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마음에서 우러나와 글이 되는 것

(상략)글(文)과 도(道, 도리, 이치, 도덕)의 관계를 과연 쉽게 말할 수가 있겠는가. 대저 글과 도는 상호 쓰임이 되니, 이러한 관계를 벗어난다면 그것은 글이 아니다. 삼대(三代) 이전에는 이러한 도가 크게 행해져서 글은 곧 말이요 말은 곧 법이었으며 법은 곧 말이요 말은 곧 글이었으니, 《서경(書經)》의 전(典)ㆍ고(誥)ㆍ모(謨)ㆍ훈(訓)이 모두 이러한 것들이었다.


그런데 삼대가 쇠하고 나서는 도(道)가 위에 있지 않게 되었으므로 우리 공자(孔子)께서 하늘이 내신 성인의 자질을 가지고 몸소 전술(傳述)하고 창작(創作)하는 일을 맡으셨다. 그리고 예컨대 “글을 지을 때에는 성실함에 입각해야 한다.(修辭立其誠)(주역/건괘(乾卦) 문언(文言))”라든가, “말은 의미를 통하게 하면 된다.(辭達而已矣)”(논어 위령공 제40장)라든가, “글은 누구나 알 수 있도록 분명하게 지어야 한다.(文明而止)(주역/비괘(賁卦) 단전(彖傳))”라는 내용을 여러 번 말씀하셨는데, 여기에서 통하게 한다는 것은 세상을 다스리기 위한 것(經世 경세)이고, 분명하게 지어야 한다는 것은 후세에 교훈을 전하기 위한 것(垂世 수세)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세도(世道)가 혼란해지면서 글이라는 것도 도를 싣지 않은 빈 수레가 되고 말았는데, 그런 가운데에서도 제갈공명(諸葛孔明)이 삼대(三代)의 기상을 떨치며 두 개의 출사표(出師表)를 지은 것은 《서경》의 훈(訓)ㆍ명(命)과 방불한 것으로서 글과 도가 분리되지 않았다는 평가를 내릴 만하다. 그리고 후대의 한유(韓愈), 구양수(歐陽脩), 소식(蘇軾), 증공(曾鞏) 등 몇 명의 군자에 대해서 “글을 통해 도를 깨닫게 하였다.”라고 평한 것도 진정 과장된 말은 아니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밖에는 각 시대마다 제자(諸子)가 수풀처럼 일어서고 구름처럼 모여들었지만, 그네들이 이리저리 짜 맞추고 아름다운 글귀를 인용한 것들이 비록 현란한 것 일색이고 구미에 맞도록 잘 요리를 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양(羊)의 몸통에 호랑이 가죽만 덮어씌운 것과 같았으니, 말은 의미를 통하게 하면 되고 글은 누구나 알 수 있도록 분명하게 지어야 한다는 정신이 도대체 어디에 있다고 하겠는가.(중략)


공(公, 계곡선생 장유)이 언젠가 말하기를 “나는 명민하지 못하다. 그래서 절구(絶句)를 짓고자 하면 반드시 절구를 읽고 율시(律詩)를 짓고자 하면 반드시 율시를 읽는다.”라고 하였다. 이는 실로 글을 지을 때에는 성실함에 입각해야 한다는 말씀을 독실히 행하는 것으로서, 내가 귀로 처음 듣고 눈으로 처음 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 일찍이 나를 허여하면서 이르기를 “내가 운(韻)은 능하지 못해도 치(致)는 있는데, 운은 천부적인 능력에 속하고 치는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미상불 마음으로 굴복하고 성심으로 복종하면서 공의 이 말씀을 법령처럼 받들었다. 


상군(相君)이 규구(葵丘)에서 맹약을 주관하며 손으로 소의 귀를 잡았을 적에*, 문필에 종사하는 인사들 거의 모두가 공의 휘하에 있었다. 그런데 나는 때때로 공과 토론을 벌이는 일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여기에는 또한 이유가 있다. 나는 일찍 부마(駙馬)가 되어 벼슬길이 막혀서 임금의 윤음(綸音)을 받고 기쁘게 참여할 길이 없었으므로, 후세에 전할 문장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해 보게 되었고, 그러한 문장을 짓기 위해서는 장차 독특하게 구상을 하며 옛것에 뜻을 두고서 거기에서 소재를 찾고 법도를 취해야 한다는 주장 쪽에 기울어져 있었는데, 공은 그렇지 않다고 지적하면서 “글은 곧 말이니, 말이 마음에서 우러나와 글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글을 지어도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면 그것은 제대로 된 글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공의 그 말에 대해서 삼가 고맙게 생각하면서도 나의 생각을 버리지 못한 것은, 실로 수릉(壽陵) 사람이 걸음마를 배우는 격*이 되지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아, 공은 진실된 마음에 뿌리를 두고 진실된 학문에 근거하여 글과 도가 서로 어우러져 쓰임이 되게 하였으며, 사람의 기교와 자연의 조화가 모두 수렴되어 둘 다 온전함을 얻게 하였다. 그리하여 글을 통해 도를 깨닫게 한 정도일 뿐만이 아니게 되었고 보면, 한유(韓愈), 구양수(歐陽脩), 소식(蘇軾), 증공(曾鞏) 등도 아마 뒤에서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놀란 눈으로 바라볼 것이다. (하략)


※[역자 주] 

1. 상군(相君) ~소의 귀: 계곡이 문단(文壇)의 맹주(盟主)로 일컬어지는 대제학(大提學)이 된 것을 말한다. 규구(葵丘)는 춘추 시대 때 제 환공(齊桓公)이 제후들을 모아 왕실에 충성을 바치기로 맹세한 지역이고, 소의 귀를 잡았다는 것은 회맹(會盟)을 주관한 것을 의미한다. 《春秋左氏傳 僖公 9年, 哀公 17年》

2. 수릉(壽陵) 사람 : 남의 좋은 것을 배우려다 자기가 갖고 있는 것마저 잃어버리는 경우를 의미한다. 《장자(莊子)》 추수(秋水)에 “그대는 한단(邯鄲)에 걸음을 배우러 온 수릉 땅 소년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는가. 그 국도(國都)의 잘 걷는 재주를 터득하기는커녕 옛날의 걸음걸이마저 잃어버렸다네.”라는 말이 나온다.


-박미(朴瀰 1592~1645), ☞'계곡선생집 서문(谿谷先生集序)' 부분, 『계곡집(谿谷集)』/계곡선생집 서문/ 서문(序文)-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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