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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산문]물결의 흐름을 보고 그 근원의 맑고 흐림을 안다

추측록 서(推測錄序) 하늘을 이어받아 이루어진 것이 인간의 본성[性]이고, 이 본성을 따라 익히는 것이 미룸[推]이며, 미룬 것으로 바르게 재는 것이 헤아림[測]이다. 미룸과 헤아림은 예부터 모든 사람들이 함께 말미암는 대도(大道)다. 그러므로 미룸이 올바르면 헤아림에 방법이 생기고 미룸이 올바르지 못하면 헤아림도 올바르지 못하다. 올바름을 잃은 곳에서는 미룸을 바꾸어 헤아림을 고치고 올바름을 얻는 곳에서는 원위(源委 근본과 말단)를 밝혀서 중정(中正)의 표준을 세울 것이다. 이에 지나치면 허망(虛妄)에 돌아가고, 이에 미치지 못하면 비색(鄙塞: 엉뚱한 곳으로 빠져 막힘)에 빠진다. 아득한 옛날 태호(太昊 상고 시대의 제왕 복희(伏羲)를 말함)가 위로는 하늘을 보고 아래로는 땅을 살펴, 가까이는 자기 몸..

[고전산문] 속임을 당하고도 속은 줄 모르고 사는 것이 부끄러운 것

기만하는 말은 또한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잠시 실적(實蹟)을 빌려 속에 있는 재화를 유인하거나 귀와 눈을 현혹하여 그릇된 길로 끌어들이는 일은, 진실로 창졸간에 나온 속임수이니, 보통 사람이 범하기 쉬운 것인 동시에 또한 쉽게 깨달아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속임을 당한 것을 깨달으면 돌이키는 길이 어렵지 않고 또한 복철지계(覆轍之戒 앞 수레가 넘어지면 뒷 수레는 이것을 보고 경계하는 것이니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음을 말한다)로 삼기에 족하다. 그러나 잘못된 문학(差誤之文學)을 널리 말함으로써 남의 자제를 해롭게 하거나, 백성을 괴롭히는 정령(政令)을 가지고 임금의 도타운 부탁을 저버리는 것은 크나큰 기만이다.(옮긴이 주:맥락상 여기서 '문학 ' 이란, 문(文)과 학(學) 각각의 의미 즉 언어로 표현된..

[고전산문] 남을 아는 것은 자기를 얼마만큼 아느냐에 좌우된다

자신을 아는 것의 천심주편(淺深周偏 얕고 깊음, 두루 넓거나 치우침)은 마땅히 남을 아는 것의 천심주편으로 그 우열(優劣)을 결정하여야 한다. 남을 아는 것이 깊은 사람은 반드시 자신을 아는 것도 깊고, 남을 아는 것이 얕은 사람은 반드시 자신을 아는 것도 얕으며, 두루하고 치우침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을 안다고 하는 것이 어찌 자기의 사정(事情)만 알고 남의 사정을 모르는 것이랴! 자기를 다하고(盡己 진기) 사물까지 다한(盡物 진물)뒤에야 바야흐로 자신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니, 만일 능히 남을 아는 도(道)를 다하지도 못하면서 문득 자신을 밝게 안다 하는 사람은 반드시 식견이 천박하고 치우친 사람이다. 능히 남을 아는 도(道)를 다하는 사람은, 혹 자신을 아는 것에 다하지 못한 것이 있..

[고전산문] 옳고 그름은 바른데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하늘을 이어받아 이루어진 것이 인간의 본성(性)이고, 이 본성을 따라 익히는 것이 미룸(推)이며, 미룬 것으로 바르게 재는 것이 헤아림(測)이다. 미룸과 헤아림은 예부터 모든 사람들이 함께 말미암는 대도(大道)다. 그러므로 미룸이 올바르면 헤아림에 방법이 생기고 미룸이 올바르지 못하면 헤아림도 올바르지 못하다. 올바름을 잃은 곳에서는 미룸을 바꾸어 헤아림을 고치고 올바름을 얻는 곳에서는 원위(源委 근본과 말단)를 밝혀서 중정(中正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고 치우침이 없이 곧고 올바름)의 표준을 세울 것이다. 이에 지나치면 허망(虛妄, 거짓이 많고 근거가 없이 허무한 상태)에 돌아가고, 이에 미치지 못하면 비색(鄙塞, 속되고 천한 상태에 갇혀 버림)에 빠진다.(☞추측록 서) 악을 헤아림(測惡) 악한 말을 쉽..

[고전산문] 좋아하고 미워함을 진실되게 하라

좋아할 만한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일에 유익하기 때문이니 좋아하지 아니하면서 등용하면 반드시 일을 해치게 되고, 미워할 만한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일에 해롭기 때문이니 미워하지 않으면서 물리쳐 내치면 반드시 일을 해치게 된다. 지위가 있는 사람은 직임(職任)으로 일(事)을 삼고, 직위가 없는 선비는 도학으로 일을 삼고, 범민(凡民)은 농업이나 공업이나 상업으로 일을 삼는다. 그러나 일용상행(日用常行, 일상적인 삶의 행위)이나 사람을 기다려서 성사할 수 있는 것(인간관계)에 이르러서는 귀천과 노소할 것 없이 모두 여기에 종사하는 것이니, 일(각자의 삶과 연관된 이해관계)에 따라 좋아하고 미워함은 절로 법칙이 있다. 사람의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은 각각 같지 않으니, 진실한 것을 숭상하는 사람은 진실한 것을 ..

