요. 한쪽에는 가죽신을 신고, 다른 한쪽에는 짚신을 신으셨으니.” 하니, 백호가 꾸짖으며 “길 오른쪽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은 나를 보고 가죽신을 신었다 할 것이고, 길 왼쪽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은 나를 보고 짚신을 신었다 할 것이니, 내가 뭘 걱정하겠느냐.”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논할 것 같으면, 천하에서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것으로 발만 한 것이 없는데도 보는 방향이 다르면 그 사람이 가죽신을 신었는지 짚신을 신었는지 분간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참되고 올바른 식견은 진실로 옳다고 여기는 것과 그르다고 여기는 것의 중간에 있다. 예를 들어 땀에서 이가 생기는 것은 지극히 은미하여 살피기 어렵기는 하지만, 옷과 살 사이에 본디 그 공간이 있는 것이다. 떨어져 있지도 않고 붙어 있지도 않으며, 오른쪽도 아니고 왼쪽도 아니라 할 것이니, 누가 그 ‘중간〔中〕’을 알 수가 있겠는가.


 말똥구리〔蜣蜋]는 자신의 말똥을 아끼고 여룡(驪龍)의 구슬을 부러워하지 않으며, 여룡 또한 자신에게 구슬이 있다 하여 ‘말똥구리의 말똥〔蜋丸〕’을 비웃지 않는다.


자패(子珮)가 이 말을 듣고는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로써 내 시집(詩集)의 이름을 붙일 만하다.” 하고는, 드디어 그 시집의 이름을 ‘낭환집(蜋丸集)’이라 붙이고 나에게 서문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내가 자패에게 이르기를,


 “옛날에 정령위(丁令威)가 학(鶴)이 되어 돌아왔으나 아무도 그가 정령위인지 알아보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비단옷 입고 밤길을 걷는 격이 아니겠는가. 《태현경(太玄經)》이 크게 유행하였어도 이 책을 지은 자운(子雲 양웅(揚雄))은 막상 이를 보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소경이 비단옷을 입은 격이 아니겠는가. 이 시집을 보고서 한편에서 여룡의 구슬이라 여긴다면 그대의 짚신〔鞋〕을 본 것이요, 한편에서 말똥으로만 여긴다면 그대의 가죽신〔鞾〕을 본 것이리라. 남들이 그대의 시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이는 마치 정령위가 학이 된 격이요, 그대의 시가 크게 유행할 날을 스스로 보지 못한다면 이는 자운이 《태현경》을 지은 격이리라. 여룡의 구슬이 나은지 말똥구리의 말똥이 나은지는 오직 청허선생만이 알고 계실 터이니 내가 뭐라 말하겠는가.” 하였다.


-박지원(朴趾源, 1737~1805), '낭환집서(蜋丸集序)', 연암집 제7권 별집 / 종북소선(鍾北小選)-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에필로그(사족): 역자의 주해에 의하면, 자무는 이덕무(李德懋), 자혜는 유혜풍(柳惠風), 자패는 유연(柳璉)을 일컫는 것으로 알려진다. 요즘같은 세상에는 눈과 귀로 직접 듣고 보고도, 그 실체를 제대로 알 수 없는 묘한 상황들이 많다. 신발을 짝짝이로 신고 다니는 사람이 실제로 있다는 것을, 귀로 듣고는 쉽게 믿을 수 없다, 무엇이 사실이고 허구인지,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그 판단이 쉽지 않다. '참되고 올바른 식견(識見)은 시비의 중간에 있다'고 현명한 우리의 옛 선인들은 강조한다. 그런데 그 중간을 찾기가 쉽지가 않다. "사물에 대해서 건전하게 사고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에만 집착할 뿐이다."라는 장폴마라(Jean Paul Marat, 1743~1793)의 통찰이다. 이처럼, 모든 입들이 일방적으로 한쪽으로만 치우쳐진 사회현실에서는 더욱 그렇다. 일방적으로 난무하는 말들이 몰고오는 집단의 광기에 휘말리면 멀쩡한 사람도 한쪽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예 없어진다. 그래서 '참되고 올바른 식견(識見)', 즉 시비의 중간에서 올바르고 건전하게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 더욱 절실히 요구되는 요즘의 현실임에는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