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후안무치 / 공치규
종산(鍾山)의 정령과 초당의 신령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말을 달려 산 자락의 넓은 터에 이 글을 새기게 하였다. 모름지기 은사(隱士)란, 무릇 정직하여 지조와 절개가 혼탁한 세속에서 두드러지게 빼어나는 풍모가 있어야 하고, 마음이 씻은 듯이 맑고 깨끗하여 번잡한 세속을 뛰어넘는 기상이 있어야 하며, 몸은 흰눈을 방금 건너서 온 것처럼 결백하여야 하며, 뜻은 하늘의 푸른 구름을 능가하여 곧바로 하늘 위에 다다라야 하는 것이다. 나는 은사(隱士)들이 이 세상에 남긴 자취를 이렇게 알고 있다.
은사(隱士)란 만물 위에 우뚝 솟아있고 밝아서 노을같은 속세 밖에서 빛나고 있어야 한다. 노중련처럼 천금을 초개같이 여겨 돌아보지 않아야 하며, 요순처럼 만승의 천자의 자리라도 신발짝을 버리듯 하여야 한다. 주의 영왕의 태자 진이 낙포에서 생황으로 봉황의 울음소리를 내는 것을 들은 것과 또는 소문선생의 연뢰에서 나뭇꾼의 노래를 들었던 일, 이 같은 사례들이 또한 이 세상에 진실로 실제 하였다.
어찌 기약하였으리오, 이 산의 벗이던 주옹의 마음이 처음과 끝이 달라 푸르고 노랗고가 반복될 줄이야 어찌 알얐으랴. 묵자가 흰 것이 여러 염료에 물들어짐에 눈물 흘리고 양주가 선과 악의 갈림길에서 통곡하는 것을 아파한 것이 어찌 이와 다를 것인가. 잠시 혼탁한 세속으로부터 발걸음을 돌렸으나, 이내 마음은 속세에 다시 물들고 혹은 처음에는 지조가 곧았으나 나중에는 더러워졌으니 어찌하여 이렇게 잘못되어 버렸는가? 아아! 상 선생(尙生)은 이 세상에 있지 않고 중씨(仲氏)는 이미 가버렸으니, 산천은 쓸쓸하고 적막해져 버렸고, 천년 동안 그 누가 이 산천을 찾아와 즐거움을 누렸던가?
세상에 주옹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아주 뛰어난 선비였다. 문장을 잘 짓고 박식하였고, 현묘한 철학에 통달하고 역사에도 밝았다. 그러나 학문은 동로 안합의 은거 사상을 따르고 관습은 은사인 남곽자기의 무아경을 익혔다. 그러나 그는 은자가 아니면서 거짓 초당에서 살았고 북악에서 함부로 은자들이 쓰는 두건을 쓰고 다녔다. 그는 북산(北(山)의 소나무와 계수나무를 유혹하였고 북산의 구름과 골짜기를 속여왔다. 비록 그가 강가에서 은자를 흉내 내었으나 마음은 부귀영화와 높은 벼슬에 얽매여 있었다.
그가 처음 이 산에 들어왔을 때에는 위대한 은사인 소부를 밀어낼 듯 하고 허유의 기세를 끌어내릴 듯 하였고, 제자백가도 우습게 보고 오만하였으며 왕후장상도 멸시하였다. 그의 호방한 성정은 햇살처럼 널리 퍼지고 서릿발같은 기상은 가을하늘을 가로질렀다. 때로는 은자들이 오래전에 가버린 것을 탄식하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왕손이 이곳에 노닐지 않음을 원망하기도 했었다. 불가의 경전을 들이대며 공(空)이 어쩌고 저쩌고 갑론을박 담론하며, 도가의 경전을 펼쳐놓고 현(玄)을 탐구하기도 하였다. 이러할진대 그 옛날 은자 무광이 어찌 족히 주옹과 비견될 수 있겠으며, 제나라의 약초 캐는 은자인 연자도 이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사자를 태운 말이 울음소리를 내니 골짜기에 들어오고, 나라의 조정에서 은자를 초빙하는 학두서(鶴頭書)가 산 언덕을 넘어오자 그는 정신없이 맞이하러 뛰어나가 넋이 흩어져 달아나 버렸다. 그 요란했던 지조는 변하고 정신은 동요되어버렸다. 그리고는 너무 기뻐 눈썹을 치켜올리고 자리에 나란히 앉고, 신이나 소매자락을 펄럭이며 춤추었다. 그는 풀로 만들어 입었던 옷을 불살라버리고, 연잎옷을 찢어버리고, 마침내 금세 속물의 모습으로 돌아와 먼지 낀 얼굴을 뻣뻣이 드러내며 마구 달려 나갔다. 바람과 구름은 슬퍼하며 분노를 띠었고 돌사이로 흐르는 시냇물은 오열하며 구슬피 흘러내려갔다. 수풀우거진 산봉우리를 바라보니 실망하는 듯하였고 초목을 돌아보니 어처구니가 없어 넋이 나간듯 하였다.
