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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차제(讀書次第 ):독서는 의지가 중요하고, 재능은 다음이다

옛날 구양영숙(歐陽永叔 구양수(歐陽脩))이 계자법(計字法)을 만들고 정단례(程端禮)가 분년법(分年法)을 만들었는데 후학들이 그 말을 따랐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다만 차례만 정하여 선후의 순서를 잃지 않게 하느니만 못하다. 그 성취가 이르고 늦거나 높고 낮음은 사람의 의지와 재주에 달린 것이다. 오호라! 주자(朱子)는 나의 스승이다. 독서에 대하여 “몸을 바르게 하고 서책을 마주하여 상세히 글자를 보고 자세하고 분명하게 읽어야 한다. 모름지기 글자마다 또박또박 크게 읽고 한 글자라도 틀리거나, 소홀히 여기거나, 크게 보거나, 거꾸로 보아선 안 되고 억지로 암기해서도 안 된다. 오직 많이 읽어 자연히 입에 붙어서 오래되어도 잊지 않아야 한다.”라고 하면서, 고인들이 말한 “천 번을 읽으면 그 뜻이 저절로..

문장은 뜻이 통하기만 하면 된다

저는 재주가 노둔하고 성품이 게을러 학문과 문장에 뜻은 있으나 능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감히 잘하지 못하는 것을 억지로 하여 남에게 보이고 알아주기를 꾀하지 않는데, 사람들도 이런 저를 문장가로 대하지 않습니다. 전에 한번은 학문과 문장에 대해 논쟁하는 자들이 거리낌 없이 떠들어 대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 저는 그 자리에서도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으니, 학문과 문장에 대한 식견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족하(足下)께서 주신 편지에 문장을 논하셨는데, 이 어찌 제가 본디 문장을 논하는 축에 끼지 못하는 사람임을 모르시어 고명한 견해를 지니고도 어리석은 사람의 천려일득(千慮一得, 사기 회음후열전에 나오는 내용으로, '어리석은 사람일지라도 천번을 생각하다보면 한번은 얻을만한 깨달음이 있다'는..

독서와 문장

세상에서 문장의 우열(優劣)은 독서량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다고들 한다. 그러나 꼭 그렇지는 않은데, 이것은 어째서인가? 문장을 잘 말하는 자는 공을 하늘에 돌리지 않고 반드시 사람에게 돌리니, 사람의 솜씨가 하늘의 조화를 빼앗을 수 있을 뿐만이 아닙니다. 예로부터 문장가로서 타고난 재능이 표일하여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이가 있기는 했습니다만, 요컨대 모두 독서하는 선비입니다. 독서를 외면하고 문장을 말하는 자는 모두 문장을 모르는 자입니다. 아! 독서를 한다면 오하(吳下)의 아몽(阿蒙, 손권의 무장 여몽을 가르킨다. 손권의 권유로 늦게 전장의 군문에서 틈틈이 독서를 매진하여 뛰어난 식견을 가짐)도 괄목상대하는 유익함이 있을 것이고, 독서를 하지 않는다면 글자를 모르는 안천추(安千秋, 고대에 용맹을 ..

관시설(觀市說): 남의 말이나 소문만 듣고도 맹종하는 어리석음

내가 일이 있어 광주(廣州)에 갈 적에 인천(仁川)을 지나다가 시장에서 잠시 쉬게 되었다. 그날 시장에 모여든 장사치가 아마 천 명은 되었는데, 저마다 싸게 떼어 온 물건을 팔며 조금이라도 이문을 남기고 손해 보지 않으려고 흥정하느라 떠들썩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한 사람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자 시장 사람들이 모두 팔던 물건을 팽개치고 덩달아 도망가서 시장이 온통 아수라장이 되었다. 어떤 사람은 백 보, 어떤 사람은 오십 보쯤 도망가다 멈추고는 그제야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서로 까닭을 물어보았다. 그들은 애초에 자신이 무엇 때문에 놀라 도망가게 되었는지 몰랐던 것이다. 내가 괴이하게 여겨 물어보았으나 모두 영문을 몰랐는데, 나무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가 앞으로 나서며 말하였다. “아까 노루 한 마리가 산에서..

명성과 사심(私心)이 평가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나의 벗 아무개(某)가 누명을 쓰고 고을 수령에게 미움을 사 감옥(獄)에 갇혔는데, 우물에 빠진 사람을 보고 돌을 던지듯이 그 틈을 타 위해(危害)를 가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동아줄을 내려 주듯이 구원의 손길을 보내는 이는 없었다. 친척과 친구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혀를 찰 뿐이었다. 그런데 그의 지친(至親) 중 한 사람이 그가 억울하게 구속된 것을 불쌍히 여기고 구원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옥중의 아무는 평소 내가 믿고 존경하던 사람이라 문장을 짓고 윤색할 때면 심부름꾼을 통해 서신을 주고받으며 조언을 구하곤 하였다. 하루는 그가 나에게 말을 전해 왔다. “나는 지병(持病)이 있는 몸으로 횡액을 당하여 오랫동안 감옥에 갇혀 있소. 이런 사정을 수령에게 알려 선처를 구하고 싶으니, 그대가 나를 ..

