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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산문] 섬김의 세 등급 / 최한기

재물로 남을 섬기는 것은 하등(下等)이요, 일로 남을 섬기는 것은 중등(中等)이요, 도리로 남을 섬기는 것은 상등(上等)이니, 남 섬기는 것을 보아서 그 사람됨을 볼 수 있다. 남을 섬기는 것은 결국 남을 위해서 섬기는 것이 아니고 실은 자기를 위해서 남을 섬기게 되는 것이다. 먼저 노력을 들이고 뒤에 성과를 얻는 것은 인도(人道, 사람됨의 도리)의 당연함이요, 겸손과 공손한 태도로써 남에게 굽히는 것은 사세(事勢, 일이 되어가는 상황 혹은 형편)의 순탄한 바이다. 도리로 섬기거나 일로 섬기지 않고 오직 재물로만 남을 섬긴다면 뇌물이 성행하게 되고 사특한 길이 트이게 된다. 남을 섬기는 자는 그 소원을 얻기 위해서요, 섬김을 받는 자는 남에게 매수된 바 되므로, 자기만이 그릇될 뿐 아니라 또한 남으로 하..

[고전산문] 바른 것을 해치는 사람 / 최한기

바른 것을 해치는 사람은 반드시 남을 사악(邪惡)으로 몰고 자신은 정당하다고 자처(自處)하며, 나아가 동류를 불러모으기를 입김을 불러모아 산을 움직이고 모기 소리를 모아 천둥을 이루듯 한다. 비록 상대가 정당한 것을 알아도 기어코 마멸(磨滅, 갈려서 닳아 없어짐)하려 하고, 자신이 정당치 않은 것을 알면서도 반드시 옛 일을 증거로 끌어댄다. 민간의 포폄(褒貶, 시비의 선악을 가려서 칭찬하거나 나무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후세의 시비를 생각하지 않으며, 목전의 승부로 사생(死生)을 겨루고 도당을 옹호하고 기치(旗幟, 어떤 목적을 위하여 내세우는 태도나 주장)를 세우는 것으로 상공(上功)을 삼아, 민심(民心)에 거슬리면 천토(天討, 왕의 군대가 직접 나서서 처단하고 토벌함)의 벌을 받고 바른 사람을 해치는 것..

[고전산문] 배움이란 무엇인가 / 정약용

배움이란 무엇인가? 배움이라는 것은 깨닫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깨달음이라는 것은 그릇된 점을 깨닫는 것이다. 그릇된 점을 깨닫는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바른 말에서 깨달을 뿐이다. 말을 하는 데 있어서, 쥐를 가리켜 옥덩이[璞, 옥돌 박]라고 말하였다가 이윽고 이를 깨닫고서 말하기를 ‘이것은 쥐이다. 내가 말을 잘못하였다.’ 하고, 또 사슴을 가리켜 말[馬]이라고 말하였다가 이윽고 이를 깨닫고서 말하기를 ‘이것은 사슴이다. 내가 말을 잘못하였다.’ 한다. 그리고 이미 저지른 잘못을 깨닫고 나서 부끄러워하고 뉘우치고, 고쳐야만 이것을 배움이라 하는 것이다. 자기 몸가짐 닦는 것을 배우는 사람은 ‘악한 일은 아무리 작아도 하지 말라.’ 하는데, 글 짓는 것을 배우는 사람도 악한 일은 아무리..

[고전산문] 심은대로 거두기 마련이다 / 이익

(...)요즘 어떤 경전(經典)을 읽고 있습니까? 지난번 그대에게 《주자대전(朱子大全)》에 전적으로 매달리지 말라고 권고를 했는데 얼마 후 그렇게 말한 것을 다시 후회했습니다. 주자서(朱子書)를 읽는 것 역시 유보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성인의 경전은 읽지 않고 지엽적인 책만 보면서 근본적인 것을 놓치고 있는 시속(時俗)을 염려한 것입니다. 지금의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는 매우 훌륭한 책입니다. 그 밖에도 《주문작해(朱文酌海)》와 《절작통편(節酌通編)》이 있어 빠진 내용을 매우 많이 보충하여 거의 물 샐 틈이 없을 정도로 내용을 잘 갖추고 있으므로 굳이 주자의 문집(文集) 전체를 다 읽어서 남을 이겨 보려고 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일입니다. 온 마음을 다해 시속의 요구에 부응하고 지식 자랑으로 남들에..

[고전산문] 배움(學)의 두 측면 / 이익

별지를 받고서 질문의 깊이와 득실을 따지지 않고 자세히 그 내용을 살펴보았더니 생각의 치밀함에 감탄하였습니다. 내 생각을 말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학(學)’이란 본받는다〔效〕는 의미입니다. 저 사람에게 아는 것이 많아서 내가 쫓아가 그의 지식을 본받는 것은 마음의 측면에서 ‘학(學)’을 말한 것입니다. 저 사람에게 터득한 것이 많아서 내가 쫓아가 그의 행동을 본받는 것은 몸의 측면에서 ‘학(學)’을 말한 것입니다. 바야흐로 어떤 일을 본받을 때는 반드시 마음의 힘〔心力〕에 의존하게 되는데, 이것 또한 ‘행(行)’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독서(讀書)를 예로 들면, 책 속에 이미 그 의미를 전술(傳述)해 놓았으므로 이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해 보는 것은 마음의 ‘습(習)’이요, 의미를 이해한 다음에 끊임없..

