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중국)/구양수

[고전산문] 도(道)에서 떠날 수 있으면 도(道)가 아니다 / 구양수

優拙堂 2018. 9. 29. 18:08

전일에 가신 뒤 다시 전에 주신 고문(古文)․금문(今文)으로 지은 잡문(雜文) 10여 편을 가지고 반복해 읽어보니, 〈大節賦 대절부〉․〈樂古 악고〉․〈太古曲 태고곡〉 등은 말이 더욱 높고 뜻이 극히 컸습니다. 

족하(足下, 
비슷한 연령대에서 자신을 낮추어 상대를 부르는 말)의 뜻을 찾아보건대 어찌 세상을 근심하고 시속(時俗)을 걱정하여 옛것을 궁구하여 도(道)를 밝혀서, 지금을 끌어다 옛날로 되돌려 오늘날의 분란하고 혼잡한 것들을 제거하고자 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뒤에야 족하가 학문을 좋아하여 매우 뜻이 있는 분임을 더욱 잘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태곳적 삼황(三皇)의 도(道)를 전술(傳述, 
기술하여 전함)하여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을 취하여 말을 고원하게 하는 데 힘쓰고 현실성이 적으니, 이는 작은 잘못입니다. 

군자(君子)가 학문에 있어서는 도(道)를 행하는 데 힘쓰고 도(道)를 행하려면 반드시 옛것을 알고자 해야 하니, 옛것을 알고 도(道)에 밝은 뒤에 몸으로 실천하고 실제 일에 적용하고 또 문장(文章)에 드러내 발휘하여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하니, 그 도(道)는 주공(周公)․공자(孔子)․맹가(孟軻, 
맹자)와 같은 분들이 늘 실천한 바로 그것이고, 그 문장은 육경(六經, 시경, 서경, 육경, 주례, 예기, 춘추)에 실려 있어 지금까지 사람들이 믿는 바로 그것입니다.  그 도(道)는 알기 쉽고 본받을 만하며, 그 말은 밝히기 쉽고 실행할 만하거늘, 허탄(虛誕, 거짓되어 미덥지 않음)한 이들이 그 도(道)와 말을 얘기함에 미쳐서는 혼몽(混蒙 어둠과 밝음이 뒤엉켜 실체가 모호한 상태)하고 허무한 것을 도(道)라 하고 애매하고 공허한 것을 옛것이라 하니, 그 말이 본받기 어렵고 그 말이 실행하기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공자(孔子)가 도(道)를 말씀하시기를 “도(道)가 사람과 멀지 않다.”라고 하셨고, ≪중용 中庸≫을 말한 이는 “본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 한다.”라고 하고, 또 “떠날 수 있으면 도(道)가 아니다.”라고 하였으며, ≪춘추 春秋≫라는 책에서는 은공(隱公)이 양위(讓位,
 다른 이에게 임금의 자리를 물려줌)한 것을 미덕(美德)으로 이루어주되 바르다고 하지는 않았는데, 전(傳)을 쓴 사람은 “≪춘추≫는 도(道)를 신장하고 사(邪, 바르지 않고 악한 것)를 신장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니, 은공(道)이 도를 실천하지 못했음을 이른 것이다.

제후(齊侯)가 위(衛)나라의 수도를 옮겨주었는데, “초구(楚丘)에 성(城)을 쌓았다.”라고만 써서 그 인덕(仁德)은 허여(許與, 허락하고 칭찬함)해주고 천자도 아니면서 제 마음대로 제후를 봉해준 것은 허여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전(傳)을 쓴 사람은 “인(仁)은 도(道)를 이기지 못한다.”라고 하였으니, 무릇 여기서 말한 도(道)란 바로 성인의 도(道)입니다. 이는 자신에게서 실천하고 실제 일에 시행하여 얻은 것이니, 어찌 허탄한 자들이 말한 것과 같겠습니까. 

