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중국)/유협

[고전산문]뜻이 분명하고 정확한, 올바른 글쓰기 / 유협

優拙堂 2018. 9. 29. 18:46

관중(管仲)은 “날개가 없어도 날 수 있는 것은 소리요 뿌리가 없어도 자리를 잡는 것은 정(情)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실제로 소리는 날개를 빌지 않아도 쉽게 날아다니고, 정(情)은 뿌리를 기다리지 않고도 마음에 자리잡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런즉 문장을 지음에 어찌 소홀히 할 것이며, 어찌 신중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예로부터 뛰어난 재능을 가진 문인들은, 시대는 각기 달라도 고심하여 글을 지음에는 서로 실력을 능히 견줄만 했다.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가진 문인은 문장의 명쾌함과 신속함이 두드러지고, 사려 깊은 문인은 문장의 섬세함과 치밀함이 남달랐다. 그러나 인간의 사고 능력은 자칫하면 치우치기 쉽고 두루 원만하기가 어려운 까닭에, 흠이나 결점이 없는 온전한 사람은 드물다.
 
조식(曺植)의 문장은 재능있는 문사들 중에서도 뛰어나다. 그런데 아버지 조조를 칭송한 그의 글 <무제(武帝)의 뢰(誄)>에서 “존엄한 영혼 영원히 칩거(蟄居)하시다(尊靈永蟄).”라고 표현했고,  위(魏)의 2대 황제로 즉위한 조예를 칭송한 <명제(明帝)의 송(頌)>에서는  “성스러운 몸 가벼히 떠다닌다(聖體浮輕)”라고 묘사했다  그런데 ‘가벼히 떠다닌다’라는 표현은, 자칫 나비가 날아다니는 모습을 연상할 수 있다.  ‘영원히 칩거하시다’라는 표현은, '숨을 칩()'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자칫 동면상태에 들어간 곤충을 연상시킬 수 있다. 가장 고귀한 신분에게 이런 표현을 씀이 어찌 적절하다 할 수 있겠는가?

좌사(左思)의 <칠풍(七諷)>은 부모에게 효도하는 7가지를 이야기하면서도, 효행의 실천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표현된 말과 글이 뜻하는 바 도덕이나 순리에 모순되는 내용이라면, 나머지는 마땅히 눈여겨 볼만한 가치가 없다.  반악(潘岳)의 재능은 애도의 문장에 뛰어났다. 그러나 처남을 애도하는 글에서 感口澤(그가 쓰던 잔에 여전히 그의 침이 묻어 있다)”라고 탄식하였고,  자신의 어린 아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에서는, “心如疑((살아 있는 듯이 여겨져) 마음이 의심스럽다)”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感口澤'(감구택)과 '心如疑'(심여의)의 표현 용법은, <예기(禮記)>에서 친족 가운데 항렬이 가장 높은 존귀한 사람의 상례(喪禮)에 쓰인 말이었다. 이러한 표현을 또래 혹은 손아래 사람에게 사용함으로써 깊은 애도의 감정을 드러내기에 충분할 수는 있지만, 전통적인 예법의 차원에서 엄밀히 따지자면 적절하지 못하다.
 
무릇 군자를 다른 사람에 비교함에 반드시 동격의 대상과 비교함이 마땅하다. 그런데 최완(崔琬)은 <이공(李公)을 애도(誄)함>이란 글에서 이공의 행위를 고대의 삼황오제(黃帝)나 순임금의 덕행과 비교했고, 향수(向秀)는 계강(稽康)을 애도하는 글에서, 계강(稽康)이 형벌을 받은 것을 이사(李斯)와 비교했는데 이것은 다 사실과 정리(正理)에서 벗어난 것이다. (
옮긴이 주: 계강은 죽림칠현 중의 한 사람으로, '혜강'을 지칭하는 듯하다)

지나친 비난보다는 다소 지나치더라도 좋은 평가를 하는 것이 비록 낫다고는 하지만, 함부로 옛 사람을 끌여들어 비교해서는 안된다. 특히 고후(高厚)의 시는 정리(正理)를 벗어난 비교가 종잡을 수 없이 심하다. 이렇듯 사실이나 정리(正理)에서 어긋나는 비교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으로, 얼핏 보기엔 겉은 옳은 것 같지만  속은 전혀 그렇지 않고 실상이 다른 것과 다름없다.

