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연암 박지원

자신을 해치는 것이 제 몸안에 있음을 모르고

優拙堂 2017. 12. 19. 22:19

진사 장중거(張仲擧)는 걸출한 인물이다. 키는 팔 척 남짓하고 기개가 남보다 뛰어나 사소한 일에 얽매이지 않았으나, 천성이 술을 좋아하여 호방한 까닭에 취하게 되면 빗나가는 말이 많았다. 이 때문에 동네에서 그를 싫어하고 괴롭게 여기어 미친 사람이라 지목하고 친구들 사이에도 비방하는 말들이 자자하였다.

이에 그를 가혹한 법으로 얽어 넣으려는 자가 생기자 중거 또한 자신의 행실을 뉘우치며, ‘내가 아마 이 세상에서 용납되지 못할 모양이다!’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비방을 피하고 해를 멀리할 방도를 생각해 내어, 거처하는 방을 깨끗이 쓸고 문을 닫아걸고 발〔簾〕을 내리고 살면서, 크게 ‘이존(以存)’이라 써서 당에 걸어 놓았다. 《역(易)》에 이르기를 “용과 뱀이 칩거하는 것은 몸을 보존하기 위함이다.(龍蛇之蟄 以存身也)”라고 했으니, 대개 이에서 취해 온 것이다.

하루아침에 상종하던 술꾼들을 사절하며, “자네들은 그만 물러가라. 나는 장차 내 몸을 보존하려 한다.” 고 말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중거가 몸을 보존하려는 방법이 이에 그친다면 화를 면하기 어렵겠다. 비록 독실하고 경건했던 증자(曾子)로서도 종신토록 외우며 실행한 것이 어떠했는가. 항상 하루아침 하루저녁도 무사히 넘기기 어려울 듯이 하다가 죽는 날에 이르러서야 손발을 살펴보게 하고 비로소 그 온전히 살다가 돌아감을 다행으로 여겼는데 더더구나 일반 사람들에 있어서랴.

한 집을 미루어 한 지방을 알 수 있고 한 지방을 미루어 온 누리도 알 수 있다. 온 누리가 저와 같이 크나, 일반 사람들의 처지에서 보자면 거의 발을 용납할 땅조차 없을 지경이다. 하루 사이에도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視聽言動〕’을 몸소 증험해 보면 요행히 살고 요행히 화를 면한 것 아님이 없다. 이제 중거는 외물이 자기를 해칠까 두려워 밀실에 칩거함으로써 자신을 보존하고자 하나 자신을 해치는 것이 제 몸 안에 있음을 모르고 있다. 비록 발자취를 멈추고 그림자를 감추어 스스로 옥살이와 같이 한다 한들 마침 더욱더 사람들의 의혹을 사고 분노를 모으기에 족할 뿐이니, 그 몸을 보존하는 방법이 서투르지 아니한가?

슬프다! 옛사람 중에 남들의 시기를 걱정하고 헐뜯음을 무서워한 자가 얼마나 많았던가? 그래서 대개는 농사터에 숨고 산골에 숨고 낚시터에 숨고 백정이나 행상 노릇에 숨었는데, 숨는 데 교묘한 자는 흔히 술에 몸을 숨겼으니 유백륜(劉伯倫)과 같은 무리야말로 교묘하다 하겠다. 그러나 삽을 짊어지고 뒤를 따라다니게 한 것에 이르면 또한 몸의 보존을 도모함에 치졸하였다 할 것이다. 이는 왜 그런가?

저 농사터, 산골, 낚시터, 백정이나 행상 노릇 같은 것은 모두 외물을 빙자하여 숨은 것이지만, 술의 경우에는 부지중 아득히 빠져 스스로 그 본성을 미혹시키는 것이니 자기 형체를 잊어버리고도 깨닫지 못하고 자기 시체가 구렁텅이에 내버려져도 걱정하지 않게 되는데, 까마귀와 솔개, 땅강아지와 개미 따위가 뜯어 먹는 것쯤이야 안중에 있을 까닭이 있겠는가! 이는 술을 마심이 자기 몸을 보존하고자 함인데 삽을 짊어지게 한 바람에 누를 끼치고 만 것이다.

이제 중거의 과실은 술에 있는데, 여전히 자신의 몸을 잊지 못하고 몸 보존할 바를 생각한 나머지 내객을 사절하고 깊이 숨어 살며, 깊이 숨어 사는 것이 자기를 지키는 데 부족하게 되자 또 함부로 스스로 당호를 써서 남들이 보게 걸어 놓으니, 이는 유백륜이 삽을 짊어지게 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였다.