요(堯)․순(舜)․우(禹)의 사적을 기록한 책에 모두 ‘약계고(若稽古, 
헤아려 보건대)’라 하였고, 전설(傅說)이 이르기를 “일에 있어서 옛것을 본받지 않는 것은 제가 들은 바가 아닙니다.”라 하였고, 중니(仲尼 공자)는 이르기를 “나는 옛것을 좋아하여 민첩하게 찾은 자이다.”라고 하였으니, 무릇 여기서 말한 옛것이란 그 일이 바로 군신 (君臣) 상하(上下) 사이의 예악(禮․樂)과 형법(刑․法) 같은 일이니, 또 어찌 허탄한 자들이 말한 것과 같겠습니까. 이것이 군자가 배우는 바입니다. 

대저 앞에서 말한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을 취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공자(孔子)가 옛날에 주(周)나라 세상에 태어나 요순(堯舜)의 세상과 시대가 멀었으니, 오늘날과 비교해 요순의 세상과 어느 쪽이 더 시대가 멀겠습니까. 

공자가 ≪서경 書經≫을 산정(刪定,
간추리고 다듬어 잘 정리함)할 때 〈요전 堯典〉부터 끊고 그 이전은 말하지 않았으며, 공자가 말한 학문은 “멀리 요순(堯舜)을 이어받았다.”라고 하였으니, 공자와 같이 성인이고 근면하신 분도 그 이전은 말하지 않은 것은 어찌 말할 수 없어서였겠습니까. 시대가 점점 더 멀어 사실을 밝히기 어려워서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지금 공자보다 훨씬 후대에 태어나 도리어 요순 이전의 것을 찾고자 하니, 세상에서 말하는 ‘말을 고원(아득하게 높고 먼 상태)하게 하는 데 힘쓰고 현실성이 적은’ 것입니다.  요순(堯舜)의 도(道)는 백왕(百王)의 으뜸이거늘,  중니(仲尼, 공자)는 탄식하여 이르기를 “탕탕하도다!”라고 하였으니, 고결(高深)하고 광대(宏大, 어마어마하게 큼)하여 형언할 수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전(二典, 서경(書經)의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에 이르러서는 그 서술이 분명하여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존숭(尊崇, 높이 받들어 숭배함)하고 앙망(仰望, 존경의 마음으로 우러러 봄)하되 미칠 수 없어 그 엄연하기가 마치 하늘과 같도록 하였으니, 서경(書經)의 말이 어찌 높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서경≫에 기록된 사실은 구족(九族, 
외가를 포함한 일가친척)을 친하게 하고, 백성을 고루 다스리고, 홍수의 우환을 걱정하고, 신하들에게 적임자가 누군지 묻고, 딸을 순(舜)에게 시집보내는 것 및 산천에 제사하고, 제후를 접견하고, 도량형(度量衡)을 통일하고, 신하로 하여금 사흉(四凶)을 처벌하여 방출(放黜, 쫓아내어 치워버림)하도록 하는 것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공자(孔子) 후에는 오직 맹가(孟軻, 
맹자)만이 도(道)를 가장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사람으로 하여금 뽕나무와 삼을 심고 닭과 돼지를 기르게 하면서, ‘산 사람을 기르고 죽은 사람을 보내는 것이 왕도(王道)의 근본’이라 하는 데 불과하였습니다. 대저 이전(二典)의 글이 어찌 글이 아니겠으며, 맹가(孟軻)가 말한 도(道)가 어찌 도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 내용은 세상 사람들이 매우 알기 쉽고 비근한 것이라 대개 실제 사실에 가까울 따름입니다.

그런데도 지금의 학자들은 여기에 깊이 근본을 두지 않고 허탄한 사람들이 하는 말을 좋아하여 아득한 고대에서 혼돈(混沌)을 생각하여 형체가 없는 것을 지극한 도로 삼아서 도(道)에 고하(高下)와 원근(遠近)을 둠이 없으며, 현능한 사람은 능히 할 수 있고 우매한 사람도 노력하여 도달할 수 있어 과불급(過․不及,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다 같이 대중(大中)한 경지에 근본을 둘 수 있게 하기 때문에 만세(萬世)토록 길이 변치 않도록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옮긴이 주: 이 단락은 번역문이 비문이라 할 정도로 문맥이 어울리지 않아 이해가 잘 안된다.  나름 문맥에 맞게 다시 정리하면, "그런데도 지금의 학자들은 여기에 깊이 근본을 두지 않고 허탄한 사람들이 하는 말을 좋아하여 아득한 고대에서 혼돈(混沌)을 생각하여 형체가 없는 것을 지극한 도(道)로 삼습니다. 도(道)는 고하(高下)와 원근(遠近)을 따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현능한 사람은 능히 할 수 있고 우매한 사람도 노력하여 도달할 수 있어 과불급(過․不及,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현실적인 것이 도(道)입니다. 이처럼 (道)는 대중적이고 보편적인 경지에 그 근본을 두고 있기 때문에 만세(萬世)토록 길이 변치 않도록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가 되겠다.)

