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산문, 에세이

[에세이]나쁜 글쓰기의 근원/ 스티븐 핑커

優拙堂 2018. 9. 29. 18:55

The Source of Bad Writing
-The 'curse of knowledge' leads writers to assume their readers know everything they know
('지식의 저주'는 글쓰는 사람들을, 자신들이 아는 모든 것을 그들의 독자들이 알고 있다고 여기도록 이끈다)

왜 이토록 많은 글들이 그렇게도 나쁜가? 정부기관의 공문서나 학술 기사, 혹은 무선 홈 네트워크 설치 지침서 등과 같은 글들이, 이해하기가 그토록 어려운 이유는 무엇때문인가?

이에 대한 가장 대중적인 설명은, 모호하고 불투명한 산문이 의도적으로 선택된 결과라는 것이다. 정부 관료들은 그들 내부의 진짜 속사정을 덮기 위해 두리뭉실하게 횡설수설 하기를 고집한다. 남다른 행색의 전문 작가들은, 그들을 비판하거나 지적질하는 사람들에게, 그들과의 데이트를 거절한 소녀들에게, 뼈있는 모호한 글로써 복수를 가한다. 사이비 지식인들은,  자기들이 아무런 할말이 없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허세와 과장으로 가득찬 애매한 말로써 청중을 정신없게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하여 골탕을 먹이고,  애먹게 하고, 속이는 이러한 이론(the bamboozlement theory)은, 우리들 자신을 곤경에서 피할 수 있게  하는 반면에, 너무 간단하게 다른 사람들을 악마로 만들어 버린다.  인간의 결점을 설명할 때, 그 설명을 위한 첫 도구로써 내가 괸심을 기울인 것은 '핸런의 레이저'(Hanlon's Razor)다. 는 "어리석음에 의해 적절하게 설명되는 악의에 결코 굴복하지 않는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바보스런 어리석음 같은 것(The kind of stupidity)들은 무지함이나 낮은 IQ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사실, 그것으로부터 가장 고통받는 사람은, 가장 똑똑한 사람들이면서 많은 것을 알고 또 가장 먼저 아는 사람들이다.

나는 기술, 오락, 그리고 디자인에 관한 회의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 회의의 일정 중에 일반 대중들을 위하여 생물학을 설명하는 한 강연이 있었다. 이 강연은 석한 수많은 청중들뿐만 아니라 인터넷을 통해서 수백만 명의 일반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공개 촬영을 했다. 강연자는 저명한 생물학자로 DNA 구조와 관련된 그의 최근 연구에서 그가 발견한 중요한 내용을 설명하도록 초대받았다. 그는 그의 동료인 분자 생물 학자들을 대상으로 전문 용어로 가득찬 기술 발표를 시작했다. 그리고 즉각적으로 강연장에 참석한 모든 청중들의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도무지 한 마디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을 그가 하고 있으며, 청중의 시간만을 낭비하고 있다는 것이 강연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분명해진 것이다. 저명한 생물학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 이러한 사실이 뚜렷하게 보였다. 사회자가 중간에 끼어들어 내용을 더 명확하게 설명해 달라고 하자, 그는 정말 놀란 듯 보였고 귀찮은 내색을 전혀 하지 않았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바,  바보스런 어리석음 같은 것(The kind of stupidity)이다.

그것을 가리켜 '지식의 저주'라고 한다. 이는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상상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뜻하는 용어다. 이 용어는 경제학자들에 의해 고안되었다. 사람들이 상대방이 가지고 있지 않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경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협상을 잘 하지 못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심리학자들은 때때로 그것을 "다른 사람의 정신적 상태를 이해하지 못하는 정신적인 병"(mindblindness)이라고 부른다. 교과서적인  실험에서, 한 어린 아이가 실험실에 들어가  M&M 상자(초콜릿 상자)를 발견하고 상자를 연다. 초콜릿 상자 안에서 연필을 발견하고 놀란다. 그 아이는 실험실에 들어가는 또 다른 아이가 초콜렛 상자 안에 연필이 들어 있다는 것을 어떻게든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그 아이는 자신이 그 안에 연필이 들어 있다는 것을 내내 알고 있었다고 말할 것이다!

글 쓰는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독자들은 모른다는 그러한 생각은. 글 쓰는 사람에게는 그리 단순하게 발생하지 않는다.  글 쓰는 사람은 아는 것이지만 독자들은 모르는 것은, 이를테면 그녀가 속한 직업군이  사용하는 전문적인 은어를 그녀의 독자들은 터득하지 않았다는 것, 작가의 입장에서 이야기 하기에 너무 뻔한 것으로 여겨져 생략된 과정들을 독자들은 알아 차릴 수 없다는 것, 작가에게 마치 대낮처럼 뚜렷이 보이는 장면들이지만, 독자들에게는 그것을 뚜렷하게 눈으로 그려 볼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는 것 등이다. 즉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독자들이 모른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기때문에 글쓰는 사람은 굳이 자신이 사용하는 전문용어를 설명하거나, 그 논리를 설명하거나, 이해에 필요한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사항을 제공할 필요가 없다.