서측자설(抒廁者說): 똥푸는 자 이야기-피장파장

똥을 푸는 자가 종일토록 한 짐 퍼서 농부에게 돌아가면 농부는 돈을 주고 이를 사는데, 그 이익으로 처자식까지 먹여 살릴 수 있다. 한번은 저물녘에 돌아갈 때였다. 깊은 산자락 천토(淺土, 임시로 매장하는 무덤으로 사용되는 땅)로 들어가다가 아는 사람을 만났는데, 쇠망치를 휘두르며 천토 속으로 들어가 힘을 다해 도굴하는 것이었다. 이를 본 그가 비웃으며 조롱하기를, “자네가 이런 일을 하는가? 위험한 일이 아닌가? 자네가 이미 사람으로서 차마 할 수 없는 짓을 차마 하고 있으니, 만약 관리가 몰래 보고 있다가 덮치기라도 하면 그 화가 적지 않을 텐데.” 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똑바로 바라보며 말하였다. “자네는 자네가 하던 일이나 하게. 어찌 남의 이익을 시기하여 이런 말로 겁을 주는가? 내가 처음에는..

관규여측(管窺蠡測 ):대나무 통으로 하늘을 보고 표주박으로 바닷물을 헤아린다

공자는 생이지지(生而知之, 나면서부터 이치를 앎)의 성인이면서 오히려 노자(老子)에게 예를 물었고, 담자(郯子)에게 관직에 대해 물었으며, 사양(師襄)에게 거문고를 배웠다. 안자(晏子, 제나라의 재상인 안영)는 아성(亞聖)이라 학식이 많으면서도 오히려 학식이 적은 이에게 물었고, 능하면서도 능하지 못한 이에게 물었으니, 배우기를 좋아하여 일정한 스승이 없음이 이와 같았다. 지금 사람들은 서사(書史)를 약간 섭렵하면 곧 함부로 잘난 체하여 나만 옳고 남은 그르다 생각하고, 기이한 문장을 발견하면 세상에서 빼어난 학자로 여기고, 어려운 글자를 기억해내면 남보다 뛰어난 견해인 양 여기고, 우연히 세상에서 오독(誤讀)하던 글자의 독음이라도 깨달으면 그들의 무식함을 비웃지만 자신도 오독하는 것이 무수한 줄 알지 ..

부끄러움에 대하여

맹자가 “부끄러움은 사람에게 있어 매우 중대하다.〔恥之於人大矣〕”라고 하였다. 부끄러움은 사단 중에 하나요 사유(四維)의 마지막 덕목인데, 유독 이것을 들어 중대하다고 한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부끄러움〔恥〕은 성(性, 본성)에서 발로한 것이니 사람에게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잘 쓰면 군자가 되고 잘못 쓰면 소인이 됩니다. 부끄러움은 하나입니다. 터럭만큼의 차이가 천리(千里)로 어긋나게 되니, 부끄러움을 어떻게 쓰는가에 있을 뿐입니다. 사람은 몸이 있으면 마음이 있고, 마음이 있으면 부끄러움이 있는 법입니다. 선을 듣고서 자신이 부족하다는 마음이 들면 이것이 부끄러움이고, 허물을 듣고서 수치스런 마음이 들면 이것이 부끄러움이니, 행하여 마음에 떳떳치 못한 점이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부끄럽지 않은 것이 없..

관주설(觀舟說): 배는 물이 아니면 다닐 수 없고 훌륭한 사공은 세찬 풍랑에 주저하거나 포기함이 없다

나는 요즘 탁영정(濯纓亭)에 우거(寓​居)하고 있는데, 탁영정은 도성 서쪽에 위치하여 긴 강을 굽어보고 있다. 강을 오르내리는 돛단배들이 아스라이 처마를 스치며 지나가는데 크고 작고 높고 낮은 모습들이 헛것인 듯, 그림인 듯 은은하다. 날마다 난간에 기대어 이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왠지 모르게 마음에 맞아 기분이 좋아진다. 배는 일개 무정물(無情物)에 불과하건만 어쩌면 이리도 우리네 학문 수양과 닮았는지! 튼튼하고 질박한 모습은 인(仁)에 가깝고, 밀물과 썰물에 따라 오가는 것은 신(信)에 가깝다. 가운데를 비워 외물(外物)을 받아들이는 것은 군자의 넓은 도량이 아니겠는가? 무거운 것을 싣고 멀리 가는 것은 죽은 뒤에야 그만두는 군자의 공부가 아니겠는가? 가까이는 물가에서 움직이고 멀리는 수평선까지 가는 ..

벙어리가 되기로 맹세하다

벙어리가 되기로 맹세하다〔誓瘖〕 무명자(無名子)는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해 어두워 아는 지식이 없고 도모하는 일도 없으니, 천하에서 쓸모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억지로라도 말을 하면, 그 말을 반드시 실천할 수 없어 한갓 일에 방해가 되고 화합만 잃을 뿐이다. 그러므로 묻고 답하는 것과 나에게 절실하여 말을 하지 않아선 안 될 경우가 아니면 맹세코 다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아 치롱(癡聾, 어리석고 귀먹은 사람)의 본색을 잃지 않기를 바라노라. 또 혹 손님이 왔을 때, 인사를 주고받고는 곧 입을 닫고 가만히 있으면 내가 그를 무시한다고 여길 것이므로, 전혀 관계가 없는 쓸데없는 말을 뽑아서 주고받는 말을 대비하고, 그 밖에는 조용히 앉아 책을 보면서, 있으면 먹고 없으면 기한(飢寒, 배고픔과 추위)을 참을 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