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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산문]사람을 아는 것과 헤아리는 것은 다르다

지인(知人, 사람을 아는 것)과 측인(測人, 사람을 헤아리는 것)은 다르다 함께 일을 해 봐야만 비로소 사람을 알 수 있고 일을 함께 하기 전에는 단지 사람을 헤아릴 수 있을 뿐이다. 일을 하기 전에 그 사람이 어떠함을 알고 일을 한 뒤에 그 징험(徵驗)이 과연 어김이 없으면, 이것을 일러 사람을 알았다고 하는 것이다. 만일 끝내 증험한 것이 없는데도 사람을 알았다고 한다면, 누군들 사람을 알지 못하겠는가. 일을 하기 전에 그 사람의 종말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헤아리는 것은, 매양 그 사람이 이미 끝낸 일을 인하여 이 일을 미루는 것이다. 혹은 현재 당면하고 있는 운화(運化)의 기회를 미루어 종말의 돌아갈 형세를 미리 재보는 것은 추후의 증험을 바로 기필할 수 없으므로, 이를 일러 사람을 헤아리는 것이..

[고[고전산문] 육체의 눈과 마음

눈은 색(色)을 보고 귀는 소리를 듣지만 그것을 분별하여 취하고 버리는 것은 마음이다. 그러므로 문견(聞見)의 주비아속(周比雅俗)은 다만 듣고 보는 것만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분별하여 취하고 버릴 줄 아는 것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편벽된 사람의 문견(聞見)이라고 어찌 언제나 두루 함께 미치지 못하며, 속된 사람의 문견이라고 어찌 언제나 고아함에 미치지 못하였겠는가? 이는 마음의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같지 않으므로, 취사(取捨)하는 것 역시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혹 이목(耳目)이 채 미치지 못하여 선하게 되지 못한 사람도 있으니, 이는 배우지 않고도 잘하는 사람에게 비견하여 책망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미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도 끝내 선하게 되지 못한 자는 선입관(先入觀)에 ..

[고전산문]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

"물리(物理)에 순응하여 법칙을 따르는 자는 적고, 언제나 자기 소견을 가지고 조작하여 그림자를 참모습으로, 껍데기를 실질로 아는 자가 많다. 그리하여 얻은 것이 잃은 것을 보상하지 못하고 말이 고상하고 난해할수록 도(道)는 더욱 천해져 고집스럽게 변쟁(辯爭)해도 결론이 정해지지 않으니, 어찌 그 근본에 돌아가 그 도를 세우겠는가?" (최한기, 기측체의/추측록서) 본원(本源)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 본원(本源, 사물이나 일따위의 근원)을 확실하게 알면 그것을 고금(옛날이나 지금이나)에 물어도 의심이 없고 천하에 증험해도 어긋남이 없으며, 이것을 구명(究明, 사물이나 현상의 본질이나 원인 따위를 깊이 따지고 연구하여 밝힘)하면 선에 지나치는 것을 찾으려 해도 그 지나침을 볼 수 없고 또한 부족한 점을 찾으..

[고전산문] 사람의 도리(人道)를 모른다면 사람을 헤아릴 수 없다

인모(人貌)ㆍ인기(人氣)ㆍ인심(人心)ㆍ인사(人事)를 통틀어 인도(人道)라 한다. 용모가 비록 귀하게 생겼으나 인도를 모르면 참으로 귀한 용모가 아니며, 품기(稟氣)가 비록 좋으나 인도를 행하지 않으면 참으로 좋은 품기가 아니며, 심법(心法)이 비록 선하나 인도에 통창(通暢, 조리가 밝아 환함)하지 못하면 심법이 선하다고 하기에 부족하며, 행사(行事)가 비록 아름다우나 인도가 갖추어지지 못했으면 어떻게 아름다운 일이라 하겠는가? 용모ㆍ품기ㆍ심법ㆍ행사가 혹시 부족하고 빠진 점이 있더라도 여유가 있는 점은 남에게 보태주고 부족한 점은 남에게 의뢰하면서 인도를 밝히고 인도를 행하여 남이 그의 결함을 모르게 해야 한다. 더군다나 결함이 없을 수 없는 보통 사람이겠는가? 귀(貴, 귀할 귀)는 인도의 귀를 얻는 것보..

[고전산문] 선이든 악이든 마음에 얻은 것이 심덕(心德)이다

심덕(心德)이란 마음의 얻은 것을 말한다. 선(善)에 노력하기를 오래하면 선을 얻게 되고 악(惡)에 젖기를 오래하면 악을 얻게 되니, 선과 악이 비록 다르지만 다같이 심덕(心德)이라 할 수 있다. 성실과 거짓은 바로 학문의 허실(虛實)을 말하며, 순수하고 잡박(雜駁)한 것은 바로 조예(造詣)의 우열(優劣)을 말한 것이다. 누군들 성실은 좋고 허위는 나쁘다는 사실을 모를까마는, 허위에 빠진 사람은 성실이 크게 쓰이는 것을 모르고 혹은 신이(神異)함만을 탐구하거나 혹은 고혹(蠱惑)에만 빠져들어, 자기가 이미 거짓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러나 성실한 사람은 허위(虛僞)란 대단히 좋지 않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아서 성실의 유용함을 독실히 지켜 간다. 조예가 순수한가 잡박한가 하는 문제도 대개 이와 같다...