교묘하게 꾸민 말은 쉽게 눈길을 끌지만, 졸렬한 표현은 감추기가 어렵다. 이러한 말의 티는 실로 백옥의 흠집보다도 심한 것이다. 번거로이 수많은 예를 다 들어가며 일일이 다 살필 수 없는 까닭에, 위의 네 개의 사례만을 간략하게 들었다.

글을 짓는 방법에서 언어의 운용과 주제의 확립에 대해서만 살펴보기로 한다. 언어는 해석에 근거해서 그 안에 담긴 의미가 규정되며, 주제는 근거를 바탕으로 논증하는 이론에 의해 설명된다. 그러나 진(晉)나라 말기의 문장들은 뜻하는 바가 모호하다. (...)그들은 말하고자 하는 내용에 어울리지 않는 단 하나의 글자, 짧은 문장으로 감정과 생각을 설명하려 했다.

(...) 단 하나의 단어나 짧은 문장으로 표현되어,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모호한 글은, 얼핏 보면 무언가 의미있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들을 전체적인 글의 맥락에서 자세히 헤아려 본다면, 뜻이 성립되지 않거나 아무런 내용도 담고 있지 않은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는 감정을 감추거나 속이는 그릇된 생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남다른 무언가를 과시하고자 하는 문장 작법의 허풍스러운 병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송(宋)나라 이후로 재능 있는 작가들 가운데서 그 어느 누구도 이러한 오류를 바르게 잡으려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이러한 잘못된 습관이 하나의 문학적기풍을 이루고 말았다. 병폐는 하루아침에 형성되지 않는다.(참고: (...)생략한 두 부분은 사례(事例)로, 도무지 맥락상 이해가 되지 않아 생략했다. 원문도 여러 번역문도 그렇다. 심지어 인용 사례의 원전도 실제 어떤 내용인지 내 둔한 능력으로는 찾을 수가 없어서 참조가 불가능했다. 다행히 생략해도 글이 뜻하는 바를 이해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다.)

오늘날 작가들은 대부분 감추거나 꺼리는 금기(禁忌)가 지나치게 많다. 어떤 사람들은 소리가 같거나 비슷한 글자에서 흠을 잡으려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두 단어의 음을 조합해서 하나로 합쳐서 한 단어로 표기하는 글자(反切)에서 꼬투리를 잡기도 한다. 이러한 것들은 옛날에는 논할 가치조차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마땅히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또한 자신의 문장에 다른 사람의 문장과 똑같은 부분이 있으면 삭제해야함이 마땅하다. 만일 다른 사람이 쓴 훌륭한 글귀를 자기가 지은 것처럼 위장한다면, 그것은 보옥(寶玉)이나 대궁(大弓)을 훔친 것과 같아서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의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남의 글을 몽땅 베끼는 짓은 남의 집에 몰래 들어가 남의 궤짝이나 장롱을 통채로 훔치는 도둑질에 다름없으며, 남의 글을 부분적으로 골라서 베끼는 것은 남의 주머니의 물건을 몰래 훔치는 도둑질과 같다. 그러나 표절한 것이 먼 옛날의 작품이라면 문제가 그렇게 커지진 않을지라도, 동시대의 것일 경우 그것은 큰 죄가 된다.

주해(註解)를 다는 목적은 정확하게 사리와 이치를 설명하려는 데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연구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하거나 경솔한 판단이 있을 수 있다. 장형(張衡)은 <서경부(西京賦)>에서 중황백(中黃伯)을 역사(力士)로, 하육(夏育)과 오획(烏獲)을 용사(勇士)로 묘사했다. 그런데 설종(薛宗)은 이들을 가리켜 “환관의 우두머리”라는 잘못된 주(注)를 달았다. 이는 설종이, 그들이 호랑이를 사로잡을 정도로 용맹무쌍한 역사요 용사들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무지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주례(周禮)》에 따르면 우물의 숫자에 따라 세금을 내는데, 우물이 열 개가 되면 삼십 가구로 쳐서 전례(前例)에 따라 말 한 필(匹)을 세금으로 내야 했다. 그런데 응소(應劭)는 ‘필(匹)’ 자를 말의 머리를 측량하거나 말발굽의 길이를 재는 단위라고 해석을 달았다.  이런 엉터리 주해가 어찌 사물을 올바르게 판별하는 해석일 수 있겠는가?

