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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산문] 한갓 문장만을 가지고서 그 사람됨을 인정할 수 없는 일 / 이색

맹자(孟子)가 상우(尙友 옛사람과 벗하는 것)에 대해서 논하여 말하기를, “그의 시를 낭송하고 그의 글을 읽으면서도 그의 사람됨을 모른대서야 말이 되겠는가. 그래서 그의 당세의 삶을 논하게 되는 것이다.(맹자, 萬章下)” 라고 하였는데, 문장을 논할 때에도 이와 같이 해야 마땅하다고 내가 일찍부터 생각해 왔다. 문장이란 사람의 말 가운데에서도 정련(精鍊, 정성들여 고르고 다듬고 잘 훈련함)되어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말이라는 것은 모두가 꼭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고 할 수도 없고, 일을 행한 실상을 모두 대변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한(漢)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와 양자운(揚子雲 양웅(揚雄)), 그리고 당(唐)나라의 유종원(柳宗元)이나 송(宋)나라의 왕안석(王安石) 같..

[고전산문] 나를 판단하고 비난하는 사람에게 답함 / 허균

갓을 쓴 풍채가 좋고 의기가 당당해 보이는 사람이 나에게 힐문하였다. "그대는 문장을 지녔고 벼슬은 높은 지위에 이르렀다. 높은 지위에 걸맞는 관과 넓은 띠를 하고 임금님을 모실 적에는, 큰 길에 나서면 종자들이 구름처럼 옹위하여 뭇 행인들을 호령하며 앞길을 정리(呵導)했다. 공적인 사귐에 있어서는 지위에 걸맞게 당연히 공경 재상과 한 무리가 되어 서로 어울려 나라 위한 모의(謀議)를 함께 하였다. 이럴진대 그대가 마음만 먹는다면 서열과 단계를 뛰어 넘어 권력을 붙잡고 일신에 호화로운 생활 누릴 수 있었건만, 어찌하여 조회만 마치면 입 다물고 바보처럼 하고 다니는가?세상 이치에 밝고 명성있는 현명한 사람은 자네를 찾아 오는 일은 없고, 천박하고 기이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느니 어찌된 일인가. 게중엔 얼굴..

[고전산문] 밖에서 온 이야기에 마음이 흔들려서야 / 신익성

보내준 편지를 받으니 논란하는 내용이 종이에 가득한데 억양이 반복되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드넓으니, 이른바 은하수의 끝을 알 수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팽조(彭祖)의 윤정(輪井)은 지극한 보신책이요, 공자의 불혹(不惑)은 성대한 도덕이며, 맹자가 주읍(晝邑)으로 나간 일과 증자의 어머니가 베틀북을 던진 일은 모두 상황에 따른 당연한 이치입니다*. 위험한 담장 아래 서지 말라는 훈계와 후환에 대한 염려*는 모두 이유가 있어서 하신 말씀이니, 후세 사람으로서는 가슴에 새기고 따라야 마땅합니다. 공자는 위대한 성인이고 증자와 맹자는 성인에 버금가는 사람이며 팽조는 지인(至人)입니다. 만약 옛 성인과 지인의 출처와 언행을 갑자기 보통 사람에게 요구한다면, 어찌 구릉이 태산처럼 높아지지 못하고 냇물이 바다처..

[고전산문] 세상사는 바둑판과 같다 / 윤기

문(問): 사람들은 늘상 ‘당국자는 판단이 흐리다(當局者迷, '바둑을 두는 당사자는 살피지 못하는 것일지라도 옆에서 훈수두는 사람은 그것을 살필 수 있다'(當局者迷, 旁觀見審)라는 고사에서 유래)’라고 말들 한다. 판국을 맡아서 판단이 흐려진다면, 반드시 당국자가 아닌 뒤에야 사업을 완수할 수 있는 것인가? (옮긴이 주: 당국자(當局者), '그 일을 직접 맡아 처리하는 자리에 있는 당사자') 답(答): 사람들은 모두 ‘당국자는 판단이 흐리다.’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저는 남들과 달리 ‘당국자라야 판단이 흐리지 않으니, 당국자가 아닌 몸으로서 당국자를 두고 판단이 흐리다고 하는 자가 사리에 어두운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세상사는 바둑판과 같습니다. 판이 갈려 새 판이 ..

[고전산문] 백성을 위하고 염려하는 일 / 이현일

왕이 된 자는 백성을 하늘로 삼고, 백성은 먹을거리를 하늘로 삼는다. 그렇기 때문에 자고로 인성(仁聖)한 임금은 백성과 먹을거리를 중하게 여기지 않은 적이 없어서 재물을 만들어 내고 식량을 풍족하게 하는 방도에 그 힘을 다하지 않은 바가 없었고, 또 반드시 예비로 저축하여 어렵고 위급할 때를 대비하였다. 주(周)나라에서 현(縣)과 도(都)에 축적해 둔 것과 수(隋)나라와 당(唐)나라에서 의창(義倉)에 비축해 둔 것이 모두 흉년과 재해를 대비하는 것이었으니, 백성을 위해 염려한 것이 치밀하고 극진하지 않은가. 천재(天災)가 유행하여 사방이 번갈아 가며 흉년이 들어 새 곡식이 나오기 전에 묵은 곡식이 떨어져 공사(公私) 간에 모두 고갈되었고, 심지어 전답을 팔고 자식을 팔아도 먹고살 수 없어서 쪽박을 들고 ..

