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자의 인식론 / 기세춘
묵자의 인식론
1) 인류 최초의 경험론적 인식론
형이상학은 존재와 그 본질이 무엇인가를 묻는다. 인식론은 인간이 존재를 인식 가능한가를 묻는다. 인식론이 철학의 과제로 제기된 것은 중세시대인 17세기부터다. 로크의 인간오성론(1690)과 칸트의 순수이성비판(1781)은 그 대표적 저술이다.
묵자는 한울님과 귀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운명이 존재하지 않음을 인식론적으로 증명하려고 했다. 묵자의 이러한 시도는 2천년 후 서양에서 스콜라 철학자들에 의해 다시 제기되었다. 사실 서양의 중세철학은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전부였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처럼 묵자는 소박하나마 인류사상 처음으로 認識의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을 구분하고, 사실판단은 민중의 이목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경험만이 사실판단의 기준이 된다는 것으로 인류사에 경험론의 시초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당시 유가들은 지식이란 이미 마음속에 있으며 다만 그것을 상기해내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관념론 또는 선험론은 당시 동서양을 막론하고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그런데도 묵자는 인성 소염론과 경험론을 말하고 가치론을 말한 것은 인류사에 획기적인 것이었다.
<존재판단> (묵자/明鬼下篇):
천하에 有와 無를 아는 방법은 반드시 민중의 눈과 귀로 보고들은 것을 표준으로 삼아야 한다. 누군가 그것을 실제로 보고 들었다면 반드시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면 반드시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야 한다.
<天帝의 존재 증명> (墨子/天志上):
하늘이 천하 백성을 사랑한다는 것을 어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두루 평등하게 밝혀주기 때문이다.
하늘이 평등하게 밝혀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두루 평등하게 소유하기 때문이다.
평등하게 두루 소유함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늘은 백성을 두루 평등하게 먹여주기 때문이다.
평등하게 두루 먹여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온 천하에 곡식을 먹고사는 백성들은 누구나 소와 양을 치고 개와 돼지를 길러, 잿밥과 술을 깨끗하게 마련하여
상제님께 제사를 올리기 때문이다. 하늘은 고을과 인민을 소유하고 계신데,
어찌 자기의 소유인 백성을 사랑하지 않겠는가?
(墨子/明鬼篇) <귀신의 존재>
[서경]<감서>에 이르되, 계왕(啓王)은 BC 2105년 감 땅에서 큰 전투를 앞두고 좌우 신하들과 六軍의 장수들과 군사들을 모아놓고 훈시를 했다. 유호씨는 五行을 어기고 삼정을 버렸으므로 하늘이 그들의 천명을 끊어버렸다. …그러므로 성왕들은 상은 조묘에서 내렸고 벌은 사직단에서 시행했다. 종묘에서 상을 준 까닭은 분별이 고르다는 것을 알리고자 함이요, 사직단에서 죽이는 것은 판결이 합당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것이다.
<운명의 존재> (墨子/非命中篇):
그러면 어찌 백성들이 보고들은 것을 참고하지 않는가?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백성이 생긴 이래 일찍이 운명의 색깔을 보았고 운명의 소리를 들은 사람이 있었는가? 아직 그러한 일은 없었다. …그렇다면 어찌 운명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2) 지각과 마음
묵자에게 知는 재료이며 智는 경험이며, 意는 선험적 경험 또는 관념이다. 지각에 마음이 보태져야 사실을 일컬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묵자에게 마음은 아직 물들이지 않은 無知한 백지와 같았던 것이다. 묵자는 감각이 사물을 모사(模寫)하면 경험이 인식하고, 그것을 이름(名)으로 정리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이처럼 묵자는 知와 智, 그리고 意를 구분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지각과 경험, 의식과 정신을 다 같이 인정하였으나 마음보다도 경험을 더 중시하고 있다. 이것이 인류 최초의 경험론적 인식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墨子/大取篇)
智與意異. 지각에 의한 경험과 그것을 이름으로 정리하는 마음은 다르다.