[고전산문] 하늘과 땅에 부끄럽지 않은 것이 정직이다 / 위백규

섭공이 공자에게 말하였다. “우리 향당 가운데 몸을 정직하게 행동하는 자가 있으니, 그의 아버지가 양(羊)을 훔치자 아들이 그것을 증명하였습니다.” ○공자가 말하였다. “우리 향당의 정직한 자는 이와 다르다. 아버지가 자식을 위하여 숨겨 주고 자식이 아버지를 위하여 숨겨 주니, 정직함은 이 가운데 있는 것이다. 매사에 단지 의리의 당연함을 따른다면, 정직에 뜻을 두지 않아도 절로 정직해진다. 만일 정직에 뜻을 둔다면, 사의(私意, 자기만의 욕심을 채우려는 마음)가 일어나 어디를 가든지 정직할 수 없다. 이 사람이 정직하게 행동하는 것으로 이름이 났다면, 이는 정직에 뜻을 둔 자이니, 어떻게 아버지가 양을 훔친 것을 증명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옮긴이 주: 아버지가 양을 훔친 것을 고발함으로써 자신의 ..

[고전산문] 차라리 스스로 잊는 것이 낫다 / 이익

사람이 친애하는 것을 가깝다고 하고, 가깝다는 것과 반대되는 것을 소원하다고 하는데, 소원함이 심해지면 더러 저버려 절교하고 아예 생각지 않는 데까지 이르기도 한다. 그렇게 된 자는 무릇 좋고 나쁨, 근심과 즐거움이 있어도 아득히 그 기쁨과 슬픔의 감정이 일어나지 않아서 마치 마비된 몸이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너무나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사귀는 벗인 윤 상사(尹上舍) 모씨가 자신의 당(堂)에 양기(兩棄)라고 편액을 달았는데, 그 뜻은 “세상의 서로 친하고 편드는 이들은 부귀와 영화를 위하는 데 불과하니, 분주히 다니면서 즐거움을 나누고 사사로운 이익이 관련되면 절절하여 버리지 못한다. 이것이 비록 빈틈없이 결속한 듯이 보이지만, 그 마음은 단 하루도 이반(離反, 사이가 벌어져 서로..

[고전산문] 행사의 시비분별, 반성과 성찰을 통해 마땅히 옳은 것을 따른다 / 이언적

삼가 생각건대 저는 자질이 본래 우둔하고 학문적인 식견도 넓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좁은 견해를 고수하여 여러 차례 어르신에게 편지를 올리면서도 매우 지리멸렬한 줄을 깨닫지 못했으니, 큰 죄를 지은 것입니다. 지금 보내 주신 편지를 받았는데, 매우 자상한 어조로 반복하여 가르쳐 주셨으며, 또 ‘적멸’이라는 두 글자를 없애고 하학인사(下學人事)의 공정(工程)을 포함시켰습니다. 이는 제가 어르신께 크게 인정을 받은 것이고 지극한 은혜를 입은 것이니, 다시 무슨 말씀을 더 드리겠습니까. 그러나 가르쳐 주신 뜻을 꼼꼼히 검토해 보니, 이단의 잘못된 주장을 모두 버리고 성문(聖門)의 학문으로 들어온 듯하여도 말씀 중에는 사소한 병통이 없지 않으며, ‘물아(物我)에 간격이 없다’라는 주장 같은 경우에는 여전히 허무적..

[고전산문] 잘못된 헤아림을 경계한다 / 최한기

얕은 소견과 좁은 도량, 어리석은 문견과 천박한 식견을 가지고는 사람을 헤아릴 수 없고, 먼저 애증(愛憎)을 마음에 두고 고집을 일삼는 자는 사람을 헤아릴 수 없고, 옛 법에 집착(執着)하고 방술(方術)에 빠진 자는 사람을 헤아릴 수 없고, 자신을 믿어서 능력을 과시하며 말이 요사스럽고 허탄(虛誕)한 자는 사람을 헤아릴 수 없고, 조급한 마음과 혼미(昏迷)한 견해를 가지고는 사람을 헤아릴 수 없고, 일을 행함이 미숙하거나 얼굴을 접함이 오래지 않으면 사람을 헤아릴 수 없다. 분수(分數)가 없고 준적(準的)이 없는 것은 처사(處事, 일을 처리함)의 선악을 측량할 수 없다. 자기 습관에 매여서 인물(人物)에 해를 끼침을 돌아보지 않고 욕심에 끌리어 윤상(倫常, 마땅이 지켜야할 상식으로써의 인간됨의 도리와 윤..

[고전산문] 가르침에 방해가 되는 4가지 단서 / 최한기

가르침에 방해가 되는 단서는 한 가지가 아니다. 크게는 국정(國政)이 문란하여 상벌(賞罰)이 거꾸로 시행되는 것이고, 다음은 풍속이 무너져서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고, 다음은 남을 이기려는 마음으로 시샘을 해서 파벌(派閥)을 지어 서로 헐뜯는 것이고, 다음은 사물에 정신을 빼앗겨 게을러져서 기풍을 진작시키기 힘든 것이다. 그러나 운화(運化)의 대본(大本)을 알고 행사(行事, 일을 행하고 실천함)와 성실로 가르침을 삼아 이 네 가지의 장해가 없어지게 된다면, 어찌 가르침이 밝아지지 않음을 걱정하겠는가. 천인(天人)의 도리를 수행(修行)하는 사람이라면 비록 이러한 가르침이 없더라도 그 본뜻을 살펴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는데, 하물며 이미 법도(法度)있는 가르침을 받아서 행동이 법도를 따르고 있는 사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