[고전산문] 사람을 헤아리는 일에 대하여

무사시(無事時, 특별하고 긴박한 일이 없는 일상적인 상황)에 사람을 헤아리는 것이 유사시(有事時)에 사람을 논하는 것과 같지 않으며, 사전에 사람을 논하는 것이 사후에 사람을 논하는 것과 다름이 있다. 무사시에는 다만 용모와 신기(神氣)*로써 품격(品格)을 논설, 장래의 부귀를 들어 기쁘게 하기도 하고 혹은 기대를 걸게 하여 빈천을 면하도록 하며, 혹 격려하여 권장하기도 하고 혹 징계하는 뜻도 있다. 유사시에는 감당할 만한 재기(才器)와 거행할 수 있는 기량(氣量)으로써 원근과 내외(內外)에 방문하고 귀천과 상하에 조사하여, 평소의 심법 행사(心法行事, 마음씀씀이 그리고 실천하고 행하여 드러난 일)와 인물 교접(人物交接, 사람을 대하고 사귀는 태도)을 근거로 삼고, 용모의 귀천 호오(貴賤好惡)와 사기 언..

[고전산문] 사람이 속임을 당하는 것은 그가 바라는 것에 있다

속이고 싶으나 속이기가 어려운 사람은 반드시 그가 하고 싶어하는 점을 이용해서 속일 수 있는 방법을 쓰기 마련이다. 만일 속여야 할 사람이 하고 싶은 일이 없으면, 제아무리 감언(甘言 남의 비위에 맞도록 듣기 좋게 꾸미어 하는 말)ㆍ선사(善辭, 선하고 좋게 표현된 말과 글)를 가지고도 속일 수 없는 것이다. 평소 사리에 명백하여 비도(非道)로는 속이기 어려운 사람도, 반드시 자신의 하고 싶어하는 그 단서로 인하여 남에게 속임을 당하게 되지만, 혹은 그 속임을 당함으로 인하여 더욱 깨닫는 바가 있기도 한다. 속임을 당할 만한 일로 속임을 당하는 것은 대인(大人)으로서도 면할 수 없는 일이라 어찌 족히 누(累)가 되겠는가마는, 만일 속임을 당해서는 아니될 일로 속임을 당하면 이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

[고전산문] 바른 것을 해치는 사람

바른 것을 해치는 사람은 반드시 남을 사악(邪惡, 도리에 어긋나고 악독함)으로 몰고 자신은 정당하다고 자처(自處)하며, 나아가 동류를 불러모으기를 입김을 불러모아 산을 움직이고 모기 소리를 모아 천둥을 이루듯 한다. 비록 상대가 정당한 것을 알아도 기어코 마멸(磨滅, 갈아서 닳아 없어짐)하려 하고, 자신이 정당치 않은 것을 알면서도 반드시 옛 일을 증거로 끌어댄다. 민간의 포폄(褒貶, 칭찬과 나무람, 시비와 선악을 바르게 가름)을 두려워하지 않고 후세의 시비를 생각하지 않으며, 목전의 승부로 사생(死生)을 겨루고 도당을 옹호하고 기치(旗幟, 어떤 목적을 위해 내세우는 주장 혹은 태도)를 세우는 것으로 상공(上功, 으뜸으로 치는 공로)을 삼아, 민심(民心)에 거슬리면 천토(天討, 덕있는 사람이 하늘을 대신..

고전산문] 아는 것과 모르는 것에 대하여

선인들의 문자(글, 저술, 저서, 첵 등등)에도 직접 본 것과 못 본 것,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구분이 있다. 본 것과 아는 것에 대해 쓴 문자에도 오히려 후인들이 이해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니 모르거나 보지 못했던 문자에 대해서는 반드시 사류(事類, 사실적인 사례)를 널리 인용하고 전언(前言, 옛 사람이 한 말)을 많이 원용하여 문자로써 앎을 삼고 언어로 본 것을 삼고 있다. 후세의 초학들이 공부를 시작할 때 대부분 이러한 문자에 따르게 되므로 작자가 직접 보지 않았다는 것은 알지 못하고 연연하여 볼 수 있는 단서를 구하며, 작자가 모르고 있다는 것은 알지 못하고 알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한다. 허욕과 망상이 여기에서부터 생기게 되고 견강 부회(牽強附會, 이치에 맞지 않는 말..

[고전산문] 뜻이 같고 도가 합치되면 어울리고 다르면 공격한다

뜻이 같고 도(道)가 합치되면 서로 이끌어주는 보탬을 기뻐할 것이고, 뜻이 같지 않고 도가 합치되지 않더라도 서로 탁마(琢磨)하는 공(功)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서로 이끌어주면서 애호의 정을 두는 것은 좋으나 과실을 감추고 잘못을 꾸며주는 습관을 들여서는 안 되며, 서로 탁마하면서 오직 좋은 것을 취한다는 생각을 갖는 것은 좋으나 처음부터 배척하고 거절하는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된다. 무릇 예나 지금이나 학문이 같으면 어울리고 다르면 공격하는 자는 단지 학문함에 있어 스스로가 초라하고 치우친 점만을 보여줄 뿐, 절대 긍정이나 절대 부정을 넘어서는 넓은 아량은 가지고 있지 못한다. 학문의 본원(本源)을 천인(天人)의 경상(經常)*에 두어 위배하거나 넘어설 수 없게 한다면, 남이 공격한다 해서 근심할 것이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