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글은 억지로 지을 수는 없다
소순(蘇洵 1009~1060)의 글 중에 '중형문보자설(仲兄文甫字說)*'은 대개 바람과 물이 서로 만나는 자연의 이치를 빌려서 바람과 물이 자주 그 형상을 바꾸는 것을 묘사해 내었다. 이로써 소순은 자신의 문장이 살아 있는 것처럼 드러나는 오묘한 이치에 대해 설명하였다.
장공(長公, 소순의 맏아들, 소식蘇軾)의 이른바 ‘대략 떠가는 구름과 흘러가는 물 같아서 처음에는 정해진 성질(性質)이 없었는데 다만 그 마땅히 해야 할 것을 마땅히 하였다.’ 라는 것과, 차공(次公, 소순의 둘째아들 소철蘇轍)의 이른바 ‘그 기운이 마음 속에 가득차서 외모에서 넘쳐나고, 그 말에서 움직여서 그 문장에 드러났지만 스스로는 알지 못했다’ 라는 것이 모두 이 글에 바탕을 둔 것이다.
무릇 글을 짓는데에는 부득이한 원인이 두 가지 있는데, 첫 번째는, 사물이 내 마음에 느낌으로 다가와 정서적으로 강렬하게 인지하게 되는 경우다. 이야말로 소순이 말한 바, ‘바람이 실로 그것을 일으킨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두 번째는, 기운은 내가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기운이 사물을 만나 스스로 억제할 수 없이 우러나오는 경우다. 이 또한 소순이 말한 바, ‘물이 실로 그것을 형상화 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 기운이 스스로 물이 되고, 또 사물이 다가와서 그 느낌을 정서적으로 알수 있게 하는 바람(風)이 된다는 것을 안다면, 작문의 이치를 깨닫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또, 옛 사람들의 득의(得意)한 작품들은 그 제목에서부터 이미 좋은 것임이 드러난다. 이는 사물에 대한 느낌과 그 정서가 진정으로 깊이 맞물려 있는 까닭이다. 이때문에 그 기운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어 읽는 사람들도 그 때문에 마음의 감흥을 절로 일으키게 된다. 이것이 바람과 물이 서로 만나 문장이 그 사이에서 자연스런 것으로 생겨난다는 증거이다.
반면에 옛 사람들이 득의하지 못한 문장들은 그 제목부터 이미 평범하다. 짓지 말아야 할만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인위적으로 억지로 힘써 지은 까닭이다. 비록 애써 아로새기고 꾸민다 해도, 뜻이 깊고 울림이 있어 감명을 일으키는 좋은 문장이 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이것은 바람과 물이 서로 만나지 못해 그 사이에 자연스런 문장이 생겨날 여지가 없는 까닭이다.
근세에 왕곤승(王崐繩)*이 귀진천(歸震川)*의 문장을 지목해서 '천박(淺薄)하고 평범하다'라고 한 것을 내가 일리가 있는 말(知言)이라고 여기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진천이 쓴 글들 중에 시골에서 주고 받은 것이 열에 여섯 일곱이다. 또 글을 원하는 사람의 입맛에 맞춰 틀에박힌 것을 그대로 따라한 것으로 잡다하고 자잘한 것을 엮었다.
이런 까닭에 비록 세상의 통속적인 문장들과 차별을 두어 화려하고 뛰어난 문장 재능을 발휘했다할지라도 어찌할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대체로 보건대 그의 평생에 바람과 물의 만남을 얻은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겠다. 이런 까닭에 진실로 글을 아는 이들로부터 천박하고 평범하다는 지적받는 것을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 오호라! 문장을 어떻게 까닭 없이 억지로 지을 수 있겠는가?
-김창희(金昌熙, 1844~1890), '소순의 글을 읽고 논하다(讀老泉文 二首)중 [其一]', 석릉선생문집(石菱先生文集) /석릉집(石菱集) 제 5권 /회소류상편(會所頴上篇)-
▲참조 번역글 출처: ☞다음 블로그 '봉블로그'
▲참고: 원문의 저자와 원전의 출처를 확인하고 글을 옮기면서 글이 조금 어려워 원문과 번역글을 참조하여, 개인적으로 이해하는 나름의 쉬운 글로, 글의 대부분을 의역하여 다시 고쳐 옮겼다. 노천(老泉)은 소순의 호다. 소식, 소철은 노순의 두아들로 세사람 모두 당송팔대가로 삼소(三蘇)라고도 불리운다.
*[원문 번역자 주]
1. 중형문보자설(仲兄文甫字說) : <숭고문결(崇古文訣)>21권, <묘절고금(妙絕古今)> 4권, <문장변체휘선(文章辨體彙選)> 430권에는 '중형문보자설(仲兄文甫字說)'이란 제목으로 실려 있고, <당송팔대가문초(唐宋八大家文鈔)> 116권에는 '중형문보설(仲兄文甫説)'이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2. 왕곤승(王崐繩) : 왕원(王源)(1648~1710)을 말한다.
3. 귀진천(歸震川) : 귀유광(歸有光)(1506~1571)을 말한다. 중국 명나라의 문학자. 자는 희보(熙甫). 호는 진천(震川). 경사(經史)에 정통하여 많은 제자를 길러 냈고, 명나라 때에 산문(散文)의 제일인자로 평가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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