고대로부터 사용된 이 글자의 개념과 정확한 용례를 살펴보면, 수레는 양(輛), 말은 필(匹)이라고 했다. 그런데 양과 필의 개념에는 모두 둘씩 짝을 이룬다는 뜻이 내포돼 있다. 수레는 정거(正車)와 부거(副車)가 서로 짝을 이루며, 수레를 끄는 말의 경우도 가운데에서 끄는 복마(服馬)와 좌우 양쪽에서 끄는 참마(驂馬)가 짝을 이룬다. 복마와 수레는 모두 홀로가 아니므로 그 명칭은 반드시 쌍(雙)이라고 해야 했다. 그러한 명칭은 확정된 후에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가 생겨났는데, 결국은 말 한 마리도 필(匹)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평범한 남녀를 뜻하는 필부필부(匹夫匹婦)의 경우에도 서로 짝을 이루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수레나 말에 관한 명칭의 문제는 사소한 것이라 여겨서 역대 이래로 분명하게 분간하지 못했다. 사(辭)와 부(賦)는 극히 가까운 시대의 일인데도 천리나 되는 오차가 생겼는데, 하물며 경전을 연구하고 고증할 때 어찌 오류가 없을 수 있겠는가? (옮긴이 주: 사(辭)는 가요의 형식을 바탕으로 감정과 정서를 표현한 서정적인 글,  부(賦)는 가요의 형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산문의 수법을 사용하여 사실과 감정을 서술하는 방식의 서사적인 글이다. 원래는 이 둘의 구분없이 사부(辭)라 불렀다고 한다.)

필(匹)이라는 글자를 해석함에 있어 그것을 말의 머리나 발굽을 헤아리는 것이라고 해석하거나, 용사들을 특정하여 언급하며 그들을 환관으로 내몬 것은, 논리의 오류가 사리(事理)에 심하게 어긋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문제들을 사례로 들어 경계로 삼는다.

문장 작법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문제들을 지적한 것은, 이러한 오류들을 각별히 경계(警戒)하기 위함이다. 단청(丹靑)의 색깔은 처음에는 밝고 뚜렷하지만 나중에는 그 빛이 바래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문장이란, 성인의 문장들이 그러하듯이, 오래될수록 더욱 광채를 드러낸다. 그런즉 만일 짧은 시간에 오류를 고치고 다듬을 수만 있다면, 아무리 천년의 세월이 흐른다 해도 부끄러울 것이 없을 것이다.

찬한다. 활의 명인 후예(后羿)가 활을 쏘아 빗나가는 일이 있었고, 말을 다루는 명인 동야직(東野稷)도 말을 몰다가 실수를 한 바가 있었다. 아무리 뛰어난 재주를 지닌 사람이라도 잘못때문에 사과하는 경우가 많다. 기록으로 남은 문장은 어느 한 곳이라도 오류가 있게 되면 천년의 세월이 흘러갈지라도 사라지지 않는다. 문장에 결함이나 오류가 없도록 고치고 다듬는 일은, 선한 일을 하는 것에 버금가는 것이다.

-유협(劉勰, 465~521), 문심조룡(文心雕龍) 제41편 지하(指瑕)-

▲번역글 참조:  『문심조룡(文心雕龍), 유협 저, 이관용· 김정은 역, 올재클래식스, 2016』 , 그리고 『문심조룡, 유협 지음, 성기옥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 2010』 을 참조하였다. 개인적인 이해와 배움의 차원에서 원문과 비교하며 나름 이해하는 글로 다시 정리하여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