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문장이란 '말에 법이 있는 것'을 일컬음이다
문장이라는 것은 말에 법이 있는 것을 일컬을 뿐이니 문(文)은 말이고, 장(章)은 법이다. 사람들은 반드시 뜻을 둔 이후에 말을 할 수가 있고, 말은 반드시 법을 둔 후에 서술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문(文)이라는 것은 뜻에 근원을 두고서 법으로 완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뜻에는 기이함과 바름의 차이가 있고, 법에는 고금의 변화가 있으니 이는 알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한결같이 기이함만을 구한다면 뜻은 반드시 항상 기이할 수만은 없어서 때때로 쉽게 곤궁해지고, 한결같이 바르기를 구한다면 뜻은 항상 바르고 저절로 기이해질 때도 있다. 지세가 깎아지른 듯 한 바위가 언덕에 매달려 있고, 푸른 물결이 굽이쳐 흐르는 것은 한 모퉁이 한 구비라도 볼만한 것이 없지는 않지만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
통읍 대도시(通邑·大都)와 수만가구(萬家)의 성(城)에 이르러서는 산천(山川)의 넓게 트여있음과 시정(市井)의 번성함과 누관(樓觀)의 웅장함은 감추어도 다하지 않고 보아도 싫증나지 않는다. 기이함을 구하지 않더라도 천하의 진기(眞奇)함이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귤과 유자,사과와 배,용안과 마유는 진기하고 특이한 것으로 사람들의 입을 상쾌하게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또한 하루아침의 즐거움일 뿐이고, 끝내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태관(太官, 궁궐)부엌에 있는 수륙(水陸)의 음식들은 모든 맛이 갖추어져 있고 먹으면 배를 부르게 할 수 있으니 여기에서 살핀다면 기정(寄正,기이한 것과 바른 것, 단어 원래의 뜻은 그때그때의 상황, 형편에 따라 둘러대는 수단과 원칙적인 방법을 아울러 뜻하는 말)의 차이를 알 수 있을 것이다.…(중략)…
아! 뜻의 올바름을 구하고자 한다면 육경(六經)만한 것이 없고, 지금 본받을 만한 것은 당송팔대가(唐宋八家)만한 것이 없으니 육경은 뜻이 말미암는 근원이고, 팔가의 문장은 법이 말미암아 완성된 것이다. 육경에서 내려가 주돈이, 정이천, 장재, 주희는 그 이치를 배웠을 뿐 구차히 그 辭(말씀 사, 문장, 글)에서 취함이 없었고,당송팔가로 말미암아 거슬러 올라가 위로 사마천, 반고, 장자, 좌구명에 이르기까지 그 문체(體)만을 배웠을 뿐 구차히 자구(字句)를 답습하지 않았으니 그 또한 거의 정수를 얻은 사람들이로다.
천하의 문장은 명(明)나라의 문장보다 비루한 것이 없으니 그 피폐해진 까닭은 대체로 두 가지로, 바른 것은 버리고 기이함만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서문장. 종백경등은 비유하자면 도깨비불이 변화하는 것과 같아서 사라져도 그 괴이함은 보인다.
또 현세(現世)를 천하게 여기고 옛것만을 숭상하였기 때문이니, 이몽양(李夢陽)과 태창(太倉 )사람 왕세정(王世貞)과 같은 자들은 소동파가 말한 진(秦)나라 선비가 대왕(大王)의 지팡이를 잡고 순(舜)임금의 그릇만을 붙잡고 다니며 태공(太公)과 구부(九府)의 돈만 구걸하는 자이니, 어찌 문장에 대해 의논할 수 있겠는가?
-신완(申琬,1725~?),'문설(文說),『병세집(幷世集)-윤광심(尹光心, 1751~1817)/文卷之一 』-
▲번역글 출처: 이화진(李和珍)의 논문,『尹光心의 幷世集 硏究』(영남대학교 대학원 한국한문학전공, 201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