[고전산문] 기뻐서 움직이고 움직여 기뻐하는 것은 그 끝이 흉하기 마련이다 / 이현일

“귀매괘(歸妹卦)는 소녀(少女)가 장남(長男)을 따르는 괘입니다. 여자가 남자를 따르는 것이 꼭 안 좋은 것은 아니지만, 괘덕(卦德)으로 말해 보면 기뻐서 움직이고 움직여 기뻐하는 뜻이 있기 때문에 ‘가면 흉하다.(征凶 정흉)’라는 경계가 있는 것입니다. 무릇 기뻐서 움직이고 움직여 기뻐하는 것은 부부로 말하자면 정욕(情欲)과 연안(宴安, 몸이 한가하고 마음이 편안하게 즐기는 것, 안일, 방탕의 뜻을 포함)의 사사로움이 있고 엄격하고 공경하며 장중하고 엄숙한 덕은 없는 것이며, 붕우로 말하자면 비위를 잘 맞추고 입에 발린 말만 잘 하는 해악이 있고, 정직하고 진실하고 간곡하게 권면해 주는 보탬은 없는 것이며, 군주와 신하로 말하자면 아부하고 영합하고 순종하여 따르는 태도만 있고 충심으로 곧은 말을 하여 ..

[고전산문] 학문에 해를 끼치는 6가지 / 이현일

갑신년(1644, 인조22), 내 나이 이미 18세이다. 이제 또 한 해가 저물어 간다. 이에 무어라 일컬을 만한 것이 없는 지난날을 두려운 마음으로 점검해 보고, 인하여 보잘것없는 나의 행적에 탄식하였다. 이에 경계하는 글을 짓는다. 옛사람들은 학문을 할 때에 아주 짧은 시간도 아껴서, 잠시만 느슨해져도 항상(恒常, 언제나 변함없이 일정하고 한결같음 )이 아니고, 잠깐만 멈추어도 유종(有終, 시작한 일의 끝 혹은 결실)이 없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 때문에 삼가고 조심하는 마음을 종일토록 지니고 있었고, 밤에도 그 마음이 해이해지지 않았다. 한 사람의 몸에 만 가지 이치가 갖추어져 있으니, 이 이치를 따르면 옳게 되고 이 이치를 어기면 어그러지게 된다. 하늘이 이것으로 명하고 사람이 이것을 받은 것이 성..

[고전산문] 사악한 사람도 책을 읽는다 / 박이장

다음과 같이 논한다. 여기에 어떤 사람이 있어, 온몸이 검은데 손가락 하나가 희다면, 희다고 말하면 되겠는가? 안 된다. 손가락 하나가 흰 것이 온몸의 검은 것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검다고 말하면 되겠는가? 역시 안 된다. 흰 것을 아름답게 여겨 검은 것을 숨기면 안 된다. 검은 것을 싫어하여 흰 것을 배척하는 것도 안 된다. 검으면 나는 그것이 검다는 것을 알고 희면 나는 그것이 희다는 것을 안다. 전신을 언급하여 논하면 검고, 손가락 하나를 가리켜서 논하면 희다. 어찌 전신이 검다고 손가락 하나가 흰 것을 가릴 수 있겠는가. 사람의 선악을 논하는 것도 이와 같다. 악한 짓을 하는 사람이라도 한 가지 일이 착하면 이 또한 착한 것이다. 만약 그 사람이 착하지 않다고 그 한 가지 착한 것을 아울러 배..

[고전산문] 문장의 4가지 폐단 / 홍석주

사람의 말로써 표현되는 것, 즉 문장(文, 문채, 무늬)은 하늘과 땅이 본연의 선명한 무늬(文彩)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마음속에 정(情)이 없는 사람은 없다. 마음에 담긴 정(情)은 반드시 드러나게 마련이다. 정(情)이 드러나 겉으로 표현된 것이 말이다. 표현된 말은 그 뜻이 전달되지 않을 수 없다. 표현된 말의 뜻이 전달되면 그것이 곧 문장이 된다. 그러나 그 말이 조리 있게 질서를 갖추지 않으면 문장이라 할 수 없다. 말이 부족하여 사람들이 그 뜻을 분명하게 알 수 없는 것, 이 또한 문장이라 할 수 없다. 말이 전해져도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살펴볼만 한 것이 없다면, 이 역시 문장이라 할 수 없다. 말을 신중하게 삼가지 않아 사람의 마음을 산만하게 하는 것, 말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 그 뜻..

[고전산문] 내게 달린 것에 최선을 다할 뿐 / 홍석주

모계위(茅季韋, 밭을 갈며 생활했다는 高士, 포박자외편에 나온다)가 한 여름에 들에 나가 김을 매다가 틈이 나자 밭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었다. 밭두둑 사이에 그늘이 좋은 큰 나무가 있었는데, 아침에 그늘이 서쪽으로 지면 사람들이 앞다투어 그 아래로 가고, 얼마 뒤에 해를 따라 그늘이 동편으로 옮겨가면, 모두들 떠들썩하게 동편으로 몰려갔다. 뒤처져 온 이들 중에는 자리다툼에 신발을 잃거나 발꿈치를 상한 자도 계속 이어졌다. 그러던 와중에 그늘에 다닥다닥 모여 앉은 자들이 들판에 홀로 우두커니 서 있는 모계위(茅季韋)를 일제히 바라다보았다. 그러다가 한 사람이 모계위에게 말하기를, “저번에 그대는 동편에 홀로 서 있더니 이제 서편에 홀로 서 있다. 군자라고 자부하는 이가 어찌 그리도 지조가 없는가?” 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