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형암 이덕무

내 앞에도 내가 없고 내 뒤에도 내가 없다

優拙堂 2017. 12. 20. 11:31

석록(石綠, 공작석, 녹색)으로 눈동자를 새겨 넣고 유금(乳金)으로 날개를 물들인 나비가 붉은 꽃받침에 앉아 펄럭펄럭 긴 수염을 나부끼고 있다. 영악한 날개깃을 드러나지 않게 엿보며 총명한 어린아이가 오랫동안 도모하다가 갑자기 때리고 문득 낚아챘지만 살아 있는 나비가 아니요 저 그림속의 나비였도다. 


아무리 진짜에 가깝고 몹시 닮아 거의 같다고 해도 모두 제이(第二)의 위치에 자리할 뿐이네. 또한 진짜에 가깝고 몹시 닮아 거의 같은 것이 어디에서 기원(起源)하는지 살펴보라! 


본바탕을 먼저 엿보아야 가짜로 인해 구속당하지 않으니 만 가지 종류의 온갖 사물은 이 나비의 비유를 본보기로 삼을 만하다.병효(讚之一 植眞): 진짜를 심음》


인간의 큰 근심은 혼돈이 뚫린 태초부터 발생하여 꾸미고 수식함은 넘쳐나고 진실과 소비함은 사라졌다. 색(色)에 곯고 재물을 탐하며, 눈짓으로 말하고 이마로 꿈쩍이며, 혀를 부드럽게 굴려 달콤한 말 꾸며내고, 뱃속과는 반대의 말로 칼날을 숨긴다. 


앞에서는 절하고 뒤에서는 비판하며, 벗이라고 끌어다가 면전에서 망신주니 빼어난 기상은 허물로 잉태하고 화려한 재능은 횡액을 불러들인다. 선비가 장사치의 돈꿰미를 탐내고, 사나이가 아녀자의 수건을 뒤집어쓰고 있다. 어째서 품성(品性)의 배양(培養)을 잊는 것일까? 복록(福祿)이 사라질까 두려워 한다.병효(讚之三 病殽): 미혹의 거부》


변화의 계기는 매인데 없고 계승과 혁신은 늘 새롭게 일어난다. 구속받는 선비는 좁은 문견으로 옛사람이 뱉어놓은 말만을 귀하게 여기지만, 한 단계를 뛰어 넘기는 커녕 늘 얼마쯤 뒤떨어져 있다. 남의 걸음걸이를 배우다 보면 오히려 절뚝거리게 되고, 서시를 흉내내려 이맛살을 지푸린다.


위대한 작가는 진실을 꿰뚫어보고서 썩은 것과 낡은 것을 씻어 던지니 말의 외양을 무시하여 천리마를 얻은 구방고처럼 옛 것과 지금 것을 저울질하는 그의 눈동자는 크고도 진실하다.《누진(讚之六 耨陳): 진부함의 제거》


옛 사람은 보지 못하고 뒤에 올 현인은 보지 못한다. 멀리 떨어져 어울리지 못하나 속 마음을 누구에게 털어 놓나?  크나큰 인연으로 같은 세상에 태어난 벗과 한가롭게 얼굴 맞대고서 가슴 활짝 열어 보인다. 


안방을 같이 쓰지 않는 아내요, 동기가 아닌 형제 사이니 살아서는 괄시하지 않고 죽어서는 뜨거운 눈물 흘린다. 학문은 보태주고 재능은 장려하며 허물은 질책하고 가난은 구제하건만 기생충 같은 놈들은 뱃속에 시기심채워 등 뒤에서 헐뜯는다.간유(讚之七 簡遊): 벗의 선택》


내 앞에도 내가 없고 내 뒤에도 내가 없다. 무에서 왔다가 다시 무로 되돌아간다. 많지도 않은 오직 나 혼자이니 얽매일 것도 구속될 것도 없다. 갑자기 젖을 먹던 내가 어느 사이 수염이 자라고, 어느 사이 늙어 버리니, 또 어느 사이 죽음을 맞는다. 


큰 바둑판을 앞에 두고 호기롭게 흑백의 돌을 던지는 듯 큰 연회 무대 위에서 헐렁한 옷을 입은 꼭두각시인 듯 조급해 하지도 않고 화도 내지 않으며 하늘을 따라서 즐기기라.희환(讚之八 戱寰): 우주의 희롱》


-이덕무(李德懋, 1741~ 1793), ‘적언찬병서(適言讚幷序)’중에서 부분발췌, 『병세집(幷世集, 윤광심(尹光心)의 문집)』- 


▲번역글 출처: 『조선의 명문장가들』(안대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6년)


※사족: 이덕무 선생의 적언찬(適言讚)병서(幷序)의 부분이다. '적언찬(適言讚)'은, 삶을 적절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마땅히 바라고 지켜야할 것들을 8가지로 제시하여 윤광심(尹光心, 1751~1817)에게 준 글이다. 식진(植眞),관명(觀命),병효(病殽),둔훼(遯毁),이령(怡靈),누진(耨陳),간유(簡遊),희환(戱寰)의 여덟단계다. 선생은 글의 서두에서, "‘적(適)’이라는 것은 즐거움이며 편안함이다. 나의 삶을 즐기고 나의 본분을 편안하게 여긴다는 뜻이다. 또한 적언(適言)이란 적연(適然)이다. 적연이라는 말은 ‘억지로 힘써 하는 것이 아니다’는 뜻이다."라고 적시하였다. 여기에 이 글의 요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