중거는 두려워하며 한참 있더니, “그대의 말과 같을진댄 나의 팔 척 몸을 들어 장차 어디로 던진단 말인가?” 라고 물었다. 나는 그에게 답하여 이르기를, “나는 능히 그대의 몸을 그대의 귓구멍이나 눈구멍 속에 집어넣을 수 있다. 아무리 천지가 크고 사해가 넓다지만 그 눈구멍이나 귓구멍보다 더 여유가 있을 수 없으니 그대가 이 속에 숨기를 바라는가?

무릇 사람이 외물과 교접하고 일이 도리와 합치하는 데에는 도(道)가 있으니 그것을 예(禮)라고 한다. 그대가 그대 몸을 이기기를 마치 큰 적을 막아 내듯 하여, 이 예에 따라 절제하고 이 예를 본받으며 예에 맞지 않는 것을 귀에 남겨 두지 않는다면 몸을 숨기는 데에 무한한 여지가 있을 것이다. 눈이 몸에게 있어서도 역시 그러하니, 예에 맞지 않는 것을 눈에 접하지 않는다면 몸이 남의 흘겨보는 눈초리에 걸리지 않을 것이다. 

입의 경우에도 또한 그러하니, 예에 맞지 않는 것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면 몸이 남의 헐뜯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마음은 귀와 눈에 비해 더욱더 광대하니, 예에 맞지 않는 것으로 마음에 동요되지 않는다면 내 몸의 전체(全體)와 대용(大用)이 진실로 방촌(方寸)의 사이(마음)에서 벗어나지 않게 되어 장차 어디로 가든지 보존되지 않을 것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중거가 손을 내저으며 말하기를, “이는 그대가 나로 하여금 내 몸 안에 몸을 숨기고, 몸을 보존하지 않음으로써 보존하게 하고자 함이니, 감히 벽에 써 붙여서 돌아보고 살피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 글은 사물장(四勿章)을 풀이한 것으로서 우리 유자(儒者)들이 흔히들 하는 말에 불과하나, 문장이 도리어 환상적으로 변화하고 신령스럽고 기교로워 묘하게도 선불교의 요지(要旨)를 얻었으니, 이 때문에 늙은 서생들이 항시 하는 말로 치부되지 않는 것이다.

※[역자 주]

1. 장중거(張仲擧) : 《엄계집(罨溪集)》에는 ‘설중거(薛仲擧)’로 되어 있다.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정조 1년(1777) 증광시에 진사 급제한 인물로서 장단(長湍)에 거주하는 설범유(薛範儒)가 있다. 중거(仲擧)는 설범유의 또 다른 자일 가능성이 있다.

2. 증자가 죽는 날에 이르러서야 : 《논어》 태백(泰伯)에, 증자가 병이 들자 제자들을 불러 말하기를, “이불을 걷고서 내 발을 살펴보고 내 손을 살펴보아라. 《시경》에 이르기를, ‘두려워하고 삼가서 깊은 못에 임한 듯이 하며 얇은 얼음을 밟듯이 하라.’ 하였는데, 이제야 내 몸이 다치는 죄를 면할 수 있게 되었구나. 제자들아!〔啓予足 啓予手 詩云 戰戰兢兢 如臨深淵 如履薄氷 而今而後 吾知免夫 小子〕”라고 하였다.

3. 유백륜(劉伯倫) : 진(晉) 나라 패국(沛國) 사람으로 이름은 영(伶), 백륜은 그의 자이다.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으로 술을 좋아하여 주덕송(酒德頌)을 짓고 예법을 조롱하며 지냈다. 술을 남달리 즐겨 평소에 녹거(鹿車 )를 타고 술을 싣고 다니며 종자에게 삽을 들고 따라다니게 하고는, 자기가 죽으면 즉시 그 자리에 파묻어 달라 하였다고 한다.

4. 전체(全體)와 대용(大用) : 완전한 실체(實體)와 광대한 공용(功用)이란 뜻으로, 여기서는 온 몸과 그 몸의 모든 작용을 가리킨다. 주자학에서는 도(道)를 체용(體用)의 논리로 설명한다. 근본적이고 내재적인 것을 ‘체(體)’라 이르고, 체가 움직여 드러난 것을 ‘용(用)’이라 이른다. 《대학(大學)》 격물장(格物章)의 보전(補傳)에, 격물치지(格物致知)에 진력하게 되면 “중물(衆物)의 표리(表裏)와 정조(精粗)가 이르러 오지 않음이 없고, 내 마음의 전체와 대용이 분명해지지 않음이 없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내 마음〔吾心〕’의 전체와 대용이라고 한 주자의 표현을 ‘내 몸〔吾身〕’의 전체와 대용으로 바꾸어 쓴 데 표현의 묘미가 있다고 하겠다.

5. 사물장(四勿章) : 사물(四勿)은 네 가지를 하지 말라는 뜻으로, 《논어》 안연(顔淵)에서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고 한 내용을 가리킨 것이다.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이존당기(以存堂記)', 연암집 제1권 /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