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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산문] 비록 초라하게 살지라도 / 이가환

만약 현실에서 마주하는 '이것(是, 여기에선 '상황' '처지'를 특정하고 있음, '거시기')’을 능히 즐길 수 있다면, 비록 달팽이집처럼 작고 누추한 집에 살고, 새끼줄 띠를 두른 허름한 옷을 입고, 부스러기 쌀 하나 들어있지 않은 초라한 나물국을 먹더라도 모두 다 즐거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능히 ‘이것(是)’을 즐길 수 없다면, 무기고와 같은 넓은 터에 튼튼하게 벽을 쌓아 큰 집을 짓고,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날마다 온갖 맛있는 음식을 갖추어 먹는 부유하고 풍요로운 상황에 처할지라도 오히려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고 부족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이 집의 주인은 비록 두어 칸 밖에 안 되는 보잘 것 없는 집이라도 비바람을 가릴 수 있으면 족하고, 비록 삼베와 갈포로 만든 옷일지라도 추위와 더위를 막..

[고전산문] 글의 진위(眞僞)를 구별하는 방법 / 이가환

무릇 글을 짓는 것은 초상화(肖像畵)와 같이 오직 비슷하게 할 뿐이다. 또 법률(法律)을 적용하는 것과 같이 마땅하게 할 따름이다. 내가 풍악록(楓嶽錄, 금강산 여행기)을 많이 보았는데, 대개는 과장(誇張)하여 진면목을 잃은 것이 열에 아홉이었다. 또 더러는 깎아 내려서 들은 것에 미치지 못한다고 여겨지는 것이 있었다. 그 의도를 살펴보면, 진짜로 보고나서 그것을 칭찬하고 감탄하는 것이 아니었다. 대부분은 기이한 이론을 세우고자 하여 특이한 것을 찾는 것이었다. (『詩文艸』秋, '宗人熙天東遊錄後跋' 부분) 나는 성품이 우매해서 세상일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데, 오직 문장(文章)에 대해서만은 오랜 경험으로 익숙하다. 그래서 남이 쓴 글을 보면 어렵지않게 그 진위(眞僞)를 구별할 수 있었다. 문장의 진위를 ..

[고전산문]수창기(睡窓記): 잠자는 창

허자는 몹시 가난하여 튼튼하고 조용한 집이 없다. 대신에 골목에 초라하고 자그마한 집 한 채를 겨우 갖고 있다. 집은 사방이 한 길쯤 되는 넓이지만 허자는 겨우 칠 척 단신에 불과하므로 방에서 발을 뻗더라도 남는 공간이 있다. 이보다 넓어 비록 천만 칸이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더구나 창 안으로는 먼지가 들어오지 않고 서책이 죽 꽂혀 있어 마음은 즐겁고 기분은 쾌적하다. 창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모른다. 얼마나 상쾌한가!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한다. “창 밖에서 벌어지는 일은 허자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설사 안다 해도 그가 간여할 일이란 없다. 따라서 잠을 잔다는 핑계를 대고 창 안에 숨어서 ‘잠자는 창(睡窓)’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의 잠을 깨우는 사람으로는 오직 가끔 찾아..

[고전산문]금수거기(禽獸居記): 짐승보다 못한 사람

내가 금화(金化)에 살게 되면서 몇 칸짜리 집을 세내었다. 그 집에서 독서하며 지내던 중 맹자(孟子)가 진상(陳相)에게 말한 대목을 읽고서는 탄식의 말이 터져 나왔다. 정말이지 옛사람은 따라잡을 수가 없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며 편안하게 지내면서 교육을 받지 않는다면 짐승에 가깝게 될 것이다.”라고 맹자는 말씀하셨다. 하지만 그런 자라 해도 오히려 짐승보다 나은 점이 있을 것이다. 반면에 나는 조정에서 쫓겨나 떠돌면서 옷가지와 먹을거리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으니 배부르고 등 따뜻하며 편안하게 지내는 자들과는 처지가 다르다. 옛 성인들의 책을 읽기도 했고, 오늘날의 군자들로부터는 직접 가르침을 받은 것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짐승보다 못하니 ‘짐승에 가깝다’는 말을 어떻게 감히 쓸 수 있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