(墨子/經說下下):
意未可知. 마음에는 지각이 없다.
(墨子/小取篇):
焉摹略萬物之然 지각은 사물을 접촉하여 그것을 본 뜬다.
論求群言之比. 그리고 여러 말을 비교하여 변론한다.
(墨子/經說下篇):
有文實也 而後謂之. 無文實也 則無謂也.
실(實) 즉 사물(萬物之然)은 (경험과 이성으로) 꾸미지(文) 않으면 그것을 말할 수 없다.
(墨子/經說上篇):
知 材也. 知也者 所以智也. 지각은 재료이며 경험의 도구이다.
(墨子/經說下篇):
意未可知 若楹輕於秋 마음(意)은 지각(知)이 없으므로 기둥을 회초리 같이 가볍게 생각할 수 있다.
其於意也洋然. 그러므로 마음은 지각이 없다면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그는 인식에 있어서 지각 이외에 꾸밈(文)이 필요한데 그 文은 “意”의 역할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주목할만한 중요한 발견이다.
그런데 그 意의 실체는 무언인가? 선험적인가? 아니면 후천적으로 축적된 경험인가? 그러나 그는 인성론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선험론을 부인한다. 다만 그는 축적된 경험을 관념이라고 본 것 같다. 즉 4각형, 6각형, 원형, 직선, 곡선 등 어떤 틀이 반복된 것이 사물의 形象이며 이러한 形象을 대입시켜야 이름붙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묵자의 “意” 또는 관념은 플라톤의 形相(이데아)과 비슷한 개념이다. 다만 플라톤의 이데아는 선험적인 존재였으나, 묵자의 意는 경험론적인 “智”이며 실재가 아니라는 점에서 다른 것 같다.
사실 묵자의 인식론은 天神 運命 등의 존재판단을 위한 것이지만, 결국은 天志와 利 등 가치판단을 위한 것이었다. 묵자의 “三表論”은 그것을 단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이처럼 묵자의 인식론이 실천적이라는 점에서 2천년 후 마르크스의 실천적 인식론의 선구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중국의 모택동은 묵자의 인식론을 그대로 인용 강조하고 있다.
(墨子/天志中):
子墨子之有天之意也 묵자 선생은 하늘의 뜻을 가지고,
上將以度 天下之王公大人爲刑政也. 위로는 천하 왕공대인들의 형벌과 제도를 헤아려보고,
下將以量 天下之萬民爲文學 出言談也. 아래로는 만민의 학문과 담론을 헤아렸다.
(墨子/非命上):
言必立儀. 말에는 반드시 본받을 표준을 세워야 한다.
言而無儀 譬猶運鈞之上 而立朝夕者也. 말에 표준이 없다는 것은 비유컨대
마치 돌림대 위에서 동서남북을 가리키는 것과 같아서
是非利害之辨 不可得而明知也. 시비 이해를 분별할 수 없고 밝은 지혜를 얻을 수 없다.
故言必有三表曰 그러므로 말에는 반드시 세 가지 표준이 있어야 하며
有本之者 有原之者 有用之者.
뿌리가 있어야 하고, 근원이 있어야 하고, 실용이 있어야 한다.
何於本之 上本之於古者聖王之事.
첫째, 위로 하늘의 뜻을 실행한 성왕의 역사를 本으로 삼아야 한다.
何於原之 下原察百姓耳目之實.
둘째, 백성들이 보고들은 실정을 근원으로 삼아야 한다.
何於用之 發以爲刑政 觀其中國家百姓人民之利.
셋째, 이것으로 정치를 하여 국가와 백성의 이익에 맞는지를 살펴야 한다.
(墨子/經說下):
知 知其所以不知 안다는 것은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說以名取也. 설명한다는 것은 언어로써 취사선택하는 것이다.
知 雜所知與所不知 안다는 것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섞여있을 때,
而問之 그것을 물으면
則必曰是所知也 是所不知也 이것은 아는 것이며 이것은 모르는 것이라고 말하고,
取去俱能之 是兩知之也. 그것을 취사선택할 수 있다면, 이것은 둘 다 아는 것이다.