마침내 주옹은 현령의 인장을 몸에 차고, 검은 인끈을 꿰어차고서 본주(本州)에 딸려있는 웅장한 성에 걸터앉아 사방 백리인 현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바다가 가까운 해염현에 덕풍을 널리 펴고 절강의 오른쪽인 회계에서 영예를 휘날리게 되니, 도가의 책은 오랫동안 버리고 보지 않았고 불법(佛法)을 강론하던 자리를 오랫동안 묻어두고 쓰지 않았다. 죄인을 매질하던 시끄러운 소리에 그의 생각은 파묻혀 버리고, 공문서와 송사에 몯두하느라 그의 마음이 얽매이게 되니, 가야금과 노래소리를 음미하던 풍류는 이미 끊어져 버렸고 술마시며 시를 읊던 정취도 사라져 버렸다. 항상 관리들의 업무에 마음이 묶여있고 매번 옥사의 시비를 판단하는 재판에 마음이 어지럽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한대의 명망이 높았던 고을 수령인 장창과 조광한을 지나간 시대의 본보기로 마음에 품었으며 후한의 훌륭한 관리였던 탁무와 노공을 이전 사람들 중의 본보기로 추가하였다. 그는 장안을 둘러싼 삼보의 장관의 발자취를 좇으려 하였으며 온 천하의 지방 장관 중에서 이름을 떨치려 하였다.
저 높이 드리운 노을 외로이 그림자 비추고, 밝은 저 달도 홀로 외롭다. 푸른 소나무 아무도 찾는 이 없어 하릴없이 그늘만 드리울 뿐이고, 흰 구름 떠 있으되 그 누구와 함께 할까. 자갈 사이로 졸졸 흐르던 물 인적이 끊겨 함께 돌아 올 이 없고, 황량해진 저 자갈 길 찾는 사람없어 행여 누가 올까 목을 빼어 기다린다. 은사가 묵던 거처 휘장 안까지 회오리 바람이 불어 닥치고, 기둥밖에는 뿌연 안개가 올라 온다. 풀로 엮은 장막은 텅비어 학은 밤마다 원망의 울음 울고 산인(山人)이 떠나고 없어 새벽에 원숭이 놀라서 우는구나. 옛날의 소광은 미련없이 벼슬을 버리고 동해군의 향리로 돌아와 은거했다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 주옹은 난초로 만든 띠를 풀어 던지고 속세의 먼지 묻은 갓끈을 매었구나.
이에 남산은 북산에서 조롱을 보내고 북산의 작은 언덕들도 비웃음 소리를 높였으며 줄지어 있는 골짜기들은 다투어 꾸짖고 옹기종기 모인 봉우리들은 소리높여 비난하였다. 산골짜기를 떠나버린 주옹이 북산을 속인 것에 분개하고 위로하여 오는 사람이 없음을 슬퍼한다. 그러니 북산 우거진 숲의 치욕은 끝이 없고 시냇물의 부끄러움은 다함이 없다. 가을 계수나무는 바람을 피하여 보내고 봄에 만연한 쑥 나물(春蘿)은 달을 외면해 버렸다. 서산(西山)의 백이 숙제의 은일하던 높은 뜻을 널리 선포하고 동고에 은거하던 완적같은 소박한 사귐에 널리 치달았다.
이제 주옹은 하읍에서 행장을 수습하여 나와서 배를 타고 경사(왕궁이 있는 도읍지)로 향할 것이다. 비록 그의 마음이 벼슬을 하려 대궐에 두어져 있으나 혹시 거짓 발걸음으로 이 북산의 입구에 발을 들여 놓을지 모른다. 어찌 팥배나무에게 얼굴을 두껍게 하라 할 것(厚顔)이며, 덩굴나무에게 부끄러움을 모르게 할 것(無耻)이며, 푸른 산마루로 하여금 다시 욕보이게 할 것이며, 붉은 벼랑으로 하여금 다시 더러움을 입도록 하겠는가?