[고전산문] 앎에 방해되는 것을 제거해야 지혜의 문을 열 수 있다

세상에서 늘 쓰는 것인데도 모르는 것을 밝히는 데에는 말이 어쩔 수 없이 많고 상세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이 평소에 행하는 것인데도 어두운 것을 깨우치는 데에는 가르침이 자연 간절하고 깊어야 한다. 정묵(靜黙, 아무말없이 조용하게 있음)을 지켜 남이 알기를 바라지 않는 것은 남이 익히 아는 것에 대하여 말하면 이익은 없고 손해만 있기 때문이다. 겸양(謙讓, 겸손한 태도로 남에게 양보하거나 배려하여 사양함)하여 공을 다른 사람들에게 돌리는 것은 공(功)을 자랑하고 다투어 취하면 남의 시기를 받기가 쉽기 때문이다.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도 있다. 잠자는 사람이 꿈꿀 것을 생각한 적이 없어도 꿈이 생기는 것은 잤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술마시는 사람이 취할 것을 생각한 적이 없어도 취하..

[고전산문] 희로애락이 바른 사람은 그 성품(性)도 바르다

이른바 본연의 성(性)이라는 것은 그 형질(形質)이 이루어지기 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형질이 갖춰진 뒤에도 항상 그 본연의 성(性)이 있는 것이니, 이것은 바로 천지 인물(天地人物)이 다같이 얻는 것으로 기(氣)에 의지하여 존재하게 된 것이다. 사람과 만물의 형질이 갖추어지기 전에는 곧 천지의 이기(理氣)였다가, 그 형질이 이루어진 뒤에야 기(氣)는 질(質)이 되고 이(理)는 성(性)이 되며, 또 그 형질이 없어지게 되면 질은 기(氣)로 돌아가고 성(性)은 이(理)로 돌아가는 것이다. 천지에 있어서는 기(氣)와 이(理)라 하고, 사람과 만물에 있어서는 형(形)과 성(性)이라 한다. 그러니 만일 사람과 만물의 형(形)이 없다면, 무엇으로 그 성(性)을 논할 수 있겠는가.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

[고전산문] 두 종류의 귀머거리

모태(母胎)에서 태어날 때부터의 천성적인 귀머거리는 사람의 말도 물체의 소리도 들을 수 없으니, 적막한 천지요 들리는 것 없는 세계이다. 다른 사람편에서 보면,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 없는 자는 불치의 병신이라 하여 푸대접하나, 사랑과 동정이 있는 이는 불쌍하게 여기고 그를 위해 답답해 하며 이르기를 ‘부모 형제의 말을 어떻게 들으며 물명(物名)이나 글자를 무엇으로써 배우느냐?’고 한다. 사람의 모양을 하고서도 사람의 행동을 못하고, 모든 감각 기관을 갖고도 그 때문에 모두 쓰지 못하게 된다. 귀머거리 쪽에서 보면 ‘사람은 원래 눈으로 보고, 코로 냄새를 맡으며, 입으로 먹고 마시며, 대소변을 배설하고, 손으로 잡으며, 발로 다니니, 여느 사람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갖추고 있는 ..

[고전산문]마음은 소리로 발하고 노래나 글로 표현된다

마음에 감동된 기(氣)가 구멍으로 나와 소리를 이루고, 사리(事理)의 용출(湧出, 치솟아 나옴)하는 소리가 말이 되고, 말이 장(章)을 이룬 것이 글(文)이 되니, 그 말을 듣고 그 글을 읽으면 그 마음에 온축(蘊蓄, 마음속에 깊이 쌓아둠)한 것을 헤아릴 수 있다. 싫어함이 간절하여 소리로 발한 것이 곡(哭)이고, 좋아함이 깊어 소리로 발한 것이 노래가 되니, 노래와 곡을 들으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의 천심(淺深, 깊고 얕음)과 성위(誠僞, 진정성과 꾸밈, 즉 거짓)를 분별할 수 있다. 일찍이 헤아린 바가 있는 것은 그 후에 비슷한 기미(낌새나 조짐)를 만나면 감동하는 것이니, 만약 전일에 헤아린 바가 없으면 어찌 제거(提擧, 어떤 문제에 대하여 말을 꺼냄)하는 것도 없이 발하겠는가? 감동하는 데 미쳐서..

[고전산문] 부귀와 빈천

부귀를 높이고 빈천을 낮추는 것은 보통 사람들이 가지는 보편적인 마음이다. 부귀를 싫어하고 빈천을 즐기는 것은 궁핍하고 가난한 선비가 마음에 가진 뜻을 지키고자 굳세게 다 잡은데서 나오는 격한 감정을 짐작하게 하는 말이다. 보통 사람이면 가질 수 있는 보편적인 마음을 선비의 말에 견주어보면, 전자든 후자든 치우치고 막힌 도량을 각각의 마음으로 깨달은 이치라고 스스로 믿을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어찌 천하 만물 인생사의 섭리가 끊임없이 상호 순환하며 서로 영향을 미치는 것을 전체적으로 헤아려 보는 것만 하겠는가? 인생의 부귀 빈천은 때에 따라 옮겨지므로, 부귀가 빈천으로 바뀌는 수도 있고 빈천이 갑자기 부귀에 오르는 수도 있으니, 눈앞에 당한 높이거나 낮추는 것은 실로 잠시의 일인데 하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