(마르크스(1818-1883) 엥겔스/포이에르바하 테제)
모든 사회적 삶은 실천적이다. 신비주의로 호도된 모든 이론은 인간적 실천과 이러한 실천의 개념적 파악 속에서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아낸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여러 가지로 해석해 왔을 뿐이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시키는 일이다. 인간의 사유가 대상의 진리를 포착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결코 이론적인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인 문제다. 인간은 실천을 통해 사유의 현실성 즉 진리를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실천과 유리된 사유의 진리를 논하는 것은 공리공론에 불과하다.
(毛澤東(1893-1976)選集/卷一/實踐論)
이론적인 것이 객관적 진리에 부합하는가의 문제는, 감성으로부터 이성에 이르는 인식 운동에서 완전히 해결되는 것이 아니며, 이성적 인식을 다시 사회적 실천에 이르게 하고 이론을 실천에 응용하여 그것이 예상했던 목적에 이를 수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묵자의 삼표론은 혁명적인 것이다. 묵자도 진리와 가치의 근원으로 하느님을 인정한다는 점에서는 공자와 다를 바 없다. 그리고 그 표준으로 성왕을 말하는 것도 공자와 같다. 그러나 그 하느님의 뜻과 성왕의 말씀을 해석하는 기준이 다르다. 즉 진리와 가치를 판단하고 선택하는 주체가 공자에게는 성전인 성왕의 말씀을 기록한 성전이었으나 반면 묵자는 인민의 이익과 인민의 눈과 귀라고 말했던 것이다. 즉 가치판단의 주체는 성왕이 아니라 인민이라는 것이다. 공자에게 성왕은 가치의 주체였으나 묵자에게 성왕은 인민의 이익을 실천한 경험적 자료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는 성왕을 경배하라고 말했으나 묵자는 성왕을 공경할 것이 아니라 그가 한 일을 기려야 한다고 말한다.
(墨子/大取):
爲天下 厚禹 내가 천하인민을 위하여 우임금을 받드는 것은
爲禹也. 물론 우임금을 위한 것이다.
爲天下厚愛禹 乃爲禹之愛人也. 그러나 그것은 우 임금이 사람들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厚禹之爲加於天下 우 임금의 행위를 떠받드는 것은 천하에 보탬이 되는 것이지만,
而厚禹不加於天下. 우임금 자신을 떠받드는 것은 천하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
若惡盜之爲加於天下 도둑질하는 것을 미워하는 것은 천하에 보탬이 되지만
而惡盜不加於天下. 도둑을 미워하는 것은 천하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
이것은 유대민족의 에덴동산 추방사건을 비유한 창세기의 善惡果를 연상시킨다. 선악과라는 가치의 근원은 오직 하느님 한 분 뿐이라는 데는 공자나 묵자나 창세기의 저자나 다를 바 없다. 이들은 똑같이 인간들이 저마다 자의적인 자기주장을 진리라고 강압하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창세기는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는 것은 죄악으로 규정한다. 아마 창세기의 저자는 에덴왕국이 멸망한 것은 국론분열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이러한 해석은 공자나 묵자도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혹자들은 한발 더 나아가 인간은 가치의 주체가 아니며 가치를 말해서도 안 되고 오직 성왕의 말씀만을 따라야 한다고 해석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대부분 지배자들이요 기득권자들이다. 이데 대해 공자는 찬성할지 모르나 묵자는 반대 했을 것이다. 공자와 묵자의 차이는 역사의 주인이 성왕이냐 인민이냐의 차이였던 것이다.
★글쓴이: 기세춘(1937~)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창립. 저서로는 『천하에 남이란 없다-묵자』『우리는 왜 묵자인가』『예수와 묵자』『신세대를 위한 동양사상 새로 읽기』등 다수.
원글출처: 평화전문인터넷신문 평화만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