지식의 저주를 풀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그것이 어떤 사악한 저주인지를 제대로 알아야만 한다. 마치 술취한 사람이 술에 취한 상태에서 운전하는 것은 미친 짓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조차 불가능한 것처럼, 저주를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저주가 우리를 방해하고 있기때문에, 우리는 저주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30 명의 학생들이 "psych assignment.doc"라는 똑같은 제목을 가진 첨부 파일을 나에게 보낸다. 신뢰할 수있는 여행자 프로그램을 위한 웹 사이트에 가면 나는, 'GOES, Nexus, GlobalEntry, Sentri, Flux 또는 FAST' 등과 같은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버턴식 용어들을 클릭해야할지 말아아할지의 여부를 결정해야만 한다.  내 아파트에는 1초, 2 초 혹은 4초 동안 계속 눌러야 한다거나 때로는 두 번 연거푸 눌러야하는 이해불가한 버튼들로 인해 사용법을 기억할 수 없는 장치가 여기 저기 흩어져 있다. 때로는 보이지 않는 모드에 따라 동작하는 다른 버턴을 눌러서 엉뚱한  일이 벌어지는 경우도 많다.   나는, 그것들이 그것을 설계한 엔지니어들에게는 완벽하게 확실한 것이라는 것을 확신한다.

매일 겪는 이러한 좌절에 수십억 사람들의 경험을 곱해 보면, 여러분은, 지식의 저주가 부패, 질병, 엔트로피(※옮긴이 주:정보 이론에서 '정보의 불확실성을 야기하는 무작위성 또는 무조직성을 이르는 말'로 사용됨)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노력 전반에 널리 퍼져있다는 것을 눈치채기 시작한다. 변호사, 회계사, 컴퓨터 전문가, 전화상담 응답자 등 전문가 그룹의 값비싼 간부들은 제대로 작성되지 않은 듯한 모호하고 빈약한 텍스트들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경제적으로 엄청난 돈을 쏟아 붓고 있다.

옛말에 '못(nail)이 없어서 전투에 패배했다(※옮긴이 주: "못이 없어 말편자를 잃고 편자가 없어서 말을 잃고 말이 없어서 기수를 잃고 기수가 없어서 전쟁에서 패배했다"라는 의미)'는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형용사가 붙지 않아서 발생한 진실도 존재 한다. 크림전쟁 중 라이트 여단의 임무는 군부의 가장 유명한 재난※옮긴이 주:러시아의 강추위와 폭풍, 즉 계절과 날씨 정보를 무시한 결과로 마주친 자연재난때문에 라이트 여단은 거의 전멸했다)의 예일 뿐이다. 1979년 3마일 섬에서 일어난 핵 사고 그리고 수많은 치명적인 비행기 추락 사고의 경우는 부적절한 말의 잘못된 사용(조작자들이 경고등에 붙은 라벨을 잘못 해석함)에서 그 원인이 찾아지는 대표적인 참사 사건들이다. 2000년 대통령 선거에서 팜 비치 유권자들에게 주어진 "버터플라이 투표"는  앨 고어를 지지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잘못된 후보자에게 투표를 하도록 이끌었다. 이때문에 조지 W 부시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돌아섰다고 여겨질 정도로 이 투표는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어떻게 해야 우리가 지식의 저주를 풀 수 있을까? 기존의 조언은 항상 어깨너머로 읽는 사람을 기억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방식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만큼 효과가 없다.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개인적인 생각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단지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자기 자신을 더 열심히 생각해 보는 방식은 훨씬 더 정확하지 않다. 그 사람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 알아내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이다. 그래서 그게 무슨 가치가 있는가. 이것 보세요, 난 당신한테 말하고 있다. 당신의 독자들은, 당신이 내세우는 주제에 대해서,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적게 알고 있다는 말이다. 만일 독자들이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기때문에, 당신이 무슨 말을 하며 또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독자들 스스로 추적하고 검증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독자들을 확실하게 헷갈리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지식의 저주를 떨쳐버리는 더 좋은 방법은, 엔지니어들의 말처럼, 고리를 닫고 독자들의 세계에서 피드백 신호를 받는 것이다. 즉, 당신이 의도한 청중과 비슷한 일부 사람들에게 초안을 보여주고, 그들이 그 초안의 내용을 이해하고 따라갈 수 있는지 여부를 알아 내야만 한다. 사회 심리학자들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가진 생각을 추론하고 추측하는 것에 대해서, 심지어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들조차도, 때로는 망상의 관점에서 그러할 것이라는 자신의 추측을 지나치게 확신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오직 우리가 당사자들에게, 그들이 가진 생각이 무엇인지를 직접 물어볼 때에만, 우리에게 명백한 것이 그들에게는 명백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지식의 저주에서 벗어나는 또 다른 방법은, 글의 내용이 더 이상 친숙하지 않을 정도로 적절하게 충분한 시간이 지난 후에 자신이 쓴 글의 초안을 자신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나처럼 한다면, 즉 "내가 대체 무슨 뜻으로 이렇게 썼지?" 또는 "어떻게 이런 식으로 나간거지?" 또는 "누가 이 쓰레기글을 쓴거야? "라고 생각하는 당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작가에게 일련의 생각들이 일어나는 형태는, 독자에 의해 흡수될 수 있는 형태와 다르다. 글쓰기의 충고는,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한 조언이 아니라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에 대한 조언이다.

글쓰기에 관한 수많은 조언들은, 마치 좋은 작가가 되는 것이 당신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 것처럼 도덕적 조언의 어조를 담고 있다. 불행히도 우주의 정의로 따지자면, 재능 있는 수많은 작가들은 비열한 악당들이고, 어설픈 수많은 작가들이 지구의 소금이다. 그러나 지식의 저주를 극복하기위한 긴급한 요구는 건전한 도덕적 조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글 쓰는 사람을 위한 진정한 충고가 될 수 있다. 즉, 항상 자신의 편협한 사고방식과 마음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지를 찾아라. 그것은 모든 삶의 모든 영역에서 당신을 좀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지는 못할지라도, 당신의 글을 대하는 독자들에게 지속적인 친절을 베푸는 원천이 될 것이다.

▲원문출처: ☞THE WALL STREET JOURN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