그런데 지금은 할 만한 것이 못 된다고 하여 고원(高遠,
높고 심오함)한 쪽이 낫다고 그쪽에 힘을 써서 허탄한 자들의 쓸데없는 주장을 확산시켜 주고 있으니, 이는 학자들이 마음을 다할 바가 아닙니다. 조금 그 높음을 낮추고 그 멂을 가깝게 하여 중도(中道)에 이르게 해야 할 것이니, 그렇게 하면 거의 지극할 것입니다.(옮긴이 주: 이 문장에서 말하는 중도(中道)의 '中'의 의미는 '가운데, 중간, 치우침이 없는' 등의 뜻보다는,  맥락상 '올바른, 합당한, 보편적인, 대중적인, 현실적으로 실현가능한' 의 의미가 어울린다. 따라서  나름 풀이하면, 중도란, '현실적으로 합당하고 실현 가능성이 있는 도(道)'가 되겠다)

무릇 내가 말한 것은 모두 진부(陳腐)한 말이고 천근(淺近)한 말이니, 족하가 다문박학(多聞博學)한 분임을 감안할 때 의당 족하에게는 말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말한 까닭은 본래 족하의 고원(高遠)한 면을 덜어내어 낮은 곳으로 나아가게 하고자 한 것이니, 어찌 감히 기이한 말을 하여 자신을 높이는 데 힘쓰겠습니까. 족하는 조금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
역주]
1.可離 非道也 : ≪중용≫에 “도란 것은 잠시도 그것을 떠날 수 없으니, 떠날 수 있으면 도가 아니다.[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 非道也]”라고 하였다.
2. 은공의 양위: 孔子가 저술했다는 ≪춘추春秋≫에서 노(魯) 은공(隱公)이 환공(桓公)에게 양위(讓位)한 것을 훌륭한 일이라 하면서 도리어 그 양위는 바른 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은(隱)은 춘추시대 노나라의 은공을 가리킨다. 은공의 이름은 식고(息姑)이다. 은공은 혜공(惠公)의 서장자(庶長子)인데 혜공이 죽었을 때 적자(嫡子)인 윤(允)은 아직 나이가 어렸다. 그래서 은공은 혜공의 유명(遺命)에 따라 섭정(攝政)하다가 윤(允)이 장성하면 임금의 자리를 그에게 돌려주려고 생각했다. 윤(允)이 후일에 환공(桓公)이 된다. ≪춘추≫에서 임금이 새로 즉위하면 통상 ‘즉위 卽位’라고 쓰는데 은공이 임금 자리에 오른 것을 두고 즉위라 쓰지 않았다. 이는 은공이 양위한 미덕(美德)을 드러내기 위해서라고 한다. ≪춘추 春秋≫ 은공(隱公) 원년 조에 “원년 춘 왕정월(元年 春 王正月)”이라고만 쓴 것에 대해, ≪좌씨전左氏傳≫에서는 “즉위를 쓰지 않은 것은 섭정(攝政)했기 때문이다.[不書卽位 攝也]”라고 하였고, ≪공양전 公羊傳≫에서는 “‘어찌하여 즉위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공(公)의 뜻을 이루어준 것이다.’ ‘어떻게 공의 뜻을 이루었는가?’ ‘공이 장차 나라를 평안하게 하여 환공(桓公)에게 되돌려주려 하였다.’[何以不言卽位 成公意也 何成乎之意 公將平國而反之桓]” 하였다.

-구양수(歐陽修, 1007~1072), '與張秀才第二書', 당송팔대가문초/宋大家歐陽文忠公文抄 卷11 書-

※원글출처: 동양고전종합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