먼지같은 세상 속에 노닐던 발길이 은사가 노닐던 향기로운 난초(蕙草)가 자라나는 길을 더럽힐 수 있으랴. 맑은 연못을 주옹이 혼탁하게 만들고 변절하였다는 말을 듣고 귀를 씻을 따름이다. 마땅히 산의 진입로에 장막을 쳐서 막아버리고 구름으로 관문을 덮어버리고 은은한 안개를 거두어 들이고 소리내어 흐르는 시냇물을 감추어야 한다. 주옹이 타고 오는 수레의 끌채를 골짜기 입구에서 잘라버리고 망령되이 들어오는 말 고삐를 교외에서 막아버려야 한다.
이에 촘촘히 떨기를 이룬 나뭇가지는 놀란 듯이 눈을 부릅뜨고, 수많은 풀 이삭들은 혼이 날아갈 듯이 분노하여 우듬지 일제히 가지들을 던져 주옹이 타고 오는 수레바퀴를 부러뜨리려야 한다. 우듬지 모두 낮게 드리워 산길의 자취를 쓸어버리고 지워야 한다. 청컨대, 배신하고 도망간 속물 선비의 수레를 돌려 보내어 거짓 은사(隱士)를 맞아들이지 않는 것이 곧 북산(北山)의 임금인 나를 위하는 일이다.
-공치규(孔稚圭 447~501), 북산이문(北山移文), 『고문진보후집(古文眞寶後集) 』-
※참조: 번역문은 "빈막"(티스토리 블로그)과 홍승직교수(순천향대)의 「북산이문 역해」를 참고하고 대부분 표절하였다. 공치규의 북산이문은 한자성어 "후안무치(厚顔無恥)"의 출전이 되는 글이다. 후안무치란, "뻔뻔스러워 부끄러움이 없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흔히 인터넷 상이나 다양한 언론매체에서 전하는 후안무치의 일반적인 유래는 《상서(尙書)·우하서(虞夏書)》 중 《오자지가(五子之歌)》에 출전을 두는 것으로 찾아진다. 이는 하나라 왕인 태강의 태만과 실정으로 제후가 반란을 일으켜 나라가 멸망하게 되자 태강의 다섯 아우들이 형을 원망하며 읊은 가사에 근거를 둔다. 그 내용은 "만백성들은 우리를 원수라 하니, 우린 장차 누굴 의지할꼬. 답답하고 서럽구나. 안타까운 이 마음, 낯이 두꺼우니 부끄럽고 창피스럽기 그지없구나(鬱陶乎予心, 顔厚有忸怩)"다. 이는 교훈적인 의미로는 연관이 있지만 유래가 되는 근거로 삼기에는 무언가 부족하다. 대신에 시경(詩經)의 小雅(소아) 巧言(교언)편에 소인들의 참언으로 쫓겨난 사람이 어리석은 임금을 풍자하는 내용이 찾아진다. 그중에 ‘피리 불듯 교묘한 말은 낮짝이 두꺼워 창피도 모르는 뻔뻔한 자들이 내뱉는다네(巧言如簧 顔之厚矣 교언여황 안지후의)’란 구절이다. 이는 북산이문과 함께 "뻔뻔스러워 부끄러움이 없다"라는 '후안무치'의 출전이 되는 근거가 "오자지가(五子之歌)"보다 더 명백해 보인다. 요즘 언론지상에는 후안무치의 전형들이 마치 파리떼 들끓듯이 보이는 터라, 늘 입에 달면서도 '후안무치'라는 사자성어의 출전이 궁금해서 나름 뒤져봤다. 거듭 말하지만 패악질, 막장짓은 판을 깔아줘도 아무나 하지 못한다. 아울러 가끔은 익숙한 상식도 한번쯤은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2018. 4.30)
"자신의 후안무치에 대해 가끔이나마 자각을 한다는 건 괴로운 일이다. 그럴 때마다 글쓰기가 몹시 싫어지니까 말이다. 공적 발언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자신이 실천할 수 있는 것 너머를 이야기하지 않게 되면 여러 가지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다. 무엇보다도 언행일치를 하는 사람 위주로 글쓰기 시장이 물갈이돼 담론과 세상의 거리가 좁혀지고 그에 따라 실천력도 강해질 게 아닌가. 정치권의 후안무치 동지들에게 새삼 경외감을 갖게 된다. 그들에겐 이런 고민도 없을 터이니 말이다." -강준만(